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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한국의 ‘신귀족’

무형의 인프라 ‘노블레스 오블리제’

국가 운명 성쇠 좌우할 중요한 자산… 특권 걸맞은 자율적 도덕률, 사회 지도층의 책무

무형의 인프라 ‘노블레스 오블리제’

무형의 인프라 ‘노블레스 오블리제’
우리 사회가 상류층에게 던지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불행한 일이지만, 대다수 국민에게 그들은 존경의 대상이라기보다 ‘냉소받는’ 존재로 비쳐질 때가 더 많다. 그들만의 막강한 ‘무기’(돈)를 동원해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고 자녀를 대학에 부정입학시킨 따위의 행위를 종종 저지른 탓도 크다. 사회복지를 위한 기부금엔 인색하면서도 정치인에게 뒷돈을 대주려 비자금 조성에 열심이었거나, 2세에게 막대한 재산과 큰 기업을 물려주려 구린 짓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국가의 위기 중 사회 지도층의 타락만큼 큰 위기는 또 없다. 대제국 로마도,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도 그런 위기를 당해 쓰러졌다. 세계 최대 영토를 자랑하던 공산 블록도 마찬가지다. 구소련엔 당 간부와 행정관료, 공공기관 간부들로 이뤄진 ‘노멘클라투라’란 신귀족이 있었고, 이들은 높은 봉급에 고급 아파트와 별장을 소유하는 등 선진 자본주의사회의 상류층 못지않은 풍요를 구가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란 귀족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그 무엇’을 말한다. 특권을 누리는 만큼 그렇지 못한 다수를 위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뜻이다. 사회와 법이 강제해서가 아니라 귀족 스스로 그들의 명예와 입지를 세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부과한 자율적 도덕률인 것이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비단 특정계층의 명예 고양과 입지 고수 차원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운명과 성쇠를 가름할 정도로 중요한, 없어선 안 될 무형의 사회 인프라이다. 얼마 전 아시아 최대 허브 공항인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했다. 우리의 유형적 사회 인프라는 이렇듯 자랑할 만한 수준이지만, 무형의 사회 인프라는 그에 비해 너무도 빈약한 형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더욱 그렇다. 어찌 보면 경제위기보다 더 위중한 도덕적 위기일 수 있고, 그래서 더 위태롭다.

지금부터라도 위기를 바로 볼 필요가 있다.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은 ‘같잖은 귀족’이 일부 존재한다고 해서 ‘귀족’ 전체를 부정해 버리면 자칫 ‘같잖은’ 행태만 남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어떠해야 할까. 선진국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떳떳한 귀족’이 우리에겐 전혀 없었던가. 잘 알다시피, 유한양행의 창업주 고(故) 유일한 박사는 1968년 세무사찰을 받은 뒤 세금을 추징당하는 대신 국세청에서 ‘국세청 선정 모범 납부사업체’라고 쓰인 동으로 만든 현판을 받았다. 3년 뒤 타계와 동시에 자신이 소유한 기업 주식 14만 주를 사회에 기증한 그가 가족에게 남긴 건 딸에게 물려준 대지 5000평과 손녀의 학자금 1만 달러가 전부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갖추려면 부유층 스스로 이런 사표(師表)를 좇는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고 마냥 그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만도 없다. 국가 발전의 필수 덕목인 만큼 국가가 챙겨야 할 부분도 많고 크다. 그러나 근래 우리 정권은 상류층을 사회의 적으로 돌리는 듯한 경향을 보여왔다. YS의 문민정부는 ‘가진 자들이 고통받을 것임’을 대통령 취임사를 통해 선언했고, 안타깝지만 국민의 정부에서도 이런 기조에 큰 변화의 조짐이 없는 게 현실이다.

정책의 지향이 아래를 향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정당한 것만은 아니다. 아래를 감싸안으면서 위로도 통하는 사회가 선진 자본주의가 지향할 공동체이다. 정부는 영세계층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복지 인프라 구축에 힘쓰면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제란 또 다른 인프라를 닦는 데도 한몫을 해야 한다. 부자들이 생색낼 수 있게, 속된 말로 ‘돈 내고 방귀 뀔 수 있게’ 해줌으로써 다른 소외된 계층의 생존까지 도모하는 윈-윈(win-win) 전략이 긴요한 것이다.



주간동아 2001.04.26 281호 (p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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