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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이 나치의 협력자였다고?

‘유대인 살생부’ 작성에 결정적 역할 혐의로 법정에 … 사장 왓슨은 히틀러에게 훈장 받아

  • < 강여규/ 하이델베르크 통신원 kang@debitel.net>

IBM이 나치의 협력자였다고?

IBM이 나치의 협력자였다고?
“IBM은 독일 제3제국이 저지른 집단학살의 공범자였다.”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인 미국 IBM사가 뒤늦게 2차 세계대전의 ‘전범’으로 내몰리고 있다.

전쟁 중 유대인 강제노역에 동원됐던 올드리히 스트란스키와 5명의 유대계 체코인들은 2월 중순 IBM사의 전쟁 범죄 혐의를 담은 광범위한 기소장을 뉴욕의 지방법원에 제출했다. 이는 나치 정권에 협력해 노동자를 강제 고용했던 독일 기업들이 줄줄이 법정에 선 이후 외국계 회사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담당 변호사 하우스펠트는 배상문제 전문가로 지난해 나치 강제노동 배상문제와 관련해 독일정부 및 기업들과의 협상에 참가한 인물. 그와 소송 의뢰인들은 당시 미국의 IBM 본부도 독일지사의 상세한 영업보고를 통해 자사가 나치의 인종정책과 박해정책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집단 학살 공범자” 외국 업체론 처음

IBM이 나치의 협력자였다고?
IBM사가 받고 있는 전범의 혐의 내용은, 소송과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출간된 ‘IBM과 홀로코스트’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의 유대계 칼럼니스트인 저자 에드윈 블랙(Edwin Black)은 이 책에 대해 “전세계로부터 수집한 2만여 개의 기록자료를 가지고, IBM사가 독일지사를 통해 나치정권에 어떠한 기여와 협력을 했는지 소상히 밝혔다”고 자평했다. 이 문제가 안고 있는 폭발력을 증명하듯, 이 책은 8개 언어로 출간되어 25개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나치 정권 시절 IBM사는 독일에 지사를 설립하고, 데이터의 자동처리기인 이른바 홀러리트 구멍카드(펀치카드) 처리기를 생산-관리해왔다. 독일계 미국인 홀러리트(Hollerith)에 의해 고안된 구멍카드 정보처리시스템은 컴퓨터의 전단계로, 20세기 전반기에 정보처리를 자동화 단계로 끌어올리며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독일지사는 이후 IBM사 전체 판매액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한다.

1930년대 히틀러가 등장해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무렵, 독일에서는 정보의 자동처리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홀러리트 기계가 단지 수를 세는 정도가 아니라 데이터를 분석하고 가공할 수 있는, 즉 정보를 ‘관리’할 수 있다는 장점을 파악한 나치 정권은 인구정책의 모든 분야에 이 시스템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독일 홀러리트 기계회사(Dehomag), 즉 IBM 독일지사의 기술자와 당시 이 회사의 최대 고객이었던 나치정권은 손으로 작성된 등록서류가 구멍카드 기계에서 처리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낸다. 전쟁 준비의 첫 시작인 인구조사를 위한 것이었다. 이후 독일 내의 모든 자료는 홀러리트 시스템의 기술적 처리에 부응하도록 작성되어야 했으며 IBM 독일지사는 구멍카드 처리기에 알맞은 서류 작성방법을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독일 관리들에게 독일인의 개별 특징을 어떤 영역에 어떻게 세분해 기록하면 되는지에 대한 교본이었던 셈.

