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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가 카자흐스탄에 간 까닭은…

자원 천국에서 마지막 승부수?…광활하고 공권력 미비해 은신에도 제격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정태수가 카자흐스탄에 간 까닭은…

정태수가 카자흐스탄에 간 까닭은…
지난해 11월30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주요 도시 알마티에 자리한 ‘카자흐스탄 호텔’. 카자흐스탄에 출장 온 모 대기업 직원 K(34)씨는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한 노인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외환위기의 주범’이자 ‘4년 연속 개인 체납액 1위’로 악명 높은 한보그룹 전 회장 정태수(85·사진) 씨였기 때문이다.

넓은 이마에 두툼한 눈두덩, 그리고 그의 곁을 항상 지키는 미모의 여비서 2명까지…. 카자흐스탄이 낯선 K씨는 구치소에 있어야 할 정씨를 이역(異域)에서 만났다는 신기함에 주위 한인들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정태수 씨가 이 호텔에 자주 머물다 가요. 여름엔 이곳(알마티) 키멥대학의 공식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는데요.”

정씨가 카자흐스탄 유명 호텔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을 때 우리 정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강릉영동대학 교비 72억원 횡령사건의 항소심 공소를 유지하고 있는 서울고등검찰청(서울고검)은 지난해 12월11일에야 비로소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출국했다는 정씨의 카자흐스탄행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제야 법무부에 “카자흐스탄 정부에 정씨에 대한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한반도의 12배나 되는 광활한 면적에 공권력마저 미비한 중앙아시아 한복판에서 정씨를 붙잡아 송환하기란 간단치 않다는 게 현지 반응이다.

석유 비롯 다양한 광물 매장 … 한중일 모두 눈독



카자흐스탄 한인사회에서는 그가 마지막 재기를 꿈꾸며 몇몇 자원개발사나 건설사들과 접촉 중이라는 말이 흘러나온다. ‘운과 배짱 그리고 로비경영’의 상징인 그가 최후의 승부수를 던질 수 있는 땅은 오직 ‘자원과 기회의 천국인 카자흐스탄’일 것이라는 설명까지 뒤따른다.

비단 고령의 정씨뿐 아니라 수많은 한국 기업인에게 카자흐스탄은 꼭 한 번 방문해야 할 특급 투자 유망지로 떠올랐다. 중국 러시아 몽골 베트남에 이은 대형 투자처이자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골드러시에 대한 기대감에서다. 특히 한국이 당면한 ‘자원외교’라는 시대정신과도 일치한다는 평가다. 도대체 카자흐스탄에는 어떤 기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카자흐스탄 독립 초기엔 자원개발을 목표로 한 정유사나 종합상사에 편중됐다면, 지금은 국내 대형 건설사, 금융권, 심지어 국내 유수 로펌까지 나서서 카자흐스탄을 중앙아시아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고 있다. 거의 모든 기업이 왔다 갔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현지 투자컨설팅 AK그룹의 양용호 대표)

돈을 좇는 공격적인 기업인들이 카자흐스탄에 주목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요즘처럼 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값이 치솟는 시장 상황에서는 카자흐스탄의 주가가 연일 상종가다.

카자흐스탄의 가치를 우리에게 최초로 각인시킨 인물은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 차용규(52) 전 카작무스 대표다. 그는 1995년 삼성물산 알마티 지점을 맡으면서 카자흐스탄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삼성물산에서 지분을 인수해 세계 10대 구리광산을 소유한 카작무스 공동대표에 올라 기업공개에 성공했다. 지난해 3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그의 재산을 13억 달러(약 1조2000억원)로 평가, 전 세계 754번째 부자로 기록됐다.

