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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길의 한민족 리포트

동티모르 코레안들 ‘꿈 많은 타향살이’

유소년들에게 축구 가르치는 김신한씨, 카페 운영 강명구씨 등 낯선 땅에서 ‘행복찾기’

  • 우길/ 여행작가 wgil2000@dreamwiz.com

동티모르 코레안들 ‘꿈 많은 타향살이’

동티모르 코레안들 ‘꿈 많은 타향살이’

바닷가에서 그들의 주식인 물고기를 잡는 소년들.

동티모르는 451년 동안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다 독립한 지 열흘도 안 돼 다시 26년간 인도네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간 불운한 역사를 갖고 있다. 2002년 5월20일 독립한 이 신생국은 한국의 강원도 크기로 수도는 딜리이고, 인구는 내외국인 합쳐 90여만명이다.

동티모르와 처음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손봉숙씨(한국중앙선거관리위원)다. 그는 1999년과 2001년 유엔 국제선거관리위원 자격으로 동티모르 독립찬반투표와 제헌의회 선거 투표 과정을 총괄했다. 그 후 유엔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상록수부대가 파견돼 4년 동안 치안 유지 활동과 인도적 구호 활동을 했다. 특히 상록수부대는 치안 유지 활동 외에도 마을회관과 학교를 짓고 낡은 상수도관을 교체하고 양수용 발전기를 지원해 식수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시범농장을 만들어 소득증대를 이끄는 등 ‘동티모르판 새마을운동’을 추진했다. 이런 인연으로 동티모르에서 ‘말룩 코레(친구 한국)’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동티모르에 거주하고 있는 대표적인 한국인을 꼽으면 아시아개발은행(ADB) 동티모르 소장인 함미자씨와 남편 제희우씨, 그리고 유엔평화유지군 소속 라우템 행정관으로 근무하며 컴퓨터 교실을 열고 복합영농단지를 조성해 주민들로부터 ‘동티모르의 대모’로 불리는 송혜란씨가 있다. 그밖에 유엔 직원인 강민휘, 최재창, 김을형, 최규식씨 등이 있고, 월드크리스천프런티어 소속으로 2002년 9월부터 오지마을 다우대레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최송학씨(25)도 있다. 다우대레 마을은 그곳에 사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학살당해 여자들끼리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마을이다. 최씨는 인근 5개 마을을 다니며 보건위생교육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는 ‘코레안 초이’로 통한다. 최씨는 9월경 한국으로 돌아가 결혼한 후 남편과 함께 다우대레 마을로 돌아올 계획이다.

상록수부대 새마을운동 보급도 귀감

동티모르 코레안들 ‘꿈 많은 타향살이’

바닷가에서 생선을 파는 한 상인(위). 동티모르 앞바다는 ‘물 반, 고기 반’이라 할 만큼 어종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동티모르 젊은이. 이곳 사람들에게 한국인은 ‘친구’로 통한다.

동티모르의 한국인들은 주요 단체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강명구씨(30)와 김신한씨(46)처럼 아무런 연고 없이 이곳에 온 사람도 있다. 김신한씨는 충남 서천 출신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했다. 한양공고를 졸업한 후 신탁은행, 해군, 현대자동차팀에서 수비수로 활약하다 서른한 살에 은퇴한 후 벌이는 일마다 실패하자 1995년 8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왔다. 잠시 친구가 하는 봉제공장에서 매니저로 일하다 목재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아 결국 99년 12월 빈털터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2002년 11월 동티모르에 왔다.



딜리에서 김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동티모르 유소년축구단을 만든 것이다. 이곳에도 국가대표 축구팀이 있지만 기본기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아 유소년 시절부터 제대로 훈련시켜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축구팀을 만들겠다며 동분서주하는 이방인을 도와줄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동티모르 축구협회 관계자들도 외면했다. 이때 김씨가 찾아간 곳이 상록수부대. 그곳 지휘자들을 만나 설득한 끝에 구스마오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를 얻어냈다. 김씨의 열정에 감동한 구스마오 대통령은 지원을 약속했고 마침내 2003년 4월 동티모르 유소년축구단을 창단했다.

이때부터 김씨는 8~12세 소년 60명의 아버지가 됐다. 그는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동티모르의 유일한 운동장인 딜리 스타디움에서 축구를 지도한다.

“제가 돈이 없어 아이들에게 잘해주지 못하는 게 마음 아프죠. 한국어 교실도 열고 학용품도 사주고 싶은데 아직 그럴 형편이 안 되네요. 특히 평소 잘 먹지 못해서인지 아이들이 조금만 뛰어도 금방 지쳐요. 일주일에 한 번씩 돼지고기라도 먹여야 하는데…. 이 아이들이 동티모르 국가대표가 되어 인도네시아팀을 이기는 모습을 보는 게 제 꿈이에요.”

지난 6월 김씨는 축구용품점을 열었다. 자식 같은 선수들에게 돼지고기라도 실컷 먹여주기 위해서다.

