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3

2001.05.10

한국의 ‘지존무상’ 꿈꾼다

‘강원랜드’ 2층 VIP 회원 전용 룸… 게임 한판에 최소 3백만원 베팅, 최고급 도박문화의 현장

  • < 정선=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

    입력2005-01-25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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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지존무상’ 꿈꾼다
    ‘강원랜드’ 2층 VIP 회원 전용 룸… 게임 한판에 최소 3백만원 베팅, 최고급 도박문화의 현장

    내국인용 카지노 ‘강원랜드’의 2층엔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등 보석 이름이 붙여진 네 개의 방이 있다. 이른바 VIP 회원 전용 카지노 룸이다. 이곳은 일반인이나 매스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며 ‘특별히’ 허가받은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다.

    그러나 강원랜드가 개장 6개월로 접어들면서 VIP룸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은 점점 높아진다. 많은 수의 ‘겜블러’들은 “강원랜드의 VIP룸이 ‘최고급 도박문화’를 한국 사회에 이식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곳이 바로 한국판 ‘지존무상’이 태동하는 요람이라는 것이다. 신비에 싸인 밀실, 내국인 카지노의 VIP룸에선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질까.

    3천만원 예치 게임 실적 따져 회원으로 인정

    지난 4월25일 오전 8시, 기자는 강원랜드측의 사전 동의를 얻어 게임(개장시간 오전 9시~다음날 오전 6시) 개시를 앞둔 VIP룸을 둘러봤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건장한 카지노 직원들을 배치하였다. 화려한 카펫과 실내장식으로 꾸민 4개의 방엔 30대의 슬롯머신과 블랙잭, 바카라, 룰렛 게임을 위한 8대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아래층 일반 카지노는 제한된 공간에 워낙 많은 사람들(대략 하루 입장객 2000명)이 들어오기 때문에 한번 자리를 뜬 손님은 테이블게임 의자에 다시 앉을 수 없을 정도로 혼잡스럽다. 그러나 VIP들은 비슷한 공간을 회원 150여 명이 여유있게 나눠 쓴다. 2층 전용 바는 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무료로 제공한다. 일반 카지노와 달리 게임을 하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특혜도 주어진다.



    한국의 ‘지존무상’ 꿈꾼다
    이런 곳에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한국 사회의 최상류층이다. 강원랜드가 밝히는 VIP 회원의 조건은 3000만원을 카지노에 예치할 것, 게임 실적이 높을 것 등이다. 이 카지노 관계자는 “이밖에도 직업의 품위, 사회적 지위, 재산 정도를 까다롭게 고려한다”고 말했다. 강원랜드에 따르면 VIP 회원의 90%는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수 기업체 사장들이다.

    기자는 VIP 회원 A씨를 만났다. 그는 게임비로 3000만원을 들고 와서 밤새 1000만원을 잃었다. 기업체 대표이사인 그는 “한 달에 두 번 카지노에 와서 2~3일 머물면서 보통 1000만원 정도 잃고 간다. 정신을 집중해서 게임한 뒤 탈진한 상태로 잠을 푹 자는 것이 내가 삶을 재충전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A씨는 과거엔 홍콩이나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카지노를 했는데, 강원랜드가 생기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좋아했다. 강원랜드의 테이블게임 담당자는 “A씨가 갖고 온 돈과 잃은 액수는 VIP 고객의 평균 지출 규모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30대 벤처 기업가 B씨는 라스베이거스 유학 시절 카지노에 취미를 붙였다. VIP는 대개 외국에서 상당 수준의 카지노 실력을 닦아둔 상태며, 일반 카지노와 달리 옆사람이 계속 게임에서 이기더라도 뒤따라 베팅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1억원을 들고 왔다는 B씨는 바카라 테이블에 앉아 밤새 5000만원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카지노는 슬롯머신으로 시작해 바카라로 끝납니다. 블랙잭이 한국 겜블러들에겐 최고 인기지만 진정한 고수(高手)는 바카라를 찾습니다”(B씨). 바카라는 게임 참여자가 플레이어(player)와 뱅크(bank) 중 하나를 택해 베팅한 뒤 2장 또는 3장의 카드에 적힌 숫자의 합을 비교해 9에 더 가까운 쪽이 딜러에게서 베팅한 액수만큼의 돈을 받는 게임이다. 진 쪽이 베팅한 돈은 딜러가 갖는데 손님들의 희비가 극단적으로 갈려 손님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심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바카라는 전통적 노름인 속칭 ‘도리쥐꼬땡’과 게임 방식이 비슷한데다 소요시간도 짧고 베팅 액수도 커 카지노 게임 중에서도 가장 도박성이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강원랜드의 VIP룸 중에 바카라 전용룸이 있다. 이곳은 크기는 가장 적지만 ‘VIP 중의 VIP’만을 위한 공간이다. 최대 8명 정도가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이 방은 게임 한판의 최저 베팅액이 300만원에 이른다. 강원랜드 관계자는 “한 판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분 정도며, VIP들은 대개 8목의 카드가 두 번 돌 때까지 게임을 한다(이를 시간으로 환산하면 4시간 정도)”고 말했다. 바카라 전용룸에서 게임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실탄’을 가져야 하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강원랜드의 딜러 C씨는 최근 VIP룸의 꽃, 바카라 전용룸에서 벌어진 게임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가 전하는 그 방의 풍경은 영화 ‘지존무상’의 스케일과 긴박감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네 명의 VIP가 와서 밤 11시쯤 판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방에선 현금다발 1000만원어치를 테이블에 우르르 쏟아놓아도 게임용 칩(100만원에 해당하는 황갈색 최고액 칩이다) 10개만 손에 쥘 뿐입니다. 대개 손님들은 칩을 넉넉히 바꿔놓습니다. 처음 한 시간 동안 한 판에 베팅하는 칩은 5개를 넘지 않았습니다. ‘첫판은 플레이어가 이겼고, 두 번째 판부터 다섯 번째 판까지 뱅크가 이겼다, 여섯 번째 판은 플레이어가 다시 이겼다. 그렇다면…’ 손님들은 이런 방식으로 종이에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면서 게임에서 일관되게 흐를 것 같은 ‘승리의 법칙’을 찾으려고 합니다”(C씨).

