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4

2001.03.08

양촌리, 그곳에서 살고 싶다

  • < 신을진 기자 happyend@donga.com >

    입력2005-02-15 16: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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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촌리, 그곳에서 살고 싶다
    ‘양촌리’라는 마을이 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 다 아는 마을. 그런데 이곳은 행정구역상 실재하는 마을이 아니다. 한국인의 마음 속에 돌아가고픈 고향으로 깊이 자리잡고 있는 마을. 이곳에 가면 금동이가 있고, 일용 엄니도 있고, 인자한 김회장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쯧쯧, 영감 하나는 갔나베.” 일요일 아침, ‘전원일기’를 보던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찬다. 엑스트라로 나오는 세 명의 동네 할아버지 중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옆에 있던 손자가 “저거 다 가짜예요”라고 한마디 하자, 할머니는 “무슨 소리!” 하며 버럭 화를 낸다.

    언젠가 탤런트 김수미씨는 “이제 좀 그만 하고 싶은데, 노인 시청자분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 일용 엄니 죽었다고 하면 아마 난리가 날 거야”라고 말했다. 노인들은 친구가 세상을 떠나면 너무 상심이 커서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는다는데, ‘전원일기’의 김회장 부부나 일용 엄니는 그들에게 바로 가족이고 친구 같은 존재란 얘기다.

    한국 TV 방송 사상 최장수 드라마인 ‘전원일기’가 오는 3월4일로 방송 1000회를 맞는다. 80년 10월21일 첫 방송을 시작한 지 21년째.

    점차 도시화하는 농촌에서 전통적인 대가족제도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 김회장댁을 중심으로 가족과 이웃 간의 사랑과 따뜻한 인간미를 잔잔하게 그려가는 이 농촌일기는 지금도 17∼18%의 비교적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시청률 조사가 서울 부산 등 대도시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도시인들도 이 드라마를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장년층 이상이 고정 시청자지만 부모님과 함께 보는 젊은 시청자들도 적잖아, 일요일 아침에 온가족이 함께 보는 가족드라마이자 국민드라마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강산이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뀌었을 속도의 시대에 ‘느림의 미학’으로 승부하는 이 드라마의 존재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빠른 것은 망각되고 느린 것은 기억된다’(밀란 쿤데라)고 했던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전원일기’에도 사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애초에 ‘전원일기’는 농촌에서 살며 수필을 쓰고 있는 ‘김성재’라는 실제 인물의 사례를 모델로 해 ‘농촌수상드라마’라는 표제로 출발했다. 당시의 기획 의도는 농업 상식을 가르치거나 가족 정서와 윤리를 확고히 하려는 계몽적 성격이 짙었으나 점차 우리네 삶에 대한 진솔하고 잔잔한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인 한국인의 정서를 일상 생활 속에 그리게 되었다.

    그동안 13명의 연출자와 10여명의 작가들이 ‘전원일기’를 거쳐갔다. 차범석 김정수 김진숙 박예랑 등이 이 드라마를 통해 걸출한 스타 작가로 성장했다. 현재는 ‘베스트 극장’을 통해 등용된 신인작가들이 드라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양촌리’의 무대도 경기도 양주군에서 양평군과 충북 청원군 등을 거쳐 현재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조안리로 바뀌어 왔다.

    양촌리, 그곳에서 살고 싶다
    20년 세월이 어찌 순탄하기만 했겠는가. 시청률 부진으로 폐지 위기에 몰린 적도 여러 번이었고, 방송 횟수가 늘면서 “진부한 농촌 계몽 드라마로 전락했다” “농촌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이에 따라 드라마의 기본 골격을 대폭 손질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젊은 인물, 새로운 사고, 발전된 농법 등을 과감히 드라마의 소재로 흡수해 활력 있고 현실감 있는 드라마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제작진의 노력은 드라마를 다시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다. “농촌은 이제 도시인들의 향수나 채워주는 대상이 아니라 돌아가 살아야 할 이상적인 삶의 터전”이라는 것이 ‘전원일기’ 제작진들이 전하는 메시지다.

    ‘가부장적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함으로써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그리고 있는 남성 위주의 드라마’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다. 늘 밥상을 차리고 술상을 내오고 걸레질을 하는 양촌리 여자들과, 걸핏하면 냅다 소리지르거나 여자를 한 수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의 모습이 거부감을 자아내기도 했던 것. 이에 대해 권이상 PD는 “큰며느리, 일용 처, 복길 등의 성격을 강화해 사회 추세에 걸맞은 여성상을 그려나가려 하고 있다”고 말한다.

    몰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정애란 최불암 김혜자 김용건 고두심 유인촌 김수미 박은수 등 첫 방송 때부터 변함없이 출연하고 있는 연기자들은 ‘전원일기’ 금자탑의 일등 공신. “20년을 출연하다보니, 가끔 내가 연기를 하는 것인지, 배역이 실제 내 모습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고 말하는 연기자들은 빛나는 대사가 없어도, 한결같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드라마와 함께 늙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최불암과 김혜자를 실제 부부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전날까지 전원일기를 보셨습니다. 지금도 일요일 아침이면 온 가족이 이 프로를 기다립니다. 2000회까지 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 MBC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한 시청자의 글이다. ‘전원일기’의 첫회 방송 제목은 ‘박수칠 때 떠나라’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만큼은 오래오래 계속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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