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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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핀 애절한 사랑

  •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입력2005-01-25 1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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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 속에서 핀 애절한 사랑
    늦가을에 문득 찾아오는 짧은 여름날을 ‘인디안 썸머’라고 한단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슬슬 겨울옷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쨍’ 하고 햇빛이 쏟아지고 사방에 푸르른 기운이 가득할 때, 사람들은 의아하고, 또 한편으론 황망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비현실적인 느낌까지 드는 짧고도 찬란한 순간. 돌아보면 우리 인생에서도 이런 순간이 있다. 시작과 함께 끝나버린 짧은 사랑이 있다면 그것도 인생의 ‘인디안 썸머’일 것이다.

    영화 ‘인디안 썸머’는 남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 이신영(이미연 분)과 그녀의 변호사 서준하(박신양 분)의 이야기다. 사형수와 그의 변호사를 다룬 영화는 많지만 죽음보다 깊은 절망 속에서 사형수와 변호사가 불꽃 같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더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사랑이 찾아왔을 때 죽어야 한다니….

    “재판을 거부합니다.”

    이미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이신영은 자신을 위한 모든 변호를 거부하고 재판조차 받지 않으려 한다. 그녀의 모습은 죽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평온하다. 변호사 서준하. 출셋길이 보장된 해외연수를 기다리면서 이신영의 항소심 국선변호를 맡은 그는 법정에서 처음 본 여자의 차가운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말한다. “죽고 싶단 말이 살고 싶단 말보다 더 절실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

    준하는 연수도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며 여자를 살리려 애쓴다. 신영은 “내 일에 너무 애쓰지 말아요. 자꾸 살고 싶게 만들지 말라구요”라며 사랑을 밀어내려 하지만, 삶에 대한 모든 미련을 내던지고 온기 하나 없이 황폐해진 여인의 가슴에도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 찾아든다.



    절망 속에서 핀 애절한 사랑
    촉박한 시간은 그들의 사랑을 더 절실하게 한다. 항소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아 여자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사랑은 이제 시작하는 듯 보인다. 함께한 단 이틀 간의 여행. 시골길의 햇살과 살에 닿던 바람, 처음으로 지어보이는 여자의 환한 웃음과 낮은 소리를 내며 잠든 남자의 곤한 잠…. 이런 순간은 이들의 사랑에서 가장 찬란한 기억으로 남는다.

    살인의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면서 다시 법정으로 돌아온 두 사람. 미치도록 살고 싶은 순간에 여자는 죽음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법의 진실’을 믿던 남자는 혼돈 속에 내던져진다.

    이 영화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하는 요소는 법과 사랑이다. 한 사람은 법을 지켜야 할 변호사, 한 사람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형수. 영화에서 ‘법’은 등장인물의 사랑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개입한다. 법은 두 사람을 만나게 했지만, 한편으론 위압적인 칼날로 여자를 끊임없이 죽음으로 내몬다. 변호사 서준하가 이 여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법의 심판’을 통해서다. 이렇게 촘촘히 짜인 법과 사랑의 관계는 영화에 독특한 매력을 부여하지만, 법정 드라마 특유의 차갑고 논리적인 전개가 애잔한 남녀의 감정을 한껏 살리는 데 장애가 된 듯하다.

    ‘물고기자리’에 이어 다시 비련의 여인으로 돌아온 이미연은 얼음처럼 차가운 사형수로 분해 호연했지만 ‘물고기자리’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해 아쉬움을 남긴다. 이 점은 박신양 역시 마찬가지. ‘약속’의 건달이 사법고시를 통과해 변호사가 된 듯한 느낌. 배우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시나리오나 감독의 연출력이 이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로’의 시나리오를 써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한 노효정 감독의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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