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3

2017.01.25

경제

라면값 내리면 서민경제 살아날까

박근혜 정부 오락가락 물가정책…‘눈 가리고 아웅’ 식 말고 큰 그림 그려야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7-01-23 18:20:08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설을 앞두고 물가 관련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라면, 맥주, 빙과류의 가격이 줄줄이 오르고 1월 말 참치통조림 가격 인상도 예정돼 있어 서민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내용이다. 일부에선 식품업체들이 대통령 탄핵소추로 야기된 국정공백을 틈타 기습적으로 제품 가격을 올렸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가 물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월 19일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최초로 ‘물가관계 장관회의’가 열린 건 심상찮은 물가 인상 분위기를 감지한 정부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이날 회의는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재하고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 차관과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 부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유 부총리는 “정부는 최근 가격이 오른 농산물, 가공식품, 지방 공공요금 안정을 위해 최우선의 노력을 집중하겠다”며 “가공식품의 경우 소비자단체와 함께 가격 감시 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편승이나 담합 등엔 정부 차원에서 엄정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식료품업계에 ‘더는 가격 인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잡으려니 오르고, 올리려니 꿈쩍 않고

    눈여겨볼 것은 정작 박근혜 정부가 ‘최순실 게이트’로 식물 정부가 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이런 회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가관계 장관회의를 열심히 한 건 이명박 정부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8년 3월 관계부처에 “서민 생활과 직결된 물품 가격을 집중 관리하라”고 지시했고 기획재정부는 라면, 소주, 우유, 과자 등 52개 관리 대상 품목을 정했다. 이후 열흘마다 가격 동향을 점검했다. 이른바 ‘MB물가지수’를 만든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당시 정부는 공정위를 물가관리기관으로 삼아 ‘MB물가지수’에 속하는 상품의 가격 변동에 깊이 관여했다. 농심이 멋모르고 프리미엄 제품을 내놓았다 뭇매를 맞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2011년 4월 출시된 ‘신라면 블랙’ 얘기다.

    농심은 당시 이 제품의 개당 가격을 일반 라면의 2배가 넘는 1600원으로 책정했다. 그리고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이 그대로 들어 있다’고 광고했다. 공정위는 이 대목을 문제 삼았다. 이례적으로 제품 성분 조사까지 실시한 끝에 허위·과장 광고 등 혐의로 그해 6월 농심에 시정명령과 과징금 1억5500만 원을 부과했다. 업계에서는 ‘다른 식료품업체들이 제품 가격을 올리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인 것’이라는 뒷말이 돌았다. 농심은 이후 해당 제품의 가격을 1450원으로 인하했다 그해 8월 출시 넉 달 만에 국내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연구개발에 3년을 쓰고, 시설투자 비용으로만 100억 원을 들인 제품의 쓸쓸한 말로였다.  



    그러나 서슬 퍼런 칼날로 라면값을 잡았다고 물가까지 잡힌 건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임기 내내 물가 급등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농협경제연구소가 2011년 펴낸 ‘우리나라 물가 구조의 특징과 시사점’ 보고서에는 ‘정부가 2010년 하반기부터 각종 물가 안정 대책을 발표하며 행정력을 동원한 미시적 대응에 치중. 2011년 대통령이 ‘물가와의 전쟁’을 언급한 후 정부의 물가대책은 더욱 미시화되는 양상’이라는 대목이 있다. 이 보고서는 ‘물가 안정을 위해 정책당국이 주요 생필품과 서비스의 가격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적절한 대응 방식이 될 수 없다’고 꼬집기도 했다. 실제로 이 전 대통령이 ‘물가와의 전쟁’을 벌인 2011년 우리나라 물가상승률은 4%를 기록했다(표 참조).

    반면, 박근혜 정부는 ‘물가관계 장관회의’ 한 번을 안 하고도 물가상승률 1%대 이하를 유지해왔다. 식료품, 주류 등 소비자 구매 빈도가 높은 품목 중심으로 별도 집계한 생활물가의 경우 전년보다 떨어진 해도 있다. 저물가 현상이 이어지자 경제 전문가 사이에서 한국이 일본처럼 ‘저물가→기업 매출 감소→성장 정체→소득 감소→소비 위축→저물가’라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왔다. 결국 정부는 2015년 말 물가정책의 틀을 바꿨다. 최경환 당시 경제부총리가 나서 “우리나라는 그동안 경제성장률을 관리할 때 실질성장률(물가 상승분을 뺀 성장률)을 중시했다. 앞으로는 경상성장률(물가 상승분을 포함한 성장률)을 함께 보겠다”고 밝힌 것이다. 업계는 이를 물가 부양 드라이브로 이해했다.

    통계와 따로 노는 체감 물가

    한국은행은 2015년 말 정부와 협의해 ‘중기 물가안정목표’를 수립, 발표한 바 있다. 이때 밝힌 목표치가 ‘2016~2018년 물가상승률 2%’이다. 그러나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소비자물가는 전년 대비 1.0% 오르는 데 그쳤다. 각종 생활필수품 물가가 급등했다고 알려진 지난해 12월 물가상승률도 통계상으로는 1.3%에 불과하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이 때문에 지난해 두 차례나 물가 관련 공개 설명회를 열고 “물가상승률이 2%에 접근하도록 통화정책을 펴겠다”고 천명했다. 지난 1년여 동안 정부는 이처럼 경제정책 수장과 중앙은행 총재 등을 동원해 수차례 “물가를 올리겠다”고 밝혀왔다.