    한국의 ‘지존무상’ 꿈꾼다
    처음 3분의 1은 대개 이런 ‘탐색전’으로 전개한다. 고수는 후반 3분의 1에서도 고액 베팅을 자제한다. 바카라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게임의 중간시간대에서 이루어진다. “한 손님이 확신한 듯 20개의 칩을 플레이어에 쏟아부었습니다. 그러자 사사건건 그의 반대편에 베팅하던 다른 손님도 2000만원을 뱅크에 베팅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극에 달했습니다. 판돈은 모두 6000여만원. 일반 카지노에선 손님이 카드를 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방에선 최고액 베팅을 한 손님에게 카드를 건네줘 결과를 직접 확인하게 합니다. 2000만원을 베팅한 손님은 카드를 힘껏 쥐어들었습니다. 그는 온몸의 기를 쏟듯 입으로 ‘후, 후’ 하는 바람을 카드 속으로 불어넣으며 천천히 카드의 끝부분부터 열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스퀴즈’라 하는데 결국 그 손님이 9, 반대편 손님은 7이 나와 뱅크가 이겼습니다. 게임이 끝난 뒤 그 손님은 ‘마지막 카드를 받아들 때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숫자의 합이 9임을 확인하는 순간 번지점프를 할 때보다 더 짜릿했다’고 말했습니다”(C씨).

    ‘사교의 장’ 좋지만 위화감 조장 우려 목소리도

    바카라 전용룸에서 VIP 회원 D씨는 ‘전설적 인물’로 통한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판마다 2000만원을 베팅한다는 것이다. 강원랜드의 딜러 E씨는 “이렇게 많은 돈을 거는 손님은 처음이었다. 그 손님이 하루 동안 베팅한 금액을 모두 합한다면 수십억원은 족히 된다”고 말했다. VIP 회원 중엔 여성도 여러 명 있다. 그중 20대 후반의 한 여성회원은 단연 화제다. 그녀는 빼어난 외모에 늘 정장차림으로 게임에 임하는 단정한 매너, 어린 나이임에도 부산에서 큰 업소를 경영하는 이채로운 경력을 갖고 있다. 그녀는 2주일에 3~4일은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보내는 편인데, 특히 그녀의 탁월한 바카라 실력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VIP 회원 B씨는 “그녀는 ‘도신’으로 불린다”고 말했다. “그녀의 스타일은 게임중 거의 말을 하지 않으며, 무리하지 않고 꾸준히 수백만원씩 베팅하는 것이다. 그런데 판을 읽는 눈이 뛰어나 연전연승이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상당히 많은 액수의 돈을 따가기 때문에 딜러들 사이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통한다”(B씨).

    강원랜드의 VIP룸. 북새통을 이루는 일반 카지노와는 달리 내국인들이 제대로 카지노를 즐길 만한 유일한 곳이다. 강원랜드 부근에서 한식당 ‘남도회관’을 경영하는 조춘화씨는 “4~5명씩 팀을 이뤄 우리 가게를 단골로 찾는 VIP들이 50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카지노장에서 처음 만났으면서도 VIP들은 금세 친해져 서로 ‘형님’ ‘동생’이라고 부른다. 카지노는 친구를 만들어 주는 곳이다”(조씨).

    VIP룸을 ‘사교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은 카지노의 설립 취지에도 부합하는 순기능임이 틀림없다. 강원랜드 김광식 대표이사는 “카지노는 부의 재분배를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공기업’ 강원랜드는 257억원을 국세로, 141억원은 관광진흥기금과 폐광지역개발기금으로, 50억원은 지방세로 납부했다. 부유층들이 강원랜드에서 돈을 쓰는 것은 사실상 세금을 더 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이 회사 이인평 영업본부장은 “강원랜드는 상류층의 음성적 ‘해외 카지노 여행’을 줄여 국부 유출을 막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거액의 도박 게임이 공기업 영업장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할까. 논란의 핵심은 카지노 게임에 걸린 돈의 규모다. 서민들은 2분짜리 게임 한 판에 수천만원이 오가는 것을 보며 위화감을 느낄지 모른다. 경찰은 지금도 억대 ‘도리쥐꼬땡’ 도박단을 잡아들여 엄벌에 처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은 판돈이 굴러다니는 유사 도박판을 정부 스스로 열어주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윤철한 경실련 간사는 “강원랜드의 VIP룸은 우리 사회의 가치판단에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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