동티모르 코레안들 ‘꿈 많은 타향살이’

동티모르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최송학씨를 우연히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만났다. 최씨는 오지마을 다우대레에서 1년 동안 자원봉사를 했다. 동티모르의 바다에 매료돼 피카리 마을 바닷가에 ‘메티아웃카페’를 차린 강명구씨. 한국에서 실업팀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김신한씨는 사업 실패의 쓰라린 기억을 뒤로하고 동티모르로 건너와 유소년축구팀을 창단했다. (왼쪽 부터)

강명구씨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동티모르에 정착했다. 강씨는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해군하사관으로 입대해 5년 동안 배를 탔다. 그가 동티모르를 알게 된 것은 92년, 해군 환태평양 훈련중에 배가 호주 다윈항에 정박했을 때였다. 호주 TV에 비친 동티모르 바닷가 풍경을 본 이후 강씨의 머릿속에서 동티모르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강씨는 95년 10월 제대 후 한 은행 전산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4년 반 동안 자전거로 출퇴근해 ‘사이클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 그는 2000년 4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 싫어 사표를 내고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 1년 동안 배낭 하나 메고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부터 일본,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10여개 국을 여행했다. 여행의 끝이 바로 동티모르였다. 그는 자전거로 동티모르 오지마을들을 누비며 말도 통하지 않는 현지인들과 함께 먹고 잤다. 그러면서 디지털카메라로 동티모르 사람들과 자연을 찍었다.

한 달간의 동티모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강씨는 “정신이 나갔느냐”는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2003년 6월2일 아예 동티모르로 이주했다. 그가 정착한 곳은 딜리 시내에서 차로 15분 거리인 메티아웃의 피카리 마을.

처음 동티모르에 도착한 강씨는 피카리 마을 근처에 있는 호텔에 머물며 앞으로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까 고민했다. 전 재산은 4000여 달러. 5일째 되던 날 그는 호텔에서 나와 무작정 피카리 마을 앞 바닷가에 텐트를 쳤다.

초기엔 원주민들과 거리감 탓 애먹어

총 15가구가 살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은 핀투라는 청년만이 호텔경비원으로 일하고 나머지는 마을 공동 소유인 고깃배 4척을 이용해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고 있다. 그런 조용한 마을에 웬 한국 청년이 들어와 텐트를 치자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했다. 강씨에게 다가와 “왜 우리 땅에 텐트를 치느냐, 빨리 걷어라” 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강씨는 텐트 속에 들어앉아 태연히 바다만 감상했다. 마을주민들과 눈이 마주치면 ‘헬로’ 한 마디면 충분했다.

처음에는 이상한 외국인의 출현에 놀라던 사람들도 슬슬 강씨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룻밤 지나고 나니 강씨의 텐트에서 5m 떨어진 곳에 사는 폰슈라는 친구가 물고기 한 마리를 가져와 먹으라고 했다. 점심때는 밥 한 접시도 갖고 왔다. 마을사람들이 강씨를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다. 강씨가 정원으로 삼은 바다는 찬란했다. 태양이 두고 간 은빛 햇살이 바다를 건너 돌아가는 그곳에 강씨는 ‘메티아웃카페’를 차렸다.

“카페로 돈을 좀 벌면 해운회사를 만들 생각이에요. 이곳은 도로 사정이 엉망이어서 물류 부분이 문제거든요. 배를 한 척 빌려 운송업을 하려고 하는데 일단은 사업밑천부터 마련해야죠.”

그가 깃발을 꽂은 해안가 땅에 대해서는 이 마을 촌장들로부터 사용허가를 받았다. “마을에 네 명의 촌장이 있더군요. 제가 처음부터 그것을 알았겠어요? 카페 만들 생각에 핀투랑 땅을 파고 있는데 촌장들이 다가오더군요. 이곳에 카페를 만드는 건 좋은데 한 달에 100달러씩 세를 내라는 거예요. 결국 흥정을 해서 40달러에 합의를 봤어요.”

강씨와 피카리 마을사람들의 대화수단은 그림이다. 강씨는 검정색 비닐 커버의 두툼한 수첩을 보여주었다. 수첩 안에는 삽, 못, 생선 같은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 있다. 강씨가 직접 만든 카페는 모래 바닥을 파내고 시멘트로 기초공사를 한 후 나무기둥 몇 개 세우고 양철지붕을 얹은 엉성한 판잣집이다. 테이블 3개가 놓인 공간은 벽이 없어 탁 트인 바다와 마주하고 있으며 주방과 화장실, 방을 구분하는 벽은 대나무를 엮어 만들었다. 이웃 폰슈네 전기를 끌어다 쓰고 있지만 아직 수도시설이 돼 있지 않아 물은 길어다 먹어야 한다. 살림이라고 해봐야 석유버너와 코펠, 부엌칼, 수저, 포크, 접시 몇 개가 전부. 그래도 강씨는 ‘한 달 동안 내 힘으로 이것을 만들었구나’ 생각하면 콧등이 시큰해진다고 말한다. 한번은 김치가 너무 먹고 싶어 시장에 가서 배추와 고춧가루를 사오긴 했는데 하필 소금이 떨어져 핀투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깨끗한 바닷물에 배추를 절여 김치를 담그기도 했다.

“제가 만든 카페에 앉아 저 바다를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르겠어요.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을 느끼죠. 바로 이 자리에서 말이에요.”



주간동아 2003.08.28 399호 (p58~59)

우길/ 여행작가 wgil200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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