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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폭풍전야 대한민국 법조계

엘리트 판·검사들 법복 벗고 대기업 선택

경제적 보상과 법무팀 강화 이해 맞물려 … 법률 수요 대비 차원 불구 우려 목소리도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엘리트 판·검사들 법복 벗고 대기업 선택

엘리트 판·검사들 법복 벗고 대기업 선택

삼성(왼쪽), SK

수사 기밀이나 방법 유출이 특히 문제다. 선배인 전직 검사가 기업의 비리를 수사하는 현직 검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막강한 인맥으로 정보를 획득하는 일을 할 가능성이 짙다.”(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박근용)

“집단소송제를 비롯해 특허분쟁, 통상마찰 등 법률 리스크가 과거보다 현저히 커진 데다 기업의 법률 수요가 급증했다. 법무 조직을 키우는 것은 글로벌 기업에 걸맞은 법무 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A그룹 관계자)

판·검사 출신의 주류 법조인들이 하나둘씩 대기업 품에 안기고 있다. 내로라하는 기업치고 굵직한 이력을 가진 CLO(Chief Legal Officer·최고법률책임자)를 두지 않은 곳이 없다. 법무팀 강화에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법률 리스크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엘리트 법조인들의 기업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다.

2003년 재계를 들쑤신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오너 회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이 검찰과 법원을 들락거린 것도 ‘엘리트 법조인’에 대한 재계의 갈증을 부추겼다. 재계의 한 인사는 “법무팀 강화는 주주나 경영진에 대한 소송, 수사에 대한 방어 목적과 순수하게 ‘기업 법무’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이 섞여 있다”고 했다.

‘기업 법무’란 사내 법률가가 직접 기업 활동에 참여해 법적인 문제의 발생을 방지하고, 국내외적 법률 환경에 맞는 경영전략을 세우는 것을 돕는 일련의 활동을 말한다. 글로벌 기업의 ‘기업 법무’ 역량 강화는 보편적이어서 씨티그룹은 1500명, 제너럴일렉트릭(GE)은 1000명이 넘는 ‘변호사 군단’을 거느리고 있다.



“법률 리스크 급증 … 법무 역량 확보 발등의 불”

선진 각국의 기업들이 ‘기업 법무’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법률가이면서 한국 사회의 대표적 엘리트 집단인 법원 검찰 출신 인사들이 기업에 자리잡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기업을 선택한 엘리트 판·검사들을 보는 선후배 법조인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안타깝다’와 ‘부럽다’, ‘나쁘게 볼 것 없다’와 ‘바람직하지 않다’는 평가가 혼재하는 것.

엘리트 판·검사들 법복 벗고 대기업 선택

이종왕 삼성법무실장, 서우정 삼성 부사장급, 김준호 SK 윤리경영실장, 강선희 SK 상무(왼쪽부터)

서울중앙지법 A부장판사는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최근 사표를 냈다. A부장판사는 그동안 주요 사건들을 말끔하게 처리해 능력을 인정받아왔다. A부장판사의 스카우트 소식을 접한 소장 판사들은 “선배들이 이게 뭐냐”며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낸 반면, A부장판사와 처지가 비슷한 부장판사급들은 “부럽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A부장판사의 선배들은 대체로 “법원이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한 탓이다.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게 동료 판사들의 전언이다.

법조계 안팎에선 기업을 선택하는 판·검사들이 느는 현상을 경제적인 보상과 관련짓는 이들이 적지 않다. 판사 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의 괴리로 판사들의 기업행이 더욱 늘어날 것 같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검사는 “A그룹 법무실로 옮긴 한 검사의 경우 A그룹에서 10년 임기를 보장하고 10년 근무 뒤 통장에 30억원 정도가 쌓일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건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10년 안팎 경력 상무급 자리 마련

기업들은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새내기 변호사의 경우엔 연봉 5000만원가량의 과장급 대우를 한다(최근 들어 대리급 대우를 하는 경우도 있다). 10년 안팎의 경력을 가진 판·검사 출신은 대개 상무급의 자리를 준다. 지난해 대기업으로 옮긴 검사 출신 변호사의 경우엔 스카우트비만 20억원은 될 것이라고 법조계 안팎에서 추측하고 있다. 연봉이 10억~20억원에 이르는 기업 변호사도 있다는 게 법조계 인사들의 얘기다.

한국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판·검사 출신 엘리트 법조인을 영입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다만 삼성은 오래전부터 탄탄한 법조라인을 운영해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삼성 법무실은 인형무 변호사가 1980년 법률고문으로 채용되면서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건희 회장의 서울사대부고 동기인 인 변호사는 그룹 내에서 상당한 파워를 행사했다고 한다.

현재 삼성의 법무실은 일부 지방 지검의 규모와 맞먹는 수준이다. 삼성의 CLO는 이종왕 법무실장(사장급)으로, 지난해 7월 삼성에 둥지를 튼 이 실장은 법무부 검찰1과장과 대검 수사기획관 등을 지낸 엘리트 검사 출신. 검찰을 떠난 뒤엔 대형 로펌인 김&장에서 주요 그룹의 불법 대선자금 사건 등을 변호했다. 또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때는 해외체류 중 귀국해 대통령변호인단에서 일하기도 했다.

