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3

2016.11.16

르포

보수가 촛불을 든 까닭 “이러려고 대통령 뽑았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 “한 표를 회수하고 싶다”…보수의 자책과 참회 시작됐다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16-11-11 16: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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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5일 토요일 밤 시민 20만 명(주최 측 추산, 경찰 추산 4만5000명)이 운집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이렇다 할 공통점이 없어 보였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 지팡이를 짚고 나온 어르신, 데이트 겸 집회에 나온 연인, 교복 입은 학생 등 다양한 세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처럼 한마음이 됐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과 그 비선(秘線)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씨에 대한 분노였다.  

    다양한 것은 세대와 계층만이 아니었다. 정치적 지향점이 다른 사람들도 대통령을 규탄하고자 기꺼이 촛불을 들었다. 야권 지지자뿐 아니라, 최씨와 대통령의 관계가 밝혀지기 전까지 일편단심 새누리당 지지자였던 사람도 배신감을 맛봤다. 급기야 2012년 대통령선거(대선)에서 박 대통령(당시 후보)을 ‘찍은’ 사람들까지 거리로 나왔다. 자신이 선택한 대통령이 국가를 책임진 게 아니라 비선 실세의 농단에 휘둘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지지자들의 실망은 분노로 바뀌었다.



    “아버지처럼 잘할 줄 알았는데…”

    이날 광화문광장 촛불집회는 시위라기보다 축제에 가까웠다. 집회 참가자들은 여기저기 있는 포장마차에서 산 군것질거리나 싸 온 음식을 먹으며 연단에 오른 사람의 발언을 경청했다. 일부 참가자가 대통령과 현 시국을 규탄하는 노래를 부르자 따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참가자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꼭두각시 대통령과 정치 상황을 비판했지만 그 나름 질서가 있었다. 대통령 하야나 탄핵,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가 나오면 모두 한목소리로 따라 외쳤다.

    이날만큼은 가게 문을 닫고 집회에 참가했다는 서울 종로구의 임신호(42) 씨는 “정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히 있기보다 직접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알려주고자 온 가족이 함께 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집회에 나오긴 했지만 무리에 합류하지 않고 주변에서 관망하는 이도 적잖았다. 이들은 ‘박근혜 하야’ ‘박근혜 퇴진’이라고 쓰인 유인물을 들고 홀로 도로변이나 인근 벤치에 앉아 집회 상황을 지켜봤다. 가끔씩 시위대의 구호를 따라 하고 일부는 행진에 동참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마치 기도하듯 조용히 현장을 바라봤다. 이들은 바로 2012년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지지한 사람이었다.

    집회 내내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 앉아 간간이 ‘박근혜 퇴진’ 구호를 따라 하던 이모(58) 씨도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찍었다. 그는 “허탈감에 집에만 있을 수 없어 집회 현장에 나왔다.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만큼 딸인 박 대통령도 어려운 국가 경제를 다시 일으킬 것이라 생각해 지지해왔다. 이번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까지도 경제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바쁘게 해외를 순방하며 열심히 국정수행을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 믿음을 (박 대통령이) 완전히 배신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수층을 배려하는 집회 분위기

    동화면세점 앞에 앉아 시위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영진(77) 씨도 “박 대통령을 지지한 것을 후회한다”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밝혔다. 이씨는 “팍팍한 현실에도 국민은 매일 국가 경제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데 대통령은 사이비 종교에 휘말려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나 같은 지지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기 수원시에서 온 김모(68) 씨는 “그동안 박 대통령은 국민과 야당이 협조해주지 않아 국정이 어렵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실상은 대통령이 국민과 야당의 이야기를 들을 의사가 아예 없었던 것”이라며 “내 한 표로 뭐가 달라질까 싶지만, 2012년으로 돌아가 박 대통령에게 던졌던 한 표를 회수하고 싶다”고 한탄했다.

    오후 5시 30분쯤 시작된 집회는 점점 참가자가 늘어나 거리 행진을 시작하기 직전인 저녁 7시 30분 무렵 절정을 맞았다. 광화문광장에서 시작된 인파는 서울시의회 앞 도로까지 가득 찼다. 자리를 옮기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참가자는 계속 늘어났다. 오후 8시쯤 서울광장 부근. 여기저기서 연단에 올라가 자유롭게 발언하거나 이를 듣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따로 모여 구호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50ℓ짜리 대형 쓰레기봉투를 들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워가며 집회에 동참하는 사람도 보였다. 쓰레기를 줍던 대학생 이지호(21·여) 씨는 “각자 다른 정당을 지지하고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번 사태로 상처받았을 것이다. 이번 집회는 정부 여당에 국민의 의사를 알리는 기능도 있지만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여기 오신 분들이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청소를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이씨가 쓰레기를 줍는 현장 근처에서는 나이든 사람이건 젊은 사람이건 웃으며 청소를 도왔다.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사람이나 과거 박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도 이날 집회에 무리 없이 섞인 이유는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서울시의회 앞 보도블록에 서서 집회 현장을 바라보던 서울 중구의 안모(68) 씨는 “20~30년 전에 비해 집회문화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과거에는 같은 목소리를 내야 집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면, 이번 집회는 대통령에게 배신감을 느끼거나 허탈감에 빠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 그 덕에 여전히 새누리당을 지지하지만 박 대통령은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도 집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지난 대선의 잘못된 선택에 책임감을 느낀다. 여기 모인 분들에게도 죄송스럽다. 그와 동시에 이렇게 속죄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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