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5

2001.05.24

개혁… 개혁… 그러나 주체가 없다

‘약발’없는 개혁론만 무성 … 모호한 개혁 주체, 흐려진 정체성이 원인

  • < 윤종구/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jkmas@donga.com >

    입력2005-01-27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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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 개혁… 그러나 주체가 없다
    개혁지속론, 개혁수습론, 개혁중단론, 개혁마무리론, 개혁추수론, 개혁정비론…. 민주당이 온통 개혁논의에 휩싸였다. 4·26 재보궐 선거 참패 이후 당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반성의 한 단면인 듯하다.

    민주당은 현실적으로 개혁의 성공 여부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 있다. 그런 민주당에서 개혁을 둘러싸고 이처럼 다양한 논(論)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당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들이 많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민주당에서 개혁과 정체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이다.

    지난 5월7일의 최고위원 워크숍에서는 “당의 정체성이 뭐냐”는 목소리가 나왔고, 8일 ‘여의도 정담’에서 의원 10명은 지도부 인책론을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물음들의 밑바닥에는 민주당, 나아가 범여권 지도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자리잡고 있다. 한마디로 현재의 여권 핵심부를 구성하는 면면들이 과연 개혁주체가 될 수 있을지를 묻는 질문이다.

    신통찮은 국민의 정부 3년 ‘개혁 성적표’

    민주-자민-민국의 여 3당 정책공조로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이한동 총리, 김중권 민주당 대표, 김종호 자민련 총재대행, 김윤환 민국당 대표 등의 모임이 자주 부각하면서, 민주당에서 잔뼈가 굵은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위의 인사 모두가 과거 민정당 또는 민자당에서 한솥밥을 먹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고위원 워크숍에서 일부 최고위원이 개혁수습론을 언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청와대에서는 즉각 ‘중단 없는 개혁’을 못박았다. 그러자 다음날부터 모든 최고위원들이 입을 맞춘 듯 개혁 지속을 합창했다. 당 주변에서 “개혁이 원칙에 대한 합의 없이 입으로만 진행되었다”는 자탄이 흘러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 중간 당직자는 “말로 개혁을 외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성과를 내기란 어렵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지 3년이 넘었지만, 국민에게 이렇다 하게 내세울 만한 개혁 작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다”고 털어놓았다.

    국민의 불편을 무릅쓰고 개혁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밀어붙인 의약분업은, 후세의 평가를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면 정부-여당의 신뢰를 하루아침에 깎아내리고 자칫 정권 차원의 위기로까지 치달을 뻔한 악재가 되었다. 5월 말경 발표할 종합대책의 내용이 무엇이든 의사와 약사, 국민이 고루 만족하는 ‘약발’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여러 차례의 홍역을 겪었음에도 의약분업은 여전히 대단한 폭발력을 가진 휴화산인 셈이다.

    집권 초기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밀어붙인 빅딜의 결과 몸집이 커진 하이닉스반도체(구 현대전자)가 최근 위기에 봉착한 것도 정권으로서는 아픈 대목이다.

    개혁 성적표는 신통치 않은 반면 온갖 개혁론만 무성한 것을 두고 민주당의 한 초선의원은 “당의 모든 사람들이 개혁이라는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 정작 넓은 시각으로 개혁의 밑그림을 그리고, 몸과 마음을 던져 끌고 나갈 주체세력이 없는 것 같다”고 자조했다. 그는 또 “현재의 국회 의석 분포상 자민련과 민국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과연 민주당이 독자적으로 개혁을 관철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급한 마음에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와 DJP 합의문에 도장을 찍은 순간부터 개혁의 한계가 설정되었다는 해석까지 제기한다. 게다가 자민련에 이어 3당 정책연합으로 민국당까지 범여권에 가세함에 따라 여권의 국회 장악력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민주당의 개혁 추진력은 더 약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황은 개혁 입법의 실적에서 잘 드러난다. 반부패기본법, 돈세탁방지 관련법, 모성보호 관련법, 교육개혁 관련법, 재정개혁 관련법, 약사법 등은 몇 차례나 연기된 끝에 또다시 6월 국회로 넘어갔다. 3년 동안이나 끌어온 인권법은 4월 임시국회에서 통과했지만, 시민단체와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조차 “법무부 등의 견제를 뚫지 못해 알맹이는 다 빠지고 입법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적지 않은 개혁입법 과정에서 민주당이 자민련의 반대에 부딪쳐 주춤거린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보안법이다. 민주당은 지난 5월12일에도 국가보안법 개정안의 6월 임시국회 처리문제와 관련해 당 지도부의 혼선이 드러났다.