재계에선 이 실장 영입을 두고 이 실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사법시험 동기라는 점을 들어 삼성그룹의 3세 승계 문제와 연결짓는 시각도 있다. 삼성 측은 이러한 시각을 “법률 역량을 강화해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 환경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일축한다. 법조계에서도 삼성의 설명이 더 설득력 있다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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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4일 검찰에 공개 소환된 이학수 삼성 부회장.

검찰 안팎에선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삼성 법무실의 한계가 이 실장 영입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이 실장을 잘 아는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김용철 전임 법무실장이 대선자금 수사 당시 ‘판단’을 잘못해 스스로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법무실 변호사들이 현 정권과 가까운 데다 화려한 검찰 경력을 갖고 있는 이 실장을 영입해야 한다고 뜻을 모음으로써 이 실장을 영입하게 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삼성그룹엔 현재 국내 변호사 50여명, 외국 변호사 60여명 등 110여명의 변호사가 활동하고 있다. 판·검사 출신 변호사들은 기업 지배구조를 비롯한 경영 전반과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고, 과장급 변호사는 특허 통상·노무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도 글로벌 기업 수준으로 변호사를 늘리겠다는 게 회사의 방침. 현재 국내 최대의 로펌인 김&장의 변호사는 270여명이고, 태평양과 세종은 각각 150여명, 120여명이다. 삼성그룹이 이들 로펌보다 더 많은 변호사를 보유하는 건 시간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엔 특히 검찰 특수부 출신 변호사들이 대거 똬리를 틀고 있다. 구조조정본부 소속인 서우정 김수목 엄대현 유승엽 이기옥 변호사는 모두 특수통. 지난해 특수부 출신 평검사 1명과 함께 영입된 서 변호사는 서울지검 특수1부장을 지냈다. 광주지검 부부장검사를 지낸 김 변호사는 2002년 이용호 게이트 수사팀에서 일했고,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 등을 수사한 엄 변호사는 서울지검 특수1부 출신이다. 유 변호사는 서울중앙지검 출신이고, 이 변호사는 수원지검 특수부에서 일했다.

검찰에서도 엘리트로 통하는 특수부 출신 검사들의 기업행엔 비판적인 시각이 상대적으로 크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기업을 수사하던 검사가 기업에 갈 경우 비리를 방어하는 기법을 전수하거나 수사 기법 및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검찰 동향이나 수사 정보를 파악하는 데 특수부 출신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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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2003년 2월20일 SK의 서류를 압수하고 있다

최고법률책임자 출신 최고경영자 등극도 느는 추세

삼성과 더불어 주류 법조인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선 기업으로는 SK가 꼽힌다. SK그룹은 SK글로벌 사태와 불법 대선자금 수사 이후 법무팀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CLO는 지난해 영입한 김준호 윤리경영실장(부사장). 김 실장은 검찰에서 대검 컴퓨터수사과장, 중수3과장, 부산지검 형사2부장 등을 지냈다. SK그룹은 김 실장 영입과 더불어 윤리경영실과 법무지원팀을 신설하면서 비로소 어느 정도 역량을 갖춘 법무팀을 갖게 됐다는 평가를 듣는다.

SK그룹엔 김 부사장 외에 검사 출신인 김윤욱 변호사, 판사 출신으로 대통령법무비서관실 행정관을 지낸 강선희 변호사 등이 일하고 있다. SK그룹은 또 사법연수원 34기를 수료한 신임 변호사 3명을 채용해 SK㈜와 SK텔레콤에 각각 발령했으며,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의 부장판사를 조만간 스카우트할 예정이다.

엘리트 판·검사들 법복 벗고 대기업 선택

2003년 2월22일 구속되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

SK가 법무팀 강화에 나선 이유는 SK글로벌 사태와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겪으면서 사법시험 출신 변호사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SK 법무팀은 최태원, 손길승 회장이 번갈아 수감되는 상황에서도 검찰 분위기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다. 법무팀이 검찰 출신 변호사가 단 1명도 없이 미국 변호사 3명으로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SK그룹은 법무팀 보강으로 기업 경영의 투명성과 윤리성 강화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삼성·SK그룹뿐 아니라 LG·현대·한화·롯데·두산그룹 등도 모두 주류 법조인들을 영입하면서 법무팀을 강화하는 추세다. 대기업 품에 안기는 주류 법조인들이 앞으로도 늘 수밖에 없는 것. CLO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건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소송 천국인 미국엔 세계 최대 석면 제조업체인 맨빌처럼 법률적 대응을 잘못해 파산한 기업도 적지 않다. 미국의 대기업들이 수백~수천명의 변호사를 채용하고 있는 까닭도 이런 연유에서다. CLO의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CLO 출신 CEO(최고경영자)도 느는 추세다.

기업의 글로벌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한국 사회의 대표적 엘리트인 판·검사들이 굴지의 기업들에 둥지를 트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경영의 투명성과 적법성을 확보하고 글로벌 시대를 선도하며 소비자의 까다로워진 니즈(Needs)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도 확대된 법률 수요에 부응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에도 주류 법조인들의 기업행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건 검찰과 법원이 아직도 전관예우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주간동아 2005.02.22 473호 (p22~24)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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