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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한국판 빠삐용’ 정치판서 제2인생

탈북 김형덕씨 국회의원 비서로 첫발… 3년간 5개국서 필사의 탈출 경험

  •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

‘한국판 빠삐용’ 정치판서 제2인생

‘한국판 빠삐용’ 정치판서 제2인생
3년 동안 5개국 경찰에게 여섯 번이나 체포와 감금을 당해야 했던 불운의 주인공. 그때마다 탈출에 성공한 대탈주극의 히어로. 그러나 지금은 명문대학 학생이자 탈북자 최초로 국회의원 비서가 된 정치 지망생.

‘한국판 빠삐용’으로 불리는 탈북자 김형덕씨(27)의 93년 이후의 개인 이력은 20대 후반 젊은이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드라마틱하다. 한 편의 서사시 같은 그의 인생은 한 차례의 대단원을 거쳐 숨을 고르는 현재 제2막을 준비중이다. 2막의 주제는 단연 ‘정치인 김형덕’일 것이다.

가는 비가 내리던 지난 5월3일 오전, 강연회다 설문조사다 바쁜 스케줄에 허덕이는 그를 국회 의원회관에서 어렵사리 만나 거두절미하고 “왜 자꾸 탈출하느냐”고 물었다. 고된 인생 역정 때문이었을까. 그동안의 모진 풍파와 사연을 무시한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그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 그의 대답은 ‘한국판 빠삐용’ 답게 역시 간단 명료하다. 자유를 구속한다면 또 탈출할 것이냐고 되묻자 “가난한 자유가 이익이 있는 구속보다 낫다”며 씩 웃는다. 이미 그의 인생에서 ‘자유’는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이자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종교가 되었다. 그는 이제 ‘한국의 장 발장’으로 자신을 표현해 달라고 했다. 빠삐용은 바다에 빠진 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장 발장은 탈옥 후 모든 이를 위해 선행을 베풀지 않았느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앞으로 이 땅의 1500여 탈북자를 위한 ‘장 발장’이 되겠다는 게 그의 꿈이기 때문이다. ‘탈북자’라는 말도 쓰지 않았으면 한다고. 웬만하면 ‘자유 이주자’로 불러달라는 것.

그는 지난 4월2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소속 민주당 김성호 의원실의 인턴 비서가 되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어서 ‘인턴’이 붙었고, 정식 국회 소속 직원이 아닌 의원실 비서격이기 때문에 그의 호칭 뒤에는 ‘관’자가 붙지 않는다. 대기업 입사 시험에도 합격했지만 이를 포기하고, 스스로 김의원에게 자신을 비서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김의원은 이를 선뜻 받아들였고, 이로써 그는 ‘남한의 정치인’으로 정식 입문한 것이다.



“한국 정치판은 정치인의 재산 정도, 지연, 학벌에 따라 진입을 제한하는 요소가 많다는 점에서 북한과 일부 비슷하지만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투표에 반영할 수 있고, 여론 조작만 없다면 정권조차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고작 한 달을 넘긴 ‘정치수업’에도 그는 한국의 정치판을 이미 훤하게 꿰뚫었다.

남한에 와서 가장 신기했던 것이 선거에 참여해 자유롭게 투표한 경험이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 정치의 변화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거는 그지만, 남한 국민들의 학벌지상주의에 대해서는 단호히 척결해야 할 권위주의의 잔재로 못박는다.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국회의원 되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았죠.” 그의 대탈출 드라마의 실마리를 제공한 이유 역시 대학 진학문제였기 때문에 그의 못마땅함은 더하다. 대학 진학을 위해 들어간 북한 군대는 결국 그를 정치적 망명자로 만들었다. 소설 한 권은 족히 나올 만한 그의 탈출기는 들을수록 가슴이 아팠다.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당시 치안대 활동을 한 사실 때문에 북한 내에서 반동집안으로 몰린 그는 고등중학교 내내 전교 1등을 했지만 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돌격대(군대)에 지원해 그곳에서 잘하면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소문에 충성을 다했지만, 상관의 비리를 동료들에게 이야기한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영창에 갔는데, 배가 고파 조절(좀도둑질)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

한 번의 실패 끝에 탈옥에 성공한 그는 압록강을 넘어 북한에서 탈출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따뜻하게 맞아줄 것 같던 베이징 주재 한국 대사관이 그의 망명신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기 때문. 만약 그때 한국이 그를 받아들였다면 베트남 국경수비대에 감금되거나, 중국 경찰에 호송되어 목숨을 잃을 뻔한 경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홍콩의 난민수용소에 수용되는 일은 더 더욱 없었을 것이다.

