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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고

'임기 말 DJ 구상' 송두리째 흔들 … 3당 연합 효과·경제 회생·김정일 답방 등 모두 불확실

  • < 조용준 기자 abraxas@donga.com >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고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고
‘백약이 무효다.’

지난 4월26일 7곳의 기초단체장 재-보선에서 네 곳에 후보를 낸 민주당이 단 한 곳도 건지지 못하고 전패한 다음날, 동교동계의 한 중진의원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가장 기초적인 신뢰부터 무너졌다. 국민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서는 선거든 무슨 일이든 될 수가 없다. 온갖 구호 이전에 국민에게 진실한 감동을 주지 못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의원의 말에서는 3당 정책연합이나 강한 여당-정부-대통령의 ‘강-강-강 기조’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강한 비판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입을 닫았다. 해답은 있지만 말하기가 어렵다는 듯한 답답한 표정이었다. 그가 답답해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 말 통치 구상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김대통령은 △민주-자민련-민국당 3당 연합의 의회 다수세력을 통한 힘의 우위 확보 △김정일 서울 답방을 통한 남북 화해-교류 분위기의 극대화 △상반기 경기부양책을 통한 경제 활성화 △한때 흐트러진 동교동계의 정치적 역량 극대화로 대선 예비주자의 효율적 관리 등을 통해 흔들리기 쉬운 임기 말의 정국을 운용하려 한 듯하다. 위에 적시한 사항만 잘 진행할 수 있다면 레임덕을 방지함과 동시에 재집권을 효율적으로 도모할 수 있다는 정권 말기 관리전략인 셈.



그러나 위의 네 가지 사항 중 어느 것 하나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요즘 여권이 처한 상황이다. 여권 핵심의 기대와 달리 정국은 점점 김대통령의 레임덕이 가시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지적도 나온다.

먼저 3당 정책연합만 해도 그렇다. “한나라당 포위를 위한 지역연합”이라는 비판적 견해가 있음에도 3당 정책연합이 나름대로의 명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개혁입법 처리를 위해서는 의회 과반수가 필요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김대통령은 지난 4월9일 임시국회에서 “이번 임시국회(4월)에 국가 미래와 관련한 중요한 안건들을 상정했는데 이렇게 중요한 법안들이 해를 넘기고 있어 국민에게 실망을 준다”며 “각 장관들이 책임을 지고 약사법, 인권법, 반부패기본법, 돈세탁방지법, 국회법 등이 통과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독려했다.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고
지난 4월25일 3당 지도부가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첫 국정협의회를 갖고 돈세탁방지법, 반부패기본법, 인권법 등 개혁입법을 이번 임시국회(4월)에서 표결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처리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 이날 3당 지도부는 “국민에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이 정치와 정부에 신뢰를 보낼 수 있게 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국민에게 필요한 법안과 정책 중 처리할 것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개혁입법은 ‘금배지들의 집단이기주의’로 인해 원래의 명분이 크게 퇴색한 지 이미 오래다. 개혁 3법에 대해서는 국회 법사위 소속 민주당 조순형 천정배 의원이 자당의 법안 내용에 “개혁 후퇴”라며 크게 반발하고, 여야의 ‘담합’을 공개 비판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인권법 또한 시민단체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사탕발림이나, 전시행정용으로 여야가 타협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총무회담에서 돈세탁방지법에 합의했던 한나라당은 소속 의원들의 반발에 따라 “없던 일로 해달라”고 번복하며 법안 처리에 반대하고 나섰다. 3당 정책연합을 통해 강행 처리한다면 실력 저지에 나서겠다는 것이 한나라당의 입장. 따라서 개혁 3법의 입법은 또다시 물건너가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다. 여야가 다시 격돌하고 사안이 5월국회로 넘어간다면 거듭한 국회 파행 속에서 언제 입법할 지 모르는 것. 결국 한나라당이 ‘강경 저항’을 지속하는 한 3당 정책연합으로 인한 ‘힘의 우위’도 무력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3당 정책연합은 민주당 소속의원들에게 미친 부정적 영향도 적지 않다. 이한동 총리-민주당 김중권 대표-자민련 김종호 대표권한 대행-민국당 김윤환 대표 등이 모두 5, 6공 민정당 출신인 데 따른 당의 정체성 문제가 제기된 것.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 사이에서는 “5공 멤버들이 모두 모여 사진을 찍는 것이 민심 장악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이러다가는 전통적 지지층마저 다 떨어져나간다”는 비판론이 적지 않다. 심지어 “민정당 출신 수뇌부들끼리 모여 무슨 개혁입법을 하겠다는 거냐”는 거친 목소리도 튀어나온다. 결국 3당 연합이 당 역량을 결집하는 대신 이완하는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애초의 우려가 현실화하는 대목이다.

