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1

2001.04.26

70~90년대 관통한 ‘58년 개띠’ 자화상

  •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

    입력2005-03-02 1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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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90년대 관통한 ‘58년 개띠’ 자화상
    어느 봄날이다. 한 지방도시의 남자고등학교 교실에서 막 3교시 수업이 끝났다.”이렇게 시작된 은희경의 장편소설 ‘마이너리그’는 초장부터 영화 ‘친구’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하지만 혹시 영화의 인기에 편승한 아류가 아닐까 의심할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1998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중편을 장편으로 고쳐 쓴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70년대 중반 고등학교에 다니는 58년 개띠 동창생 4명. 소설 속의 네 친구는 김형준, 배승주, 장두환, 조국이다. 먼저 소설 속 화자(話者)인 김형준을 보자. 지방도시 목욕탕 집 신동인 그는 늘 책을, 그것도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같은 고상한 책을 끼고 다닌다. 하지만 진짜 책벌레나 진짜 똑똑한 놈들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입가에 애써 ‘시니컬한’ 주름을 만들어 가며 거만을 떠는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은 배승주. 그저 잘생겼을 뿐인 인간이다. 어머니를 졸라 날마다 주름 잡힌 교복바지를 입고, 누나의 샴푸와 스킨로션을 훔쳐 발라 다듬은 얼굴은 여학생들에게 단연 인기다. 여학교 펜팔부의 꽃인 소희의 관심을 가장 먼저 끄는 것도 승주였다. 물론 어이없게도 두환에게 가로채기를 당하지만.

    장두환. 가슴팍이 판자를 넣은 것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학교에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복도에 내놓은 다리 한 짝을 맹렬히 떠는 것밖에 없다. 그런 그가 펜팔 전시회를 하루 앞두고 소희와 야반도주한 사건은 나머지 세 사람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지막으로 성은 조이고 이름은 국인 조국. 네모난 얼굴에 두꺼운 목, 땅딸한 외모가 특징인 그는 떠벌이인데다 어디서나 좌충우돌하는 성격으로 끊임없이 사건을 만드는 역할이다.



    이 영화 같은 소설에는 4명 외에 주연급 조연도 있다. 별명이 꼬마 병정인 김부식은 악바리 근성으로 일류대 진학에 성공하고 해병대 제대 후 사회부 기자로 악명을 날린다. 87년 개띠들이 서른 살에 접어들었을 때 소희와 도망갔던 두환의 행방을 찾아낸 것도 김부식이다.

    형준, 승주, 두환, 조국은 어느 날 물리숙제를 해오지 않은 죄로 기합을 받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드렁칡 같다 해서 ‘만수산 4인방’으로 불린다. ‘조국이나 승주 같은 이류들과 한통속이 될 생각이 애초에 없던’ 나(형준)의 ‘마이너리그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소림사 18동인’, 해외 펜팔, 긴급조치 9호, 학도호국단 연대장, 월남패망, ‘사랑의 스잔나’, 문예반, 임예진과 ‘진짜 진짜 좋아해’, 대통령 유고 등 이런 어휘들과 함께 70년대가 지나가고 대학생활과 신병훈련, 광주민주화운동과 재일교포간첩사건을 지나 어느새 80년대 초-중반을 훌쩍 건너뛰고 나면 87년 서른 살에 접어든 4인방이 등장한다.

    별로 유능하지 않은 카피라이터가 된 나(형준)와 이름뿐인 사진작가 조수 조국, 몇 달 동안 책 한 권 내지 못하는 작은 출판사에 다니는 승주, 꼬치장사를 하다 어이없는 졸음운전으로 소희를 죽게 한 뒤 4인방에 합류한 두환까지 그들의 변함없는 이류인생이 계속된다.

    이후 이들의 인생행로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시시콜콜하게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마이너리그’는 결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속도감이 붙는 그런 소설은 아니다.

    문학평론가 황종연 교수(동국대 국문학)는 평론집 ‘비루한 것의 카니발’에서 은희경씨의 ‘새의 선물’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90년대에 나온 장편소설 가운데 ‘새의 선물’만큼 소설의 재미를 흠뻑 선사하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소박한 의미에서의 오락을 기대하는 독자들은 물론, 인간 경험의 심오한 표상을 바라는 독자들도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일화나 장면을 작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특히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일화나 장면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이너리그’도 ‘새의 선물’의 연장선상에 있다. ‘마이너리그’에는 58년 개띠생들과 그 언저리에 태어난 세대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교련실기대회-총검술 16개 동작과 각개 전투, 국군도수체조로 기억되는-를 완벽하게 복원한다. 70~90년대에 이르는 각 시대적 코드들을 은희경씨만큼 치밀하게 복원해 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는 작가도 드물다.

    이처럼 시대적 배경을 입히는 탁월한 솜씨와 스스로를 대입해 보고 싶어지는 보통사람의 캐릭터 창조, 웃음이 섞인 통렬한 사회비판까지 은희경씨의 작가적 역량은 ‘마이너리그’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굳이 아쉬움이 있다면 뭇 남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소희가 왜 갑작스레 두환과 야반도주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또 남학생들의 첫사랑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소희는 꼭 죽어야만 했을까. 수줍던 갈래머리 소녀가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어 나타나는 쪽이 훨씬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창작과비평사 펴냄/ 252쪽/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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