    가까운 시일 내에 드러날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한 정당 및 정치인들의 입장이야말로, 정치권을 진보와 보수, 양 진영으로 확연히 가를 수 있는 이념적 시험지가 된다. 민주당은 인권 차원에서라도 국가보안법의 일부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자민련은 기회 있을 때마다 개정 절대 불가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국가보안법 개정 문제는 벌써 몇 개월째 논의조차 안 되는 실정이다.

    개혁… 개혁… 그러나 주체가 없다
    이밖에 모성보호 관련 3개 법안이나 교육개혁 관련 3개 법안 개정에서도 민주당은 아직 자민련이라는 1차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행정부가 개혁을 강하게 추동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원래 공무원 집단이 개혁과는 거리가 있는데다 3·26개각에서 자민련과 민국당 소속 의원들이 다수 입각함으로써, 내각의 개혁 색채에 관한 한 오히려 한층 옅어진 셈이 되었다. 이래 가지고는 제대로 개혁도 이룰 수 없거니와 당의 정체성도 못 찾고, 전통적 지지계층도 떨어져 나가 결국은 정권재창출이 요원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역으로 개혁에 대한 온갖 주장들이 쏟아져 나오는지도 모른다. 여권 핵심이 ‘중단 없는 개혁’을 굳이 강조하고 나서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대국민 홍보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전국 지구당 홍보부장 연수(지난 5월10일 청원연수원)에서 만난 한 홍보맨은 “당 지도부나 의원들은 늘 개혁을 외치지만, 막상 주민을 만나면 개혁에 관해 무엇을 홍보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지난 대선 때 우리를 지지해 정권을 안겨준 전통적 지지계층에게 기대와 희망을 다시 심어주지 않고는 개혁이 추진력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정권 재창출도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수도권의 또 다른 홍보부장은 “솔직히 우리 당이 개혁정당인지 잘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이와 관련해 김중권 대표의 이날 청원연수원 강연은 하나의 시사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3당 정책연합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당의 정체성을 말하는데 지금 우리 당은 정체성을 말할 때가 아니다. 민주당은 천하의 인재를 모은 개혁적 국민 정당으로 출범했다”고 역설했다.

    민주 정당에서 어쩌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제 민주당 내에도 여러 색깔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지도부 인책론과 당의 정체성 등을 거론하였다는 8일의 ‘여의도 정담’에 참석한 한 의원의 말도 이의 연장선상에 있다. “개혁성향 의원들이 모였다고 해서 가봤으나 정말 개혁적인 사람은 몇몇에 지나지 않더라.”

    그는 “누구나 개혁을 말하고, 상대방이 덜 개혁적이라고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정작 개혁의 기관차가 되어 확실히 밀고 나갈 만한 사람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실제 개혁입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내 보수성향의 높은 벽을 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내비쳤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개혁의 목표와 내용에 대한 국민적 합의, 구체적인 개혁 프로그램, 그리고 이를 시나리오대로 힘있게 끌고 나갈 개혁주체가 있어야 한다. 그래도 성공할까 말까 한 것이 개혁이다. 개혁보다 차라리 혁명이 쉽다는 말도 이래서 나왔을 것이다. 기득권층의 반발과 수많은 이해집단끼리의 갈등은 정치권으로서는 여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부에서조차 개혁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당의 정체성 논란과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최근 민주당의 현실이다. 당의 정체성을 논하지 말라는 것은, 개혁을 이끌 주체를 논하지 말라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일 것이다. “개혁만이 살길이다”고 다들 총론적으로 외치기만 할 뿐,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을지 각론에 대한 해답을 아무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개혁 주체의 불확실성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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