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9

2016.12.28

김민경의 미식세계

아흔한 살, 서울의 이야기가 흐르는 곳

경양식의 시작 ‘서울역그릴’

  •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16-12-23 18: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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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는 요리나 음식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기 때문에 누구나 미식(美食)을 즐길 수 있다. 음식을 통해 여행, 사람, 역사, 음악, 미술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문화를 배우고 경험하기도 한다. 한 그릇의 요리가 만들어지기까지 그것을 둘러싼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기후 특성, 자연의 재료, 만드는 사람의 입맛과 손맛, 당시의 유행, 소스와 가니시, 그릇과 서비스, 테이블과 분위기 등이 촘촘하게 얽히고설켜 조화를 이뤄야 한다. 특정 시대를 일컫는 문화적 지표와 표본으로 음식이 선정되는 이유다. 미식의 조건 가운데 ‘넘사벽’이 있다면 바로 시간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이 최근 들어 노포에 열광하는 이유도 비슷한 것 같다. 오랜 시간을 버텨왔다는 것은 다른 이가 흉내 내기 어려운 맛과 운영의 노하우를 지녔다는 뜻이다.

    서울역 4층에 위치한 ‘서울역그릴’은 1925년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 경양식집이다. 오픈 당시에는 경성역사(옛 서울역사, 현 문화역서울284) 2층에 있었다. 3년의 공사 기간을 거쳐 완공된 르네상스 양식의 경성역은 동양에서는 일본 도쿄역 다음으로 규모가 큰 철도역이었다. 부산을 시작으로 경성을 거쳐 베이징, 시베리아, 유럽까지 철도를 잇겠다는 구상으로 설립된 역이다. 46년 광복 1주년을 맞으며 경성역은 서울역으로 이름을 바꿨으나 ‘서울역그릴’은 변함없이 운영됐다.

    주로 고위 관료가 드나들던 ‘서울역그릴’은 1970년대 들어서며 대중이 찾는 고급 식당이 된다. ‘서울역그릴’은 높은 천장과 아름다운 창, 은은한 조명이 반짝이는 샹들리에에 고급스러운 벽지와 우아한 커튼이 드리워진 곳이었다. 어떤 이는 엄마, 아빠 또는 노부모 손에 이끌려 생애 첫 ‘돈까스’를 맛봤을 테고, 또 어떤 이는 손발을 달달 떨며 ‘함박스테이크’를 겨우 잘라 먹던 못 잊을 데이트코스였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지금은 백발의 말쑥한 노인이 돼 ‘서울역그릴’을 찾는다. 1988년 민자 역사가 들어서며 ‘서울역그릴’은 63년 만에 새 건물로 자리를 옮긴다. 역사 4층에 위치해 서울역광장과 한강대로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서울역그릴’의 주방장은 이곳에서만 40년간 일했다. 그동안 이곳 주인은 철도청, 더 플라자, 어느 개인으로 넘어가며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주방장은 여전히 이곳에 있다. 게다가 서빙하는 ‘어른’들의 연배도 적잖아 보인다. 한자리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주방과 홀의 인력은 90여 년 동안 ‘서울역그릴’의 음식과 분위기를 지켜온 원동력이다.



    이곳의 음식과 세팅은 여전히 우아하고 고전적이다. 음식은 수프부터 커피까지 코스로 내어준다. 수프 그릇에 접시를 받치고, 샐러드도 각자 주며, 흰밥은 정갈하게 펼쳐 준다. 뾰족뾰족 거친 결이 살아 있는 바삭한 튀김옷, 데미글라스의 구수함이 살아 있는 소스, 아기자기하게 곁들인 더운 채소와 감자튀김이 참으로 정겨운 맛을 낸다. 기품 있는 장년의 서버, 결이 고운 백발 손님, 휴대전화로 사진 찍기 바쁜 젊은이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서로 나누지 못한 각자의 시간이 아흔한 살 ‘서울역그릴’의 품에서 공유되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든다.

    서울역그릴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405 4층,
    02-754-8001,
    오전 10시 30분~오후 11시, 연중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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