    문제는 정부가 ‘저물가로 인한 한국 경제위기 상황’에 대해 경보음을 울리는 상황에서 정작 서민은 ‘물가가 너무 올라 못 살겠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주부 안현의 씨는 “물가가 낮아 문제라는 얘기를 믿을 수 없다. 월세와 아이 교육비 등 정기적으로 나가는 돈이 계속 느는데 식료품값까지 올라 가계수지를 맞추기가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해 11월 오비맥주(맥주)를 시작으로 12월 하이트진로(맥주)와 농심(라면), 1월 동원F&B(참치통조림) 등이 차례로 제품 가격을 인상했다. 지난해 식료품·비주류음료(2.3%)와 음식·숙박(2.5%), 교육(1.6%), 의류·신발(1.8%) 가격이 오른 반면 저유가 영향을 받은 교통(-2.2%), 주택·수도·전기·연료(-0.8%) 가격이 떨어져 전체 물가상승률이 1%대에 머물렀다. 통계청은 정부 통계가 체감 물가를 반영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평균의 함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발표하는 소비자물가는 우리나라 가계소비지출 가운데 비중이 큰 것으로 평가된 460개 대표 품목의 가격 변동을 기준으로 산출하는데, 개별 가구는 이 품목의 일부만 소비하며 자신의 경험에 비춰 전체 물가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최근 이러한 소비자의 ‘판단’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건 신선식품값이라는 분석이 많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류독감(AI)의 영향으로 물량 조달이 원활하지 않은 달걀의 경우 전년 동기와 비교해 가격이 대형마트와 전통시장에서 각각 109%, 41%씩 치솟았다. 지난해 말 통계청이 내놓은 자료에서는 농산물 가격 폭등이 확인된다. 지난해 12월 양배추는 전년 동월에 비해 211.3% 값이 뛰었고 무는 150%, 배추는 91.9% 올랐다. 호박(21.7%), 양파(32.9%), 생강(41.2%) 가격이 각각 하락하긴 했지만, 전체 농축수산물 가격은 전년 동월 대비 6.7% 오른 것으로 집계됐다. 안 먹고 살 수 없는 채소 가격이 급등한 데 더해 맥주, 라면 등 가공식품 가격까지 들썩이자 소비자들은 ‘안 오르는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셈이다. aT가 설을 앞두고 28개 제수용품 가격을 조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차례상을 차리는 비용 역시 전통시장 기준으로 지난해보다 8% 상승할 전망이다. 이러니 ‘물가가 낮아 걱정’이라는 정부 말이 곱게 들릴 리 없다.

    전문가들은 통계 물가와 체감 물가의 차이를 만드는 또 다른 요소로 실질소득 감소를 꼽는다. 지난해 11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3분기 가계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7〜9월 가구당(2인 이상) 월평균 소득은 444만5000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0.7% 늘었다. 하지만 물가를 고려한 실질소득은 오히려 0.1% 감소했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실질소득은 2015년 삼사분기 증가율 0%를 기록한 뒤 사사분기 -0.2%, 지난해 일사분기 -0.2%, 이사분기 0.0% 등으로 답보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가 올라 대출이자가 증가하고 전·월세가 등 주거비와 사교육비 등이 상승하면 가계의 가처분소득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이에 대해 “시간이 흘러도 가계소득이 늘지 않으니 물가가 조금만 올라도 충격이 큰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치보다 중요한 건 서민의 삶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나라 경제를 위해 물가를 높게 조정하겠다’던 정부가 최근 돌연 가격 통제에 나서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업계 선두권 기업인 농심, 오비맥주, 동원F&B 등에 이어 2, 3위권 업체까지 가격 인상에 나설까 봐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가격 담합에 엄정 대응하겠다는 게 다 ‘꼼짝 마’라는 뜻 아니겠나”라며 “조류독감 관리, 농축수산물 유통구조 개선 등에 실패해 상황을 악화시킨 정부가 만만한 식품업계 쪽에 칼을 겨누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전문가 중에도 정부가 물가에 미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이가 적잖다. 당장 판매가 인상을 통제하는 데는 효과가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는 2010년 출간한 저서 ‘국가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에서 ‘1972년 물가정책국장 재임 시절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물가상승률을 3%에 맞추기 위해 실질적인 물가 안정보다는 물가지수 관리에 더 매달렸다’며 ‘과자 가격을 묶어두자 과자 함량 줄이기, 해당 과자의 생산량을 줄이고 이름을 새로 바꾼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값을 올리는 등 편법이 성행했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했다. 주정 원료인 타피오카 수입 가격이 올라 주정 가격을 조정했다. 하지만 소주 가격은 물가지수 가중치가 높아 조정 없이 종전 가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자 (업체들은) 소주 도수를 25도에서 20도로 낮춰 생산했다’고 기록했다. 부활할 조짐을 보이는 정부의 ‘라면값 관리’가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쏠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주원 실장은 “정부가 물가도 관리해야 하지만 가장 주력해야 할 일은 소비자가 물가 걱정 없이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며 “서민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 수 있어야 기업 매출이 늘고 경제가 성장하는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