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3

2001.03.01

‘아르바이트’라는 이유만으로…

임금착취, 폭언, 폭행 등 부당노동행위 여전… 그나마 ‘일자리’ 구하기도 어려워

  •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5-02-14 14: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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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바이트’라는 이유만으로…
    김지영군(18·서울 노원구 상계동)은 지난 1월까지 중국음식점에서 석 달간 자장면 배달을 했다. 아파트 계단을 쉴새없이 오르내리면서도 월급날을 생각하면 행복했다. 한 달을 꼬박 채워 자장면을 배달한 김군의 손에 쥐어진 돈은 약속한 월급의 절반도 안 되는 25만원. 디지털카메라를 사려던 김군은 그 꿈을 접어야 했다. 오토바이 운전면허가 없어 단속에 걸리면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월급을 깎은 이유. 면허를 따면 제대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김군은 면허증까지 땄다.

    “그런데 면허를 땄다고 하니까 주인의 얼굴색이 변하더라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 게으르다는 이유로 쫓겨났어요. 면허 딴 것이 괘씸죄가 된 거죠.”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고 주인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매일 상소리를 들으며 지낸 석 달을 생각하면 김군은 지금도 잠을 설친다.

    ‘값싼 노동력’ 업주 횡포… 관계 당국에선 나 몰라라

    ‘아르바이트’라는 이유만으로…
    지난해 10월 명동의 한 음식점에서 음식을 나르던 윤모양(17)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윤양은 아르바이트를 함께 하던 친구들과 가게음식을 나눠먹고 식중독에 걸렸다. “5일 동안 결근한 뒤 찾아가 반달치 월급만 받고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당장 나가라는 거예요.”

    업주는 계약 기간 3개월을 채우지 못했으니 임금을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윤양은 식당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려 병원비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고 항의했지만 주인은 적반하장이었다. “일하기 싫어 모함하고 있다”며 주인이 쏟아내는 욕설에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청소년들의 소비문화는 크게 바뀌었지만 청소년들이 마음 편하게 일할 곳은 이처럼 턱없이 부족하다. 청소년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생각하고 있는 업주들의 횡포와 관계당국의 무관심은 일자리에 갈증을 느낀 일부 청소년들을 유흥업소로 내몰기도 한다.

    김모군(18)은 서울 수유동의 한 소주방에서 삐끼(호객꾼) 일을 하고 있다. 패스트푸드점 점원에서부터 비디오방 점원, 중국집 배달원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소주방 찾아요? 서비스로 안주 하나 더 나갑니다.” 지난 2월9일,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에도 김군은 부지런히 손님을 찾고 있었다.

    “패스트 푸드점에서 죽어라고 고생해봐야 땡전 한 푼 안 남아요. 차라리 여기가 속 편하죠.” 김군은 지난해 여름 대학생이라고 속이고 비디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월급 받기 이틀 전쯤 됐을 겁니다. 주인이 ‘왜 대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느냐’면서 당장 나가래요.” 김군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주인이 알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악덕 업주들은 그런 식으로 평생 돈 안 들이고 청소년들을 부려먹을 수 있다는 것이 김군의 설명이다.

    김군은 비디오방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편하고 쉬운 곳’에 취업하긴 몹시 힘들었다. 결국 김군이 일할 수 있는 곳은 유흥업소밖에 없었다. 김군은 “손님이 없어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며 을씨년스러운 거리로 발길을 돌렸다.

    이와 같은 실태는 설문조사에서도 확인된다. 2월15일 서울시 시정개발원이 발표한 ‘청소년 경제부분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학생 중 절반이 폭행을 당하거나 임금을 받지 못하는 등 피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아르바이트 참여 직종은 대부분 전단지-스티커 부착(48.7%)과 음식-신문배달(14.7%)이었고, 아르바이트 동기는 대부분 원하는 물건 구입(49.8%)과 친구와의 교제비(18.0%) 때문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학생의 절반은 부당한 대우나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부당 임금(19.2%)과 초과업무수당을 주지 않은 사례(12.4%)가 비교적 많았고 드물지만 성희롱-성폭력을 당한 사례도 있었다. 이 조사대상의 모집단은 서울에 있는 중-고교 총 39개 학교에 다니는 학생 1537명으로 그 가운데 중학생은 567명, 인문계고 669명, 실업계고 301명 등이었다(‘표’ 참조).

