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3

2001.05.10

인간의 언어 배운 '까마귀'의 비극

  • < 김미도/ 연극평론가·한국산업대 교수 semele@unitel.co.kr >

    입력2005-01-25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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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언어 배운 '까마귀'의 비극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이성적 논리로 해명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존재한다. 과학과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현실에 실재하는 것, 이론적으로 규명 가능한 것들만을 믿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이 우주에서 한낱 티끌만큼의 존재도 되지 못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 세상의 운행을 다 알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세계, 영적인 세계, 초현실적인 세계,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신비로움을 망각한 현대인들은 너무나 메마르고 각박한 삶을 살아간다.

    인간 같은 까마귀, 까마귀 같은 인간이 등장하는 연극이 있다. 극단 청우가 귄터 아이히의 ‘자베트’를 김광보 연출로 강강술래 소극장에서 공연중이다. 독일 작가의 작품답게 철학적-사변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매우 우화적이고 동화적인 형식에 담아내어 어렵지는 않다.

    연극은 꼬마 소녀 엘리자베트(강은주 역)를 가르치는 여선생(윤복인 역)의 내레이션으로 이끌어진다. 여선생은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엘리자베트가 ‘말하는 까마귀’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녀가 심각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고 가정방문을 한다. 엘리자베트의 엄마를 만난 여선생은 집안에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음을 알게 되고 어느 순간, 이상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홀연히 나타난 거대한 까마귀를 만난다.

    그 까마귀는 엘리자베트의 이름 뒷부분을 따서 ‘자베트’라 불린다. 여선생은 자베트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자베트의 비밀을 밝혀 세상에 알리기로 한다.

    자베트역을 맡은 윤상화는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까마귀를 연기한다. 까마귀의 의상이나 분장을 하지 않고서도 그는 까마귀다운 자태와 몸짓으로 까마귀도 인간도 아닌, 매우 그로테스크한 반수반인의 존재를 표현한다. 한 옥타브 고양한 음성,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어눌하면서도 과장한 어투를 구사하는 자베트의 언어는 모호한 가운데서도 심각한 철학적 숙제들을 던져놓는다.



    자베트가 인간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의 서투른 말을 통해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물을 규정-인식하며 세계를 배워간다. 언어를 통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세계는 불완전하고 불명확하며 불투명할 뿐이다. 그러나 언어 자체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 그 제한된 언어로 인해 우리는 숱한 오해와 분쟁을 낳는다.

    자베트가 처음 엘리자베트의 가족과 만났을 때는 말이 없이도 서로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엘리자베트의 어린 눈을 통해 보이는 자베트는 동화 속 세계의 현현에 다름 아니다. 신비로운 존재, 꿈같은 현실, 그를 통한 시간과 공간의 초월, 직관적이고 영적인 교감 속에서 그들은 한순간 아주 행복하였다.

    하지만 자베트가 인간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는 오히려 세계에서 단절과 소외를 경험한다. 그는 아무것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고, 누구와도 완전하게 의사소통할 수 없다. 언어의 구조 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들은 점차 잊어버리고 망각을 통해 숱한 상실을 체험한다.

    탄생, 사랑, 죽음, 불멸 등의 단어를 배우면서 자베트는 인간이 너무나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응시하며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다. 사람들은 자베트가 죽었다고 믿지만 어쩌면 그는 우리의 현실계를 포함한 더 커다란 어떤 세계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5월6일까지. 문의 02-766-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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