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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ㅣ황장엽 망명 비화

수도 없이 넘나든 死線 “나는 영원한 KLO맨

”이연길 회장, 6·25전쟁 특수공작의 산증인 … 적진 침투해 정보 수집·납치 등 종횡무진 활약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수도 없이 넘나든 死線 “나는 영원한 KLO맨

수도 없이 넘나든 死線 “나는 영원한 KLO맨

1951년 12월 초도에서 기념촬영한 해상고트 대원. 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연길 회장이다.

황장엽 비서의 망명을 성공시킨 이연길 회장은 죽음의 문턱에서 평생을 살아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람이다. 젊은 시절 그는 KLO 대장으로 숱한 위험을 넘나들었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비밀’로 남아 있는 KLO의 진실을 들춰내준다.

1927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원산의 용동소학교와 원산농업학교를 마치고 함남 홍원군 호현소학교 촉탁교사를 거쳐 수산업조합에서 일하다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광복 직후 원산에 상륙한 소련군은 ‘해방군’일 것이라는 한국인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일본 여성을 강간하는가 하면, 길거리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행패를 부리는 등 ‘점령군’ 행세를 했다.

16세 때 반일 청년 조직 가담 … 48년부터 대북 공작

이를 보다못한 원산의 반일 청년 조직 일심회(一心會) 단원들이 투쟁 대상을 일제에서 소련군으로 바꿨다. 이 회장은 16세 때(1943년) 두 살 많은 친형 이연복(李淵福)씨와 함께 일심회에 가담했다. 이후 이 회장 형제를 비롯한 일심회 단원들은 서울로 와 동북동지회를 만들어 반공 투쟁을 계속했다. 이 회장은 한편으로 학업에도 뜻을 두어 47년 9월 성균관대에 입학했고,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대동청년단에도 참여했다.

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출범 직후 국방부 제4국이 만들어졌다. 제4국은 북한으로 공작원을 침투시켜 첩보를 수집하거나 유격투쟁을 벌이는 침투공작과 남쪽으로 침투한 간첩을 체포하는 방첩 등을 수행하는 ‘특무(特務·지금의 정보사와 기무사가 하는 일을 합쳐놓은 기능)’ 기능을 맡았다. 일제와 소련군 치하에서 지하투쟁 경험이 있는 이 회장 동지들은 4국의 공작원으로 참여해 소정의 훈련을 마친 후 49년 3월, 미국의 압력으로 4국이 해체될 때까지 원산으로 침투해 철도국 직원을 포섭하는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6·25 전쟁(1950) 중에는 피난민들에게서, 진격해오는 북한군 정보를 빼내 USIS(주한 미대사관 홍보처)에 전달하는 일도 했다.



KLO는 우리말로 ‘주한연락처’로 불렸다. 49년 6월29일 한반도를 관할하는 미 극동군은 소련과의 합의에 따라 몇몇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모든 주한미군을 일본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한국과 군사 업무 협조를 위해 주한미대사관이 있는 서울 반도호텔 202호와 203호에 KLO를 남겨놓았다. KLO는 극소수의 미 군사고 문단을 통제하는 주한미군 사령부 구실과 함께 북한에서 발생하는 첩보를 수집하는 일도 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반전되자 유엔군사령부를 통제하는 미 극동군사령부는 대북첩보 수집을 강화했는데, 그로 인해 KLO 산하에 선·위스키·배저·파인애플·이글 등 갖가지 닉네임을 붙인 한국인 공작조직이 급조됐다. 미군은 이러한 공작조직의 대장을 ‘치프 에이전트(Chief Agent, 수석 공작원)’라고 불렀다. KLO는 치프 에이전트하고만 거래를 했다. 치프 에이전트가 유능하면 많은 공작을 하게 되고, 그에 따라 KLO는 더욱 많은 공작비와 보급품을 전달해주므로 이 조직은 금세 세력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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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의 해상고트 대원.맨 오른쪽이 이연길 회장.

