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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축복, 가족 위한 세레나데”

지휘자 정명훈 ‘요리는 지휘처럼…’ 출간 … 가족 사랑과 삶 식탁에서도 마에스트로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요리는 축복, 가족 위한 세레나데”

“요리는 축복, 가족 위한 세레나데”

이 시대의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그의 책 ‘요리는 지휘처럼-Dinner for 8’에서 자신의 인생과 음악, 가족 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거장에게는 그만의 향기가 있다.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와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이 시대의 마에스트로 정명훈. 그에게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그가 자신을 둘러싼 명예와 영광의 무거운 외피를 벗고 진솔한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동아일보사가 펴낸 새 책 ‘요리는 지휘처럼-Dinner for 8(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들, 그들의 미래 반려자들과 함께)’를 통해서다.

그의 손을 통해 탄생한 60여 가지의 요리와 이에 어울리는 명곡 57곡이 담겨 있는 이 책에서 정명훈은 자신의 인생과 음악, 가족 사랑에 얽힌 뒷이야기를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음악가가 되지 않았다면 ‘음악을 사랑하는 요리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만큼 요리를 사랑하는 그의 손끝에서 요리는 삶과 음악을 아우르는 하나의 작품이 된다.

음악가가 ‘프로페셔널’이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음악이 취미가 아닌 ‘일’이 되는 순간 음악을 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지독한 부담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정명훈에게 있어 요리는 언제나 ‘아마추어리즘’을 잃지 않게 해주는 소중한 자산이다.



100명이 넘는 오케스트라를 통솔하면서 느끼는 중압감, 최고의 음악을 들려주어야 한다는 긴장감에 시달릴 때마다 날카로운 비평 없이 자신을 맞아주는 요리의 세계는 그의 안락한 휴식처가 되어준다. 정명훈은 고된 연주를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의 집과 익숙한 주방이라고 말한다.

“맛있게 음식 먹으면 스트레스 싹~”

“일이 끝남과 동시에 집에 가서 해 먹을 메뉴가 한꺼번에 눈앞에 어른거리니 정말 못 말린다. 연주가 끝난 후 풀리지 않는 긴장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때조차도 부엌에 들어가 난장판을 만들면서 이것저것 요리를 하고, 식구들과 둘러앉아 맛있게 먹노라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다.”

그가 이처럼 요리를 사랑하게 된 것은 쉽지 않았던 어린 시절 덕이다. 정명훈이 일곱 살 때 자녀교육을 위해 미국 이민을 감행한 그의 부모는 워싱턴의 한 대학 앞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며 자식들을 가르쳤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 탓에 외부 사람은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시절, 식당 일은 온통 가족 몫이었다. 그의 형과 어머니는 서빙에 나섰고 정명훈과 아버지는 앞치마를 둘렀다. 그전까지는 부엌 쪽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던 아버지는 이 식당에서 놀라운 요리 솜씨를 발휘했단다. 그리고 정명훈도 자신 안에 숨겨진 또 하나의 재능을 찾아냈다.

“아버지 솜씨를 물려받았는지 요리를 곧잘 하던 나는 아버지가 주방을 비워도 혼자서 음식을 척척 만들어냈다. 요리가 너무 재미있어 힘든 줄도 몰랐다. 그때 내 나이 열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다.”

정명훈은 끝없이 요리를 하고 손님이 없는 시간이 돼서야 간신히 피아노를 칠 수 있었던 그 시절을 ‘재미있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자칫 고되게 느껴졌을 수도 있는 이때의 경험이 자신의 삶을 훨씬 더 충만하게 만들어주었다고 감사해한다.

“요리는 축복, 가족 위한 세레나데”

재즈 음악가를 꿈꾸는 둘째아들 선과 함께 요리하고 있는 정명훈.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신이 만들어낸 음식으로 가족과 주위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은 정명훈에게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는 연주가 없는 휴일이면 온종일 집에서 요리를 하며 지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다. 하지만 요리하는 즐거움만큼은 뺏길 수 없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 그래서 그가 집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좀처럼 요리할 기회를 잡을 수 없다고 한다.

“아침으로 김치찌개를 먹었으니 점심은 간단하게 파스타로 할까? 어제 먹고 남은 치즈로 라자냐를 구워도 괜찮을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며 주방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집에서의 모습이다. 그래서 가끔 그의 아이들은 “아빠가 있으면 평소의 세 배는 더 먹게 된다”고 투덜거리기까지 한단다.

그가 요리를 이처럼 사랑하는 이유는 요리야말로 지휘할 때와 비슷한 희열을 그에게 선사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휘와 요리는 참 비슷하다. 재료는 같아도 그 표현(interpretation)에 따라 확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요리사도 지휘자와 같은 ‘interpreter’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재료라도 무엇을 언제 얼마만큼 넣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지 않는가. 음악도 조화와 균형이 맞아야 아름다운 리듬이 만들어진다. 음식 맛이 훌륭하면 연주회에서 청중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느낄 때와 유사한 뿌듯함이 밀려온다.”

요리와 지휘는 그것을 진심으로 즐겁게 받아들이는 대상이 있어야만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없는 요리, 청중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연주처럼 의미 없는 것이 또 있을까. 정명훈에게 있어 지휘와 요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로 통한다. 지휘를 할 때, 그리고 요리를 할 때도 그의 대상은 언제나 가족이다.

가족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헌사

정명훈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 누린 최고의 행운은 아내를 만난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남자다. 아내를 만남으로써 사랑하는 가족을 얻었기 때문이다.

“기적!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대할 때마다 나는 이들이 내 인생의 기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음악가라는 정체성도, 지휘자라는 사명감도 잠시 잊는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성실한 짐꾼으로, 충성스러운 요리사로 거듭난다. 그들을 위해 짐을 들고 요리를 하는 시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정명훈이 이토록 격렬하게 가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그에게 이 표현은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니다. 가족은 그가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일깨워준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아야 했던 정명훈은 젊은 시절의 자신을 ‘날카롭고 비관적인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성격은 급했고 무엇이든 빨리 해치우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음악만을 인생의 화두로 끌어안고 살아가면서 그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상당했다. 자신에게 부족한 재능을 탓하며 세상에 잔뜩 날을 세웠던 열아홉 살 시절, 정명훈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아내를 만났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음악은 인생의 2순위로 밀려났고, 그렇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비로소 음악은 진정한 그의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연주자를 구분해보면 대개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들, 즉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어느 정도의 재능에 배울 수 있는 능력과 행운이 합쳐진 사람들이고, 셋째는 재능도 행운도 부족하지만 노력을 통해 일정한 수준에 오른 사람들이다. 나는 둘째 부류라고 생각한다.”

정명훈은 자신이 가족과의 만남을 통해 ‘내게 없는 천재성을 갈구하며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대신 그는 음악적인 만족감을 추구하면서 그 과정에서 느끼는 수많은 번뇌와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됐다.

그 소중한 가족들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이 요리.

“나의 삶은 ‘Dinner for 8(나와 아내, 세 아들 진, 선, 민 그리고 그들의 미래의 반려자들)’를 완벽하게 차려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그 이후의 삶은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내가 요리를 통해 삶의 균형을 찾듯 다른 이들도 작은 일상을 돌아보며 여유를 찾기 바란다.”

그래서 그의 책 ‘Dinner for 8’은 마에스트로가 자신의 삶과 음악,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루게 해준 사랑해 마지 않는 가족에게 바친 아름다운 헌사다.



주간동아 2003.09.04 400호 (p64~65)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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