차 대표는 공식석상에 얼굴을 드러내기를 꺼려해 카자흐스탄 현지는 물론 한국에서조차 ‘마피아 후견인설’ ‘삼성 밀약설’ 등 미심쩍은 시선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차용규 신화’의 밑바탕에는 카자흐스탄의 풍부한 지하자원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카자흐스탄의 석유와 가스 가채매장량은 각각 400억 배럴(bbl)과 65조㎡에 이른다. 아직도 미개척지가 많아 전체 매장량은 웬만한 중동 산유국보다 많은 세계 7위권 수준으로 예측된다. 하루 석유 수출량은 이미 130만 배럴을 넘어섰으며, 2010년까지 200만 배럴을 내다보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하루 석유 소비량에 육박하는 수치다.

‘멘델레예프 주기율표의 화학원소가 모두 매장된 나라.’ 이는 카자흐스탄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이다. 실제로 세계 2위 수준의 우라늄 광산을 비롯해 구리 금 은 아연 망간 등 14종의 광물이 세계 10위권 매장량을 자랑한다.

단순히 지하자원만이 아니다. 내수 경기도 갈수록 좋아지고 있다. 1600만명 내외의 많지 않은 인구지만 ‘오일 머니’ 덕에 어느새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6000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예전 독립국가연합(CIS)의 촌스러움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10%를 훌쩍 넘었고, 2007년 벤츠 S클래스 판매량 세계 1위를 카자흐스탄이 차지했다는 보고서까지 나왔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도 카자흐스탄이 자원 부국인 카스피해 연안 CIS 의장국의 구심적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꼽는다. 지하자원뿐 아니라 천혜의 자연경관까지 갖추고 있어 관광사업도 유명하다는 평가다. 결정적으로 1970년대 우리나라 유신체제와 비슷한 정치체제를 갖고 있어 외국인 투자자에게 관대하다는 점도 매력이다.

이 때문에 카자흐스탄 유전 개발에 수많은 한국 기업이 뛰어들었다. 거의 모든 종합상사가 참여했다고 보면 된다. 석유공사 삼성물산 LG상사 GS칼텍스는 이미 유전 탐사를 진행했고, 국내 대표적 석유기업인 SK에너지 역시 유전사업의 성적표를 기다리고 있다.

대형 건설사들 이미 진출해 아파트 등 전방위 사업 펼쳐

정태수가 카자흐스탄에 간 까닭은…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의 전경. 1997년 수도 이전으로 시내 곳곳에서 건물이 신축되고 있다.

자연스레 건설경기도 좋아져, 우리나라의 GS건설 동일하이빌 같은 대형 건설사들까지 뛰어들어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서부터 아파트 건설까지 전방위로 사업을 확장 중이다. 국내 금융권의 진출 역시 활발하다. 신한은행이 은행 설립 인가를 획득했고, 국민은행은 아예 현지 은행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로펌 사이에서도 2년 전부터 “중국이나 베트남이 아니라,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으로 행로를 돌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 기업의 진출이 도드라지지만 경쟁국인 중국 일본의 움직임도 뒤지지 않는다.

2006년 당시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우라늄 광산 채굴권 조율을 위해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을 찾았다. 일본 총리가 자원외교를 위해 해외를 방문한 것은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이에 질세라 지난해엔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나서서 기존 송유관을 700km 연장하는 방안과 가스관 건설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카자흐스탄에서 한국 기업의 투자컨설팅을 해온 AK그룹 양용호 대표는 “카자흐스탄은 고려인이 10만명을 넘을 정도로 우리와 인연이 깊은 땅이라 정감이 간다”면서도 “마치 골드러시를 방불케 할 만큼 무턱대고 달려드는 한국인들의 행태는 예전과 똑같다”며 아쉬워했다. 실제 내놓을 만한 성과를 거둔 기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정태수 전 회장은 검찰의 추적이 시작되자마자 종적을 감췄고, 최근에는 삼성 특검의 칼날이 ‘카작무스-삼성물산’ 의혹에까지 미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가능성과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종의 ‘상징적 사건’인 셈이다.



주간동아 2008.03.04 625호 (p28~29)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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