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6

2005.05.24

혐오의 상징 민달팽이와 코딱지

  • 장석만/ 옥랑문화연구소장

    입력2005-05-20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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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지가 반듯한 행실의 모범생이고, 캘빈이 예측불허의 말썽꾸러기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질서의 화신인 수지와 혼돈 자체인 캘빈은 서로 너무 다르다. 사실 다르다는 것을 흠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서로를 비춰줄 수 있는 거울 같은 타자(他者)의 구실을 할 수도 있다. 서로 동등한 힘의 관계라면 이런 일이 더 잘 일어난다. 하지만 아무래도 세상 사람들은 혼란보다는 잘 정돈된 것을 더 좋아한다. 사람들이 수지를 편애하기 때문에 보통 수지와 캘빈 사이의 역학관계는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캘빈은 늘 구박받는 처지다. 물론 그렇다고 풀죽어 지낼 캘빈이 아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힘의 균형 회복을 위해 반격을 한다.

    수지의 속을 뒤집어놓을 기회는 바로 점심시간이다. 그때는 질서에 집착하는 수지의 약점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몸 밖의 에너지원을 몸 안으로 집어넣는 일이다. 자신의 몸과 상관없던 것을 흡수하여 몸으로 만든다. 음식을 먹는 일은 호흡과 더불어 몸을 지탱하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는 것은 어떤 내가 되느냐와 관계있다. 내가 먹는 것과 안 먹는 것,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선별하는 것은 나를 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음식을 선별하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미 그 기준을 통과한 음식에 대해서는 안전하고 쾌적한 느낌이 드는 반면, 새로운 음식에는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대처한다. 특히 수지처럼 깔끔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익숙한 음식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꿈틀거리는 것’과 ‘끈적거리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것이 음식과 연관될 때는 혐오도가 더욱 높아진다. 취약기인 점심시간에 캘빈은 수지에게 이 두 가지 혐오스런 것을 떠올리게 만들어 수지를 못 견디게 한다. 그런데 이런 캘빈의 수작에 이미 여러 번 상처를 입은 수지가 이번에는 아예 캘빈의 말문을 닫아놓으려고 애쓴다. 수지는 점심시간에 캘빈이 옆에 앉지 못하게 함으로써 음식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캘빈은 벌써 다른 수법을 마련해놓고 있다. 그것은 수지의 똑똑함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바로 수수께끼를 내서 수지의 호기심을 끄는 수법이다. 문제풀기를 좋아하는 수지는 금방 캘빈의 새로운 수수께끼 작전에 걸려든다.

    호기심을 못 이긴 수지에게 캘빈은 가장 혐오스런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한다. 그 질문에 담긴 이미지를 상상하는 순간, 수지의 속은 완전히 뒤집어져서 자리를 보전할 수 없게 된다. 그 질문은 바로 ‘꿈틀거리는 것’과 ‘끈적거리는 것’을 환기시킬 뿐만 아니라, 몸의 분비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끈적거리고 꿈틀대는 민달팽이와 코딱지의 결합은 그 세 가지를 조합한 것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보통 우리 몸의 분비물에 대해 심상치 않은 자세를 취한다. 침, 땀, 콧물, 눈물, 고름, 피 등은 여러 가지의 느낌을 주지만 공통된 점은 언제나 강력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피는 위험성과 생명의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침, 땀, 콧물, 고름의 이미지는 경계를 벗어나서 더러움과 연결되고, 눈물은 정화(淨化)의 이미지와 함께 나약함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코딱지는 위험성을 띠는 고름과 달리 더러움만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코딱지를 살아 있다고 하면 끈적거리고 꿈틀대는 이미지까지 얻게 된다.



    캘빈은 이 혐오 삼중창을 불러대며 가엾은 수지의 혼을 빼놓는다. 아, 불쌍한 수지! 그러나 수지는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 단련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수지는 결코 결벽증에 사로잡혀 고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젊어서의 고생은 사서 한다지 않는가.

    혐오의 상징 민달팽이와 코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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