    이처럼 청소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고서도 그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은 고용주들이 법의 맹점을 악용하기 때문.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15세 미만 아동은 취업할 수 없고 15세 이상 18세 미만 청소년들은 부모의 동의서와 호적증명서를 제출해야 취업할 수 있다. 게다가 노래방, 비디오방 등 청소년 유해업소와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물건을 팔거나 대여해주고 있는 편의점, 음반판매점, 비디오 대여점 등에도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청소년들은 원칙적으로 취업할 수 없다.

    ‘아르바이트’라는 이유만으로…
    따지고 보면 가출 청소년들만큼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청소년을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만든 법 조항이 오히려 가출 청소년들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고 있다. 정식으로 취업을 하고 싶어도 부모의 동의서가 없기 때문이다. “가출 청소년들이 가장 먼저 구하는 일자리는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주유소나 게임방이에요. 비교적 돈을 많이 준다는 주유소도 한 달에 받는 돈은 실제 얼마 되지 않아요. 세를 얻어 사는 애들은 월세 내기도 버거울 겁니다. 집에 들어갈 용기도 없고 생활비가 떨어진 애들은 어쩔 수 없이 유흥업소에서 일하게 되는 거죠.” 가출 뒤 PC게임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임모양(18)의 말이다. 혼자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 가출 청소년들에게 일자리는 곧 생업이다. 임양도 처음 집을 나와서는 편의점, 옷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임양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그렇다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기는 싫었다. “1시간 일하고 1800원 벌어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런 일 배운다고 삶에 도움되는 것도 별로 없고….” 청소년들이 일할 곳이 많다면 시간당 2000원 정도에 함부로 고된 일을 시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임양의 생각이다.

    2월10일 새벽 5시30분 서울 상계동 한 주유소. 최모양(19)은 주유기를 잡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기름을 넣고 있었다. “힘들죠. 일하는 시간은 엄청나게 많고 받는 돈은 적고… 어른들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참기 힘들어요.” 기름 넣으러 온 손님들이 반말하고 불량 청소년 취급하는 것을 최양은 이해할 수 없다. “하루에 10시간 가까이 기름 냄새 맡으며 열심히 일하는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어요. 어른들의 인식만 바뀌어도 대우는 많이 달라질 거예요.” 최양은 전에 일하던 주유소에선 화장할 것을 강요받고 성희롱까지 당했지만 일을 하지 못하게 될까봐 아무런 말도 못했다고 했다.

    청소년들이 건전하지 못한 아르바이트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청소년들에게 일할 권리를 적극적으로 줘야 한다는 의견도 심심찮게 들린다. 한국인력개발원 박창남 책임연구원은 “청소년들의 아르바이트를 ‘불건전한 것’으로 규정해 열악한 청소년 노동환경을 방치할 것인지, 아니면 청소년들의 노동을 단순한 돈벌이가 아닌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며 “청소년들에게 자기계발을 하며 용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줘야 잘못된 아르바이트에 빠지는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하는 청소년 지원센터’의 이혜정 상담실장도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교육하고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며 “다양한 분야에 학생들이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학생들이 건강하지 못한 아르바이트로 유입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훈군(가명·17)은 서울의 한 직업체험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꿈을 키워가고 있다. 센터의 모든 활동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이 김군이 하는 일. 김군도 지난해엔 중국음식점에서 배달일을 했었다. “중국집에선 형들에게 맞고 돈 뺏기기가 일쑤였어요. 운전면허가 없어 월급도 30만원밖에 못 받는 데다 매일 구박당하고 욕먹으면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생활하기가 힘들었던 김군은 폭력조직의 심부름까지 했었다고 한다. 김군은 직업체험센터에서 카메라 다루는 법을 배우고 그곳에 일자리를 얻어 지난달부터 일을 시작했다. 특수효과 및 실험영상 전문가가 되겠다는 김군은 오는 3월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학교에 다니면서 돈도 벌고 기술도 배울 수 있어 행복하다”는 김군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미국 노동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미국 청소년들의 수는 1000만명에 이른다. 패스트 푸드점에서 접시를 닦아 시간 당 6, 7달러를 받는 청소년들도 있지만 인터넷 회사, 공공기관, 시민단체 등에서 다양한 직업의 세계를 체험하고 공공에 대한 희생정신과 일을 배우며 미래를 준비하는 학생들도 많다.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과 기회 제공은 다른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다(상자기사 참조).

    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의 전효관 부소장은 “선진국들처럼 기업체, 시민단체가 학생들을 위해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는 환경이 하루빨리 조성돼야 한다”며 “청소년들의 문화는 급격하게 변화했는데도 정부 정책은 과거의 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의 현실성 없는 정책을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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