주간동아 627

2008.03.18

“폴리페서는 어용교수의 후예”

권력 탐하는 공통적 특성 … 뒤집기·파렴치·나팔수 세 유형으로 분류

  • 홍성태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참여연대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입력2008-03-12 10: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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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리페서는 어용교수의 후예”

    지난해 7월29일 구양근 성신여대 총장(가운데) 등 교수·지식인 1016명이 서울 여의도 이명박 대통령후보 사무실에서 이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교수들을 대거 수석비서관이나 장관으로 기용하면서 또다시 ‘폴리페서(polifessor)’ 논란이 빚어졌다. 폴리페서란 정치를 뜻하는 영어 ‘폴리틱스(politics)’와 교수를 뜻하는 ‘프로페서(professor)’를 합한 조어(造語)다. 흔히 ‘정치교수’로 번역돼 사용된다. 그리고 이렇게 옮겨놓으면 조금은 그럴듯해 보인다. 언뜻 ‘정치를 가르치는 교수’ 또는 ‘정치를 잘 아는 교수’를 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폴리페서’ 또는 ‘정치교수’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교수의 직위를 이용해 정치권에 진출하려 하거나 진출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만큼 매우 부정적인 단어가 아닐 수 없다.

    폴리페서의 목표는 ‘오로지’ 권력이다. 입으로는 정의나 평화를 말해도 속으로는 언제나 권력을 갈구한다. 또한 폴리페서는 대학사회를 어지럽히고 정치를 타락시킨다. 지식과 지식인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우리 사회에 그늘을 드리우는 어두운 존재들이다.

    폴리페서로 인해 학생들 가장 큰 피해

    폴리페서는 독재시대의 어용교수와 비교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어용교수’는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 독재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지식을 제공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받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어용교수는 폴리페서의 하위유형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시절, 우리나라의 많은 교수들은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어용교수들에 맞서 싸웠다. 그 결과 민주화는 진전됐고 그들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빈자리는 권력을 탐하는 폴리페서들의 차지가 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폴리페서는 우리의 취약한 민주화를 성찰해볼 수 있는 하나의 계기인 셈이다.

    대학 등록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요즈음, 폴리페서 문제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폴리페서는 학부모의 등을 휘게 해놓곤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는커녕 정치권 진출을 위해 권력에 줄을 대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폴리페서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학생이며, 그 다음은 학부모다. 폴리페서 문제를 학생과 학부모의 시각에서 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폴리페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서 정치와 교수 사이에 콘크리트 옹벽을 만들어놓을 필요는 없다. 교수는 어떤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과 경험을 지닌 전문가다. 따라서 교수가 사회발전을 위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강단에 서서 그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 전제조건이 따른다.

    첫째, 자신의 깊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연구와 강의를 제대로 하지 않던 자가 교수라는 직함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국민을 상대로 한 사기행위다. 둘째, 정치에 참여하는 동안 잘못된 정책을 그럴듯한 지식으로 포장하는 짓을 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짓 역시 국민을 상대로 한 사기행위다. 당연히 이런 사기 경험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선 안 된다.

    그렇다면 폴리페서에는 어떤 유형이 있을까. 필자는 학자로서의 능력이나 업적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고 본다.

    폴리페서 창궐한 사회 지식인에 대한 불신 커져

    첫째, 뒤집기형 폴리페서다. 이는 학자로서의 능력과 업적은 널리 인정받지만 정치에 진출하기 위해 자신의 평소 의견을 싹 뒤집는 경우다. 이 유형은 학자로서의 능력과 업적을 널리 인정받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정계에 진출한다. 그러나 자신의 평소 의견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능력과 업적을 의심케 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이들은 뒤집기라는 비판에 대해 자신의 의견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변은 불신만 더 키운다.

    둘째, 파렴치형 폴리페서다. 이는 평소 연구와 강의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능력과 업적을 위조해 이름을 알리고 권력에 줄을 대는 경우다. 논문이나 저서 표절은 물론, 횡령까지 저지르는 교수도 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잘 속아 넘어간다. 나름대로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기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높이 사는 사회는 상당히 썩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나팔수형 폴리페서다. 이는 자신이 줄을 댄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온갖 주장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널리 유포하는 경우다. 권력자는 사실 많은 결함을 안고 있다. 전문가인 교수는 그 결함을 감시하고 비판하고 보완해야 한다. 그러나 나팔수형 폴리페서는 권력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임무를 내팽개치고 오로지 자기가 따르는 권력자를 위해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일삼는다. 먹이를 주는 사람만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는 ‘개의 의리’를 나팔수형 폴리페서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정치는 중요하고 필요하다. 또 정치와 교수는 결코 격리돼선 안 된다. 그렇다고 둘의 관계가 무작정 친밀해서도 안 된다. 이와 관련해 16세기 영국의 대표 지식인이자 정치인이던 토머스 모어는 1516년 발간한 ‘유토피아’에서 지식인의 정치 참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터 : 라파엘 선생님, 선생님 같은 분이 왜 정치에 참여하시지 않는지 알 수가 없군요. 어떤 왕이든 기회가 된다면 분명히 선생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할 텐데 말입니다. … 선생님 자신도 이익을 취할 수 있을 테고, 친구들과 친척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텐데요.

    라파엘 : …그들은 내가 자신들을 위해 왕의 노예가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피터 : …제가 말씀드린 것은 공직에 나가 봉사하는 것이지 노예가 되시라는 게 아닙니다.

    라파엘 : 노예가 되라는 말(servias)과 봉사를 하라는 말(inservias)은 음절 몇 개 차이죠.

    (권혁 옮김/ 돋을새김/ 2006/ 39~40쪽)

    토머스 모어의 말을 빌리면 폴리페서는 ‘노예’가 되기 위해 애쓰는 교수다. 이런 교수는 사회를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본인에게도 불행한 존재다. 폴리페서가 창궐한 사회에서는 지식과 지식인에 대한 우려, 불신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서 성숙과 발전을 꾀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폴리페서 문제를 심각한 병리현상으로 파악하고 대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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