유엔군이 북진을 거듭할 무렵 이연복씨는 서울로 올라와 배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신의주 앞바다에 있는 섬까지 돌아본 뒤 KLO 측에 서해 도서를 무대로 첩보를 수집하겠다고 제의했다. KLO가 이를 승인하자 그는 ‘코익(COIC)’이라는 켈로부대를 만들어 서해상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동북동지회 멤버인 최규봉씨도 KLO와 접촉해 육상 침투를 주로 하는 ‘고트(Goat) 부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1·4후퇴 무렵 이연복씨는 부산으로 후퇴하며 코익을 해체하고 새로 ‘해상고트’라는 이름의 새로운 켈로 부대를 만들어, 51년 1월22일 이연길씨 등 17명의 대원과 함께 부산항에서 ‘지양호(地洋號)’라는 공작선을 타고 며칠 후 백령도로 들어갔다.

1950년 말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을 내주자(1·4후퇴), 미 극동군은 평시 조직 개념인 KLO를 FEC/LD(Far East Command Liaison Detachment in Korea,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파견대, 본부는 대구)라는 전시 조직으로 확대하며 이 부대에 8240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그 후 8250으로 변경). 그러나 많은 한국인은 이미 친숙해진 켈로 부대로 불렀다. 이때부터 8240부대는 대북 첩보부대 외에 유격전을 펼치는 한국인 유격부대도 운영하였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황은 51년 중반 지금의 휴전선 부근을 중심으로 고착되기 시작했다. 양쪽이 참호를 깊이 파 진지전에 들어가자, 육상을 통한 침투는 어려워졌다. 그로 인해 해상 침투가 각광을 받았는데, 특히 서해는 평양 등 북한의 주요 도시로 바로 침투할 수 있는 데다 북한 지역에서 추락한 미군 조종사를 쉽게 빼낼 수 있는 이점이 있어 미군은 해상고트부대의 활동에 큰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미군은 해상고트 부대를 위해 ‘스타키’라는 이름의 육군 대위를 고문관을 붙여주었다.

작전 중 수많은 전우 잃고 친형마저 52년 전사

100여명으로 세력을 키운 해상 고트부대는 백령도에 있던 본부를 북쪽에 있는 초도(황해도 송화군)로 옮기고 신의주 앞바다에 있는 수운도 대화도 등 10여개 섬에 별동대를 배치했다. 그런데 해상 고트부대는 미군을 위한 첩보 수집과 함께 한국 육군 대위 출신인 김종벽(金宗碧, 2003년 사망)씨 지휘 아래 적진에서 싸우고 있는 구월산 유격대를 지원하는 일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러자 8240부대 측은 왜 고유의 임무를 하지 않느냐며 이연복씨를 대장에서 해임하고 이연길씨를 후임 대장에 임명했다(51년 7월). 이 무렵 미 극동군 산하의 미 5공군은 북한에서 격추된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해 별도로 대북 침투조직을 만들어 예비역 육군 대위 출신인 도널드 니콜라스에게 맡겼다. 니콜라스는 서울 안국동에 6006부대라는 대북 침투 공작부대를 만들었는데, 이연복씨는 여기에 참여했다.

25세의 나이에 고트 부대장이 된 이연길씨는 대담한 작전을 감행,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북한으로 물품을 나르던 중국 상선 4척을 나포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고, 북한 공군 조종사인 문덕삼 소위를 생포해 미 공군에 넘겨주기도 했다.

성공 뒤에는 가슴 아픈 희생도 적지 않았다. 웅도에 나가 있던 별동대 전원이 적의 기습을 받아 전멸했는가 하면 적진으로 침투한 후 소식이 끊어진 대원도 적지 않았다. 이 시기 6006부대에 몸담고 있던 형 이연복씨도 압록강 하류의 수운도 근해로 침투했다가 중국군 함정에 발각돼 기총소사를 받고 전사했다(52년 6월). 해상 고트부대의 활약이 커지자 8240부대는 최규봉씨가 이끌던 고트 부대를 리바이벌 부대로 개칭하게 해, 해상 고트부대와 구별할 수 있게 했다(52년 9월).

53년 7월 전쟁이 끝나자 미 극동군은 고트 부대에 철수를 명령했다. 그리하여 고트대는 초도 수운도 등 서해상의 수많은 섬을 포기하고 백령도로 내려왔다. 그 얼마 뒤 미 극동군은 KLO부대 해산을 결정해 그는 대원들과 함께 눈물을 머금고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나는 50여년 전 이북으로 침투시킨 우리 대원이 혹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북한을 기웃거리고 있다. 나는 죄책감 때문에 내 목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북한 사람을 구하고 또 구할 것이다. 나는 영원한 KLO 맨이다”라고 말했다.





주간동아 468호 (p24~25)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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