인구조사 업무를 위탁받은 IBM 독일지사는 1939년 5월 75만명의 인구 조사원을 고용한다. 이들의 대부분은 자발적 지원자들이었다. 한 달 정도의 집중훈련을 받은 이들은 5∼7명 단위로 독일 전역에 퍼져 열성적 활동을 시작했다. 히틀러 정권은 경찰과 근위 기병대에 총력을 기울여 이들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릴 만큼 인구조사에 열성적이었다. 이런 대대적 인구조사에 의해 나치정권은 당시 2200만의 독일 도시가구와 350만의 농가, 550만의 상점과 공장들을 거의 완벽하게 등록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문제는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 독일 전역의 가구조사였다. 이 조사를 통해 독일은 2550만에 달하는 가구를 개개인의 혈통과 인종에 따라 분류하는 데 성공했다. 가구마다 작성된 특별 보완카드에는 각 가구마다 호주 이름과 주소, 그리고 혈통의 계보를 밝혀 기록했다. 이 기록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히 ‘안보국’이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 배척과 노동착취, 그리고 1942년부터 기계적으로 진행된 유대인 몰살의 ‘살생부’(殺生簿) 역할을 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후 나치가 점령한 지역에는 어디에나 이 ‘홀러리트 시스템’이 가동됐다. 이는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을 색출해 집단수용소로 끌어가는 데 효율적이었을 뿐아니라 수감자 관리에도 유용했다. 이동하는 수감원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유일한 시스템 역할을 했던 것. 심지어 수감자들을 16개 카테고리로 분류해 특별한 학대방법이나 처형방법의 규정도 이 시스템에 의해 관리됐다. 수감자들은 이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고, 카드에 적힌 번호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IBM사는 나치가 자신들의 기계를 ‘범죄’에 사용하고 있음을 몰랐던 것일까. IBM사는 지금까지 나치의 기계 사용에 대한 자사의 책임을 부정해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독일지사의 홀러리트 시스템을 나치가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뿐”이라며 “홀로코스트(대학살)와 관련된 자사의 증거서류는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IBM과 홀로코스트’의 저자 에드윈 블랙의 조사는 오히려 그에 대한 답이 ‘정반대’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1940년의 예가 보여주듯, IBM사는 고객과 기계의 모델 이름이 적힌 목록표를 독일지사로부터 받았으며, 기계들이 운영되고 있는 독일 내 장소들을 잘 알고 있었다. 1941년 3월에 IBM사의 매니저 한 사람은 “유럽의 전쟁지역에서 독일 정부는 우리 기계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독일군은 현재 가능한 모든 목적에 이것을 사용하고 있다”고 전보를 치고 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1941년 이후 IBM 독일지사는 독일의 강제관리를 받게 된다. 1943년 나치는 심의회를 구성하고, 지사의 감독에 나섰다. 1943년 6월의 심의회 회의록에는 ‘IBM은 자신의 의무를 항상 충성스럽게 수행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들어 있다. 당시 심의회는 뉴욕 본사와의 대화상대로 SS(친위대) 여단장인 나치 열성당원 베젠마이어를 선택했다. 그는 1944년부터 부다페스트 주재 독일 공사로서 헝가리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한 장본인이었다. 종전 후 뉘른베르크의 전범재판에서 프랑스의 한 소송 의뢰인은 “강제수용소 ‘부헨발트’는 ‘홀러리트’를 위해 노동력을 공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IBM사의 이런 처세를 고운 눈으로 볼 리가 만무했다. 1940년 미국은 이미 당시 IBM 사장 왓슨(Watson)이 나치와 이데올로기-기술동맹을 맺고 있다며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고, 법무부의 각서에 의하면 IBM을 나치와 동일선상에까지 두고 있었다. 왓슨은 1937년 히틀러로부터 공로십자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제국의 몰락이 분명해지자 IBM은 신속하게 다른 표정을 짓는다. 이미 한쪽으로는 미국 정부와 협력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 멸망하는 독일제국의 기반구조가 ‘홀러리트’ 기술에 의존하고 있던 관계로 미국으로서는 그 기술이 아니고는 패전국 관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연합군의 대대적 폭격이 이루어지던 때에도 독일지사의 중앙 생산공장은 큰 피해를 받지 않았고, 종전 후 독일지사는 독일의 종업원에 의해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미국의 다른 기업들도 ‘홀로코스트’에 관련이 되었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원고측 하우스펠트 변호사는 미국 기업 중 전범재판이 IBM사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강력히 경고했다. 이제 IBM에 대한 소송은 IBM사뿐만 아니라 나치시절 독일에 지부를 두고 나치와 거래했던 다른 50여 개 미국 기업들에도 심리적 압박을 주고 있다. 반세기 이상 묻혀 있던 미국 기업들의 ‘양심불량’이 재판대 위에 줄줄이 오를 날이 머지 않은 듯하다.



주간동아 2001.03.08 274호 (p56~57)

< 강여규/ 하이델베르크 통신원 kang@deb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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