지난 94년 9월 여론에 밀린 한국 정부가 그의 망명을 받아들여 그는 드디어 ‘자유의 땅 대한민국’에 들어왔으나 1년 4개월 만인 96년 1월 또다시 밀항선을 타고 한국에서 탈출하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탈북자에 대한 냉대와 불평등한 시각, 보고 접한 모든 것이 서러울 뿐이었다는 게 그의 사후담이다. 그를 가장 못 견디게 한 것은 인간관계를 돈(자본)의 가치로만 바라보는 남한 국민들의 척박함이었다. 돈이 없으면 무시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토가 너무도 이상했다.

“자본주의는 어차피 이윤의 논리가 지배할 수밖에 없고, 자유도 그 안에서의 제한적 자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알았고요.” 탈출을 시도한 대가로 100일의 옥살이를 끝낸 그는 이듬해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본주의’와 타협했다. 제한적 자유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 대학에서 자본주의 경제학을 실제로 공부하면서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바이블처럼 생각하는, 자칭 계몽주의자이자 극단적 리버럴리스트인 그가 엄청난 양보를 한 셈이다.

‘한국판 빠삐용’ 정치판서 제2인생
3년의 대학생활 동안 남한을 지켜본 그는 자연스럽게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 먼저 절박하게 와 닿았던 것이 자신과 같은 탈북자들이 남한에 적응하는 문제였다. 대부분 4000만원의 정착 지원금을 모두 날리고 제대로 된 직업조차 가지지 못한 탈북자들에게 근본적인 지원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탈북자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또 배울 만큼 배운 자신이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고, 그는 이에 대한 정책 대안을 만들기 위해 국회를 찾았다. 그는 남한의 탈북자 정착 지원 시스템이 돈은 돈대로 쓰고 실질적으로 도움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비생산적 복지 시스템의 전형이라고 비난한다. “그들에게도 직업 선택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는 우선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우고, 인센티브제를 도입해 그들의 적응 욕구를 복돋워야 합니다.” 그는 탈북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책 대안의 얼개를 그려놓았다. 탈북자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자유와 인권의 보호라는 정치의 궁극적 목표를 실현하는 첫걸음임을 정치 새내기 김형덕은 절감했다.

“남한의 민주주의는 통일을 하지 않는 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의 자유도 그만큼 제약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통일문제는 바로 자유의 문제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제게 국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통일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조차 자유의 문제를 관통하는 그는 정말 지독한 자유주의자임이 틀림없었다.

정치에 입문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벌써 자신의 매너리즘을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사무실에 붙어 있지 않고, 탈북자를 만나거나, 그를 감시했던 국가정보원을 괴롭히기도(?) 하는 등 정신없이 현장을 뛰어다닌다. 탈북자 문제의 해결과 남북 통일문제에 기여하기 위해 국회의 힘을 빌린 뿐이라는 그의 말이 뻔한 ‘변명’으로 비치는 것은 이미 그의 몸에서 현장 정치인의 모습이 배어 나오기 때문이었을까.

“형이라고 해도 괜찮을까요. 저는 형제가 없어요.” 인터뷰 내내 강인한 모습을 잃지 않던 그가 갑자기 사진기자에게 뜬금없는 부탁을 한다. 모진 고문과 감금생활을 견딘 그에게도 북에 두고 온 부모와 누나들에 대한 죄의식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도 또한 남한의 생활에 힘겹게 적응해 가는 ‘자유 이주자’ 중 한 사람에 다름 아니었다.





주간동아 2001.05.17 284호 (p80~81)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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