김정일 답방문제도 마찬가지다.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JP)는 지난 4월20일 기자간담회에서 “북한 내부 사정이 복잡한 것 같다”며 “김국방위원장이 (서울에) 와서 주고 얻어갈 것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JP는 또한 “최근 김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이 취소된 것처럼 서울 답방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김정일의 서울 답방이 어렵다는 것은 비단 JP만의 전망이 아니다. 외교가에서는 상반기 답방은커녕 연내 답방도 쉽지 않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외교가의 한 소식통은 “미국 CIA는 결국 김정일이 서울에 오지 못할 것으로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북한의 예측 불가능성으로 볼 때 김정일의 결심 여하에 따라 답방은 언제든 성사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권에서도 김정일의 서울 답방이 가져올 정치적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 순전히 남북 화해와 교류-협력 차원에서만 보면 어떻게 해서든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성사시키는 것이 바람직하고, 한반도 평화선언을 채택한다면 그것 자체가 커다란 역사적 진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들이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데에서 여당에 유리한 정국 구도를 만들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 여권 일각의 시각이다. 오히려 김정일 답방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야당에 발목을 잡히는 역풍을 맞고 선거전에 악용당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다만 여권 일각의 이런 진단이 ‘햇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는 것은 김정일 답방과 한반도 평화선언에 대한 김대통령의 의지가 너무 강하기 때문. 누구도 드러내놓고 이런 얘기를 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같은 ‘김정일 답방 무용론’에는 경제상황의 악화가 가장 큰 배경이 된다. 이와 관련해 여권 핵심에 정통한 한 정치학자는 “김대통령은 지난 2월까지 4대 개혁을 마무리하고, 그 다음에 다시 남북문제로 정책 중심을 옮기려 했지만 그것은 커다란 패착이었다. 경제문제를 다잡지 못하는 한 남북문제는 현 정부에 짐만 될 뿐”이라고 경고한다. 남북 화해 및 교류가 활성화해야 한다는 이성적 판단은 ‘먹고 살기 힘들다’는 감성적 판단에 언제든지 밀리게 마련이라는 것. 지난 4·26 재보선 서울 은평구청장 선거에서 패배한 민주당 이석형 후보도 “사람들에게서 ‘서민을 위한 정당이 아니라 서민을 괴롭히는 정당’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가장 가슴이 아팠다”고 말한다.

결국 김대통령의 집권 3년 반의 정책은 평범한 보통시민들의 감성적 요구보다는 국제적-대외적 명분과 논리에 더 충실한 이성적 접근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의약분업이나 교육개혁의 실패 또한 서민들이 살을 부대끼는 ‘진짜 시장’의 논리보다 ‘교과서적 시장’ 논리를 맹신한 관료들의 보고를 신임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국민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김대통령의 ‘의지’가 심각한 민심 이반현상을 자초했다는 얘기다.

김대통령과 민주당은 과연 현재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 초선 의원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던졌다.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





주간동아 2001.05.10 283호 (p20~21)

< 조용준 기자 abraxas@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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