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존레논, 신화가 된 비틀스 청년

12월8일 사망 25주기 … 뛰어난 음악 재능과 명성, 시간 흘러도 여전

  • 전원경/ 동아일보 출판팀 기자 winnie@donga.com

존레논, 신화가 된 비틀스 청년

존레논, 신화가 된 비틀스 청년

1968년 3월 존 레논이 기타 연주를 하고 있다.

1980년 12월8일, 가수 존 레논(John Lennon)은 아내 오노 요코와 뉴욕의 집을 나섰다. 잡지 사진 촬영을 위해 가는 길이었다. 스튜디오로 이동하는 길에 마크 채프먼이라는 남자가 존에게 사인을 요청해왔다. 존은 팬의 사인 요청에 친절하게 응했다.

같은 날 밤 10시쯤, 존은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내리는 존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미스터 레논!” 하고 불렀다. 존이 몸을 돌리는 순간, 다섯 발의 총탄이 연이어 발사되었다. “존이 총에 맞았어요!” 요코가 비명을 질렀다. 주위 사람들이 총을 쏜 남자를 붙들었다. 낮에 사인을 받았던 채프먼이었다.

인근 루스벨트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존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첫 발부터가 치명상이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채프먼은 “존에게 총을 쏘라는 텔레파시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전 ‘비틀스’ 멤버인 존 레논의 생은 이렇게 끝났다. 5년간의 공백을 딛고 새 앨범 ‘더블 팬터지’를 발표한 지 불과 20일 만이었다.

엇갈린 평가 그러나 최고 뮤지션



존 레논을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여러 가지의 상반된, 아니 모순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비틀스라는 세계 최고의 그룹을 결성해 150여 곡의 노래를 발표했으며, OBE(영국의 하급 귀족) 작위를 받은 첫 번째 대중음악인이었다. 소설을 쓰고 영화에 출연했으며, 전시회를 열고 반전운동에 헌신했던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존레논, 신화가 된 비틀스 청년

비틀스 시절의 존 레논(뒷줄 오른쪽).

그러나 그는 동시에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두 번째 아내 오노 요코와 결혼하기 위해 첫 아내 신시아를 간통죄로 고소하는가 하면, 죽을 때까지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슈베르트 이래 가장 위대한 작곡가’(선데이 타임스)에서 ‘형편없는 수다쟁이’(폴 매카트니)까지 극과 극을 달린다.

하지만 이 모든 모순을 극복해내고야 마는 하나의 절대적인 명제가 있다. 존은 비틀스를 창조하고 비틀스를 이끈 장본인이었다. 대부분의 비틀스 곡들은 그와 폴 매카트니의 공동 창작으로 탄생했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조차 비틀스 음반에 대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존레논, 신화가 된 비틀스 청년

미국 뉴욕 72번가에서 수천명의 팬이 존 레논을 추모하고 있다.

비틀스의 네 멤버인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는 모두 영국 리버풀의 노동계급 출신이다. 존은 네 명 중 가장 악동이었다. 선원인 아버지 알프레드 레논은 존이 태어나자마자 이혼했으며, 생모인 줄리아는 재혼하면서 존을 친척에게 맡겨버렸다. 존은 엄격한 이모 밑에서 냉소적이고 폭력적인 문제아로 자라났다. 싸움이 끊일 날이 없던 열일곱 살의 존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고 기타를 사서 독학한다. 그리고 자신이 다니던 학교의 이름을 딴 ‘쿼리맨’ 밴드를 조직했다. 이 밴드가 훗날 ‘비틀스’의 모태가 된다. 두 살 어린 동네 친구 폴 매카트니도 이 밴드의 멤버였다.

리버풀의 무명 밴드 비틀스의 운명은 노스엔드 음악사 사장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나면서 극적으로 바뀐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엡스타인은 비틀스의 클럽 공연을 보고 이들의 가능성을 즉각 알아차렸다. 이들에게는 젊은 피를 끓게 만드는 자유분방함, 위트 그리고 신선한 열정이 숨어 있었다.

엡스타인은 지저분한 비틀스 멤버들에게 말끔한 양복을 입히고 첫 싱글 ‘Love Me Do’를 제작했다. 그로부터 불과 1년 만인 1963년부터 ‘비틀스 현상’이 시작되었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비틀스 공연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영국의 5대 신문이 동시에 ‘비틀스 성공기’를 연재했다. 영국과 미국, 세계로 이어진 비틀스 투어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우리는 비틀스를 사랑해요”라는 구호를 외쳐댔다. 전 세계가 비틀스 현상으로 들끓었다.

자신 찾던 중 狂팬 총격에 목숨 잃어

그러나 이 영광의 절정에서 존을 비롯한 비틀스 멤버들은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1967년, 이들은 투어를 중단하고 각자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즈음, 존의 삶에 비틀스 결성 이상으로 중대한 폭탄이 떨어졌다. 바로 운명의 여자 오노 요코를 만난 것이다.

요코는 미술과 음악에서 전방위로 활동하는 무명의 아티스트였다. 존보다 일곱 살 연상인 요코는 지금까지 존이 만난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요코는 결코 비틀스와 존의 명성에 위축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이 비틀스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비틀스에게, 그리고 아내 신시아에게도 이미 애정을 잃고 있었던 존은 요코에게 송두리째 빠져들었다. 당시 존은 자신의 프로필을 이렇게 쓸 정도였다. ‘1940년 10월9일 출생, 1966년 요코를 만남.’ 반면 다른 비틀스 멤버들은 항상 녹음실까지 동행하는 요코를 몹시 싫어했다. 이들의 열세 번째 앨범인 ‘Let It Be’의 녹음은 실로 살벌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이 앨범이 발표되기도 전인 1969년 존은 요코와 결혼하고 비틀스 탈퇴를 선언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존은 항상 자유인이기를 원했다. 그가 비틀스 투어를 중단했던 것도 비틀스가 자신을 구속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존이 자신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여자에게 스스로 구속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존은 자신도 모르게 잃어버린 모성을 찾고 있었다. 실제로 존은 요코를 가끔 ‘엄마’라고 불렀다.

요코와 결혼하면서 존의 음악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음악은 ‘혁명을 원한다고 말하라/ 지금 즉시 나서자/ 민중에게 권력을’ 같은 직접적인 메시지를 외치기 시작했다. 반전운동에 나선 존은 한때 미국 CIA의 감시를 받기도 했다.

1975년, 마흔두 살인 요코가 아들 숀을 낳았다. 존은 매우 기뻐하며 전업주부를 자처했다. 이때부터 5년간 존은 어떤 음악인도 만나지 않고 완전한 칩거에 들어갔다. 1980년 11월, 존은 자신을 성찰하는 곡들을 담은 앨범 ‘더블 팬터지’를 발표했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되어 광적인 팬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존은 ‘더블 팬터지’ 발표 이후 ‘내게 뮤즈가 찾아왔다’며 새로 순회공연을 시작하고 뮤지컬을 작곡하겠다는 의욕을 내비쳤다. 그러나 그에게 더 이상의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모든 혼돈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신은 그의 생명을 거두어갔다.



주간동아 2005.12.13 514호 (p46~47)

전원경/ 동아일보 출판팀 기자 winnie@donga.com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218

제 1218호

2019.12.13

“긴 터널 빠져나오자 우울의 고장”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