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4

2001.05.17

제2의 파리 망명객 ‘26년 일기’

  •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

    입력2005-01-27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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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의 파리 망명객 ‘26년 일기’
    뭐, 그냥 다녀오지. 감옥에 넣는 것도 아니고 가서 몇 자 끄적거리면 되는 모양인데.” 이렇게 말하며 그의 등을 떠미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유진씨의 대답은 “나한테 소명절차를 밟게 하고 싶으면 앞으로 200년은 기다리라고 해”였다. 그 대가로 1979년 이후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씨가 고국땅을 방문(1999)하고도 1년이 지난 뒤, 제2의 망명객 이유진씨(62)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파리의 한인신문 ‘오니바’ 등이 그의 억울한 사연을 소개했지만, 한국에서 그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지난해 3월 김대중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일정이 잡히자 25년 만에 부랴부랴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공소시효(15년)가 지났으니 소명절차를 밟으면 한국에 가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씨는 그조차도 거부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반성문을 쓰나.” 한 번도 굽히지 않은 그의 ‘자존심의 등뼈’는 여전했다.

    이유진씨는 63년 서울대 문리대 심리학과를 졸업하자마자, 그해 4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한국에 프랑스 심리학을 소개하겠다는 소박한 꿈을 안고 온 이 유학생은, 통행금지도 없고 지문날인도 없으며 불심검문도 없고 학문에도 사상에도 정치에도 터부가 없는 프랑스의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어느 새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투사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정(情) 빼면 시체’요, 부탁을 거절할 줄 모르는 인간미 때문에 그는 ‘간첩’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발단은 지난 79년에 일어난 이른바 ‘한영길 사건’이었다. 당시 파리5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프랑스 문부성에서 일하던 그는, 그해 5월 서울대 문리대 후배 한영길(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부관장으로 파리 거주)에게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부부싸움 끝에 아내가 가출했는데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후 느닷없이 한씨 부인의 주검이 센강에 떠올랐다. 검시결과는 자살. 하지만 한씨는 중앙정보부에게서 국가망신을 시켰으니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등의 협박을 받고 이유진씨에게 정치망명을 도와달라며 매달렸다. 후배 한씨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망명신청을 하던 한씨는 방황 끝에 스스로 망명을 포기했고, 주불한국 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믿었던 대학 선배가 알고 보니 북한 공작원이었다. 그 공작원한테 딸을 인질로 잡히고 지난 3개월을 여기저기 끌려다니다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주장했다.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이씨는 졸지에 간첩이자 파렴치범으로 몰렸다. 이씨는 조국에서 추방당했을 뿐 아니라 파리의 교포사회에서도 고립되었다.

    이듬해 둘째 준경이가 염색체 이상의 장애아로 태어났고 83년 아버지가, 84년에는 어려울 때마다 묵묵히 도와주던 대부 콩타맹 교수(파리대 의과)마저 잇달아 세상을 떠나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지난 75년 프랑스 국적으로 바꾼 덕에 간첩죄를 뒤집어쓰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삶 자체가 ‘감옥’이었기에 큰 차이는 없었다. 아내 이사빈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무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것이 곧 감옥이죠. 사람은 살려 놓고 날마다 좌절에 빠지는 상황”이라고.

    ‘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는 26년 전의 파리 망명객 이유진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산문집이다. 그저 기막힌 삶을 살아온 이의 넋두리로 치부하기에는 책 곳곳에서 느껴지는 생각의 깊이와 헤아림이 만만치 않다.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섭렵한 해박한 지적 토대 위에, 어느 누구보다 고단한 세월을 버텨오며 삶 자체가 수행이 된 그의 남다른 체험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자에 따라 여러 가지 초점을 갖고 있다. 장애아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는 “모자란 자식을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보통 아이들보다 백 배, 천 배 손이 가는 만큼 부모의 마음도 오롯이 깃들여 모자란 자식이 결국 부모의 영혼과 하나로 묶인다는 것을”이란 대목이 가슴을 후빌 것이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핍박 받은 이들은 국가의 폭력 앞에 좌절하지만, 결코 무릎 꿇지 않은 한 인간의 삶에 경외감을 표할 것이다.

    이유진씨는 이 책의 출간을 기념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측의 초청으로 오는 5월 하순경, 고국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최종결정을 망설이고 있다. 여전히 정부가 ‘소명’을 강제하진 않지만 희망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소명절차를 거부하는 것은 분단 이데올로기라는 장애로 인해 20~30년간 귀국을 하지 못하는 해외 민주인사들의 문제이고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라며 고집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귀국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에게 이데올로기가 남긴 상처는 그만큼 깊고도 넓다.

    ‘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 이유진 지음/ 동아일보사 펴냄/ 346쪽/ 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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