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9

2003.11.13

뜬다! 토종 와인 재미있는 맛

충북 영동 ‘샤토마니’ 숙성의 계절 … 年 70만병 생산 와인 애호가 공략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3-11-06 1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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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뜬다! 토종 와인 재미있는 맛

    흔히 ‘카브(cave)’라 부르는 ‘샤토마니’의 숙성 창고.

    대기가 차가워지고 그보다 큰 폭으로 체감온도가 급강하하면서 점점 더 바빠지고 활기를 띠는 이들이 있다. 와인을 만들고, 와인을 팔고,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다. 11월 셋째주 수요일밤 자정을 기해 개봉되는 햇 와인 ‘보졸레 누보’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흥분해 있고, 자존심 강한 자칭 ‘와인 마니아’들은 ‘남들 다 마시는’ 누보를 대신할 와인을 수소문하느라 분주하다. 올해 보졸레 누보 출시를 앞두고 청담동과 홍익대 앞의 와인바들은 완전히 양분됐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어느 쪽이든 그날만은 최고의 와인을 확보하겠다는 전의를 다지고 있다. 여름이 맥주의 계절이라면, 확실히 가을은 와인의 시간이다.

    보졸레 누보를 둘러싼 세상의 소란과 상관없이 전 세계의 와이너리(winery · 와인이 만들어지는 포도원 또는 양조장)에서는 올해 수확한 포도들이 조용히 발효되고 숙성되는 중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시판용 포도주를 만들어내는 충북 영동의 작고 아름다운 와이너리도 그중 하나다.

    영동에서 황간 방향으로 국도를 따라 달리다 보면 ‘샤토마니’(Chateau Mani)라는 입간판과 커다란 와인병이 세워진 학교 교문을 볼 수 있다. 폐교를 와이너리로 이용하고 있는 ‘영농법인 와인코리아’가 이곳에 있다.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칠 듯한 어린이 동상이 서 있는 운동장에 포도주 향이 짙게 깔려 있고, 선반을 대신한 풍금 위에 와인잔들이 놓여 있는가 하면, 교무실 칠판에 와인라벨이 붙어 있어 꽤 묘한 인상을 준다.

    백지에서 만들어낸 ‘기적의 술’

    뜬다! 토종 와인 재미있는 맛

    ‘샤토마니’를 소개하는 와인코리아 윤병태 대표이사.

    “ 포도 농사를 짓던 농민 11명이 ‘포도 막걸리’를 만들다 여기까지 왔지요. 포도농장이 마니산에 있어 ‘샤토마니’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1년에 70만병 이상의 와인을 생산합니다. 내년부터는 ‘샤토마니 누보’도 만들 계획입니다.”



    와인코리아는 영동 군내 포도 재배 농민 170명을 조합원으로 한 법인체로 윤병태 대표이사(46) 역시 포도농사를 짓는다. 수확하면 바로 상해버리는 포도의 특성 때문에 냉가슴을 앓던 농민들이 ‘출하를 조절해보자’며 ‘포도 막걸리’를 만들던 중 마침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와인 열풍을 보고 느낀 바 있어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견학을 떠난 데서 ‘샤토마니’의 역사는 시작된다.

    그러나 1998년 본격적인 생산체제가 갖춰지기 전 4년 동안은 참담한 시행착오의 기간이었다. 프랑스에서 오크통을 보고 온 농민들은 옹기 500개를 사서 그 안에 포도를 넣고 발로 밟아 술을 만들었다. 김장김치 담그듯 돌멩이를 눌러둔 포도들은 한순간 술인가 싶더니 바로 먹지 못할 식초가 되었다. 그들 중 아무도 와인은 공기와 닿는 순간부터 산화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소믈리에(Sommelier·와인을 판매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관리하고 서빙하는 전문 웨이터)들의 화려한 수사도 농민들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서울에 다녀온 조합원이 특급호텔의 이름난 소믈리에가 와인을 먹고 장미향이 난다고 그랬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엔 장미꽃을 사 항아리 하나 가득 꽃잎을 따 두었다 술과 섞었죠. 하는 김에 국화향은 어떠냐 해서 다른 항아리엔 가득 국화꽃을 따 넣고. 물론 다 실패했죠. 이런저런 실패를 다 맛보고서 술을 정직하게 만들자는 원칙에서 다시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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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교를 개조해 만든 ‘샤토마니’의 와이너리. 이곳에서 연 70만병의 레드와 화이트 와인이 생산된다.

    그후 윤대표가 말 그대로 대표가 되어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 세계의 와이너리로 ‘유학’을 떠났다. 말이 유학이지, 일용직 노동자로 ‘위장 취업’한 것이었다. 일손이 부족한 포도 수확철, 와이너리는 그가 말을 하든 못하든, 불법체류자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았다고 한다. 포도찌꺼기를 삽으로 파내던 어깨 너머로 전 세계의 와인 제조술을 배워 돌아온 그는 와인의 발효와 숙성을 위한 탱크를 직접 설계했고 98년엔 처음으로 수공업이 아닌 공장 방식으로 ‘샤토마니’를 만들었다. 또한 ‘샤토마니’가 계기가 되어 스테인리스와 법랑에서만 숙성시킬 수 있었던 술을 나무통, 즉 오크통에서도 숙성시킬 수 있게 주세법도 바뀌었다.

    와이너리도 재미있지만 이곳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지하토굴도 와인 애호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샤토마니’가 보관, 숙성 중인 지하토굴은 원래 일제시대 때 탄약을 보관하기 위해 사람들을 강제 동원해 판 것이다. 이 일대에 90개 가량이 있는데 큰 것은 길이가 200m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 4개가 개발돼 오크 와인의 숙성창고로 쓰이고 있는데 사시사철 상온 12℃를 유지한다고. 숙성창고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전쟁의 상흔이자 농민의 수난을 상징하던 지하토굴에서 이곳 포도 재배 농민의 희망이 조용히 세상과 만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지하토굴의 입구에 이르는 길은 새로 생긴 듯 깨끗한 편도 1차선 도로다. 경운기에 짚을 깔고 터덜터덜 산길을 지나 토굴에 다녀온 지사가 이곳이 관광지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도로를 확장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와이너리와 지하토굴, 포도농원을 묶어 이 일대를 테마파크로 조성한다는 계획도 수립해 추진 중이라고 한다.

    캠벨얼리, 마스캇, 샤도네이,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를 블렌딩해 이곳에서 숙성시킨 ‘샤토마니’는 굳이 비교한다면 칠레 와인 쪽에 가까운데 옅은 색과 소박한 탄닌의 맛이 다소 가볍게 느껴진다. 그래서 첫 맛은 매우 낯설지만 어떤 음식과도 쉽게 어울리는 특징이 있다. 와인평론가 최성순씨는 ‘샤토마니’가 “매우 재미있는 맛이지만 세금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라고 평한다.

    “우리 식대로 시작한 와인 제조지만, 이제는 소비자들의 오감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 자신도 생겼고요. 보졸레 누보를 만든 프랑스인들의 마케팅 전략도 비난하기보다는 배우려고 합니다.”(윤병태 대표이사)

    오래된 초등학교 교정에서 와인향에 취해보고 싶다면, 수십일 동안 배에 실려온 와인이 아니라 와이너리에서 직접 만든 신선한 와인을 맛보고 싶다면, 무엇보다 진정한 와인 마니아가 되고 싶다면, 와이너리는 최고의 가을 여행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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