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0

2001.02.08

‘단성사’가 있었네!

숱한 추억·애환 90여년간 한국 대표극장 군림… 2003년 17층 첨단 영화관으로 변신

  • 입력2005-03-16 14:4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단성사’가 있었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영화팬이라면 그 옛날 친구들과 종로거리를 누비며 영화관을 들락거리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할리우드 키드’들이 모여들고, 김두한을 비롯한 ‘주먹’과 ‘어깨’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던 종로의 풍경은 이제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극장의 개념도 달라졌다. 다양한 부대시설과 편의시설을 두루 갖춘 첨단 시설의 멀티플렉스 극장이 권역별로 들어서면서 이제 영화를 보기 위해 종로나 충무로로 젊은이들이 운집하던 풍경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극장 문화가 바뀌면서 ‘덩치 크고 불편한’ 옛날 극장들은 설자리를 잃고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그런 와중에도 단성사만큼은 종로 한복판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용케도 그 무심한 세월을 견디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단성사도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기 힘들었을까. 단성사가 올해 9월 철거되고 17층 규모의 멀티플렉스 ‘시네시티 단성사’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들어서게 된다는 소식은 올드팬들의 가슴을 왠지 허전하게 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인 단성사는 1907년 처음 세워진 이래 실로 한 세기를 풍미해온 한국근대사의 현장이다. 일제시대 식민지 백성의 애환과 울분을 달래주고 광복 후에는 전쟁과 가난으로 힘겹게 살아가던 이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안겨주던 곳이 바로 단성사다.

    일제 때도 우리말 공연 올려



    복개되기 훨씬 이전의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을 ‘북촌’, 일본인이 새로운 거리를 이루기 시작하던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주변을 ‘남촌’이라 했는데,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 등 세 곳이 북촌 극장의 얼굴들이었다.

    “충무로 쪽은 일본 사람들이 극장을 경영하면서 일본어로 공연했고, 종로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공연물이 올려졌어요.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신파극도 극장에서 공연했지요. 당시 신문을 보면 세 극장 중 어느 극장이 제일 좋은지 투표를 해서 결과를 실은 것도 있는데, 1등이 단성사예요.” 30년 넘게 단성사와 함께해온 조상림 상무는 옛날 신문에 난 자료들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단성사 자리는 옛날 의금부 자리로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순형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터가 센 곳이어서인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며 감회에 젖는다.

    오래된 극장인 만큼 단성사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원로급’ 직원이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 3층 영사실의 유영섭 실장(64) 역시 1955년부터 영사기사로 일하며 이곳에서 청춘을 다 보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일 안 하려고 해요. 휴일도 명절도 없이 밤낮 이 영사실에서 살았어요. 자칫 실수하면 불이 나거나 필름이 바뀌는 소동이 벌어질 수 있으니 영사기에서 떨어질 수가 없었죠.”

    영화에 매료돼 형들을 따라 부지런히 영화관을 들락거리다 영사기사로 취직되던 날은 그의 인생에 가장 감격스런 날이었다. 딱 한 번, 필름을 바꿔 끼는 실수를 했을 때는 오금이 다 저렸다는데, 그때 관객들은 ‘휘휘’ 휘파람을 불다 영화가 다시 시작되자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80년대까지는 1년에 120만∼130만명의 관객이 단성사를 찾았어요. 방화든 외화든, 단성사에 걸면 다 성공한다고 했으니까. 요즘은 젊은 관객들뿐이지만, 그땐 나이 드신 분들도 극장 나들이를 많이 했지요.”

    극장의 전기선 하나하나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만큼, 그가 지금 느끼는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동안 보수공사를 많이 했지만 계단 손잡이나 창문은 옛날 그대로인 것들이 있어요. 이제 다시 볼 수 없겠죠.”

    59년부터 영화 간판을 도맡아 그려온 백춘제씨(58)도 지금은 어엿한 기획사 사장님이다. 수많은 외화와 ‘겨울여자’ ‘어우동’ ‘장군의 아들’ ‘서편제’ 등 히트작들의 멋진 대형 간판으로 관객을 끌어 모으던 그는 새 영화관 건립과 함께 단성사와의 인연을 끝내게 됐다며 섭섭함을 감추지 못한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옛날에는 극장 간판 밑에 따로 베란다가 있어 밴드들이 하루 한 번씩 공연을 했다. 그 나팔소리는 서대문 밖까지 울려퍼져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고. 아동문학가 어효선씨는 “악사들의 연주가 옛날 국민학교 운동회 날처럼 흥겨웠다”고 그 시절을 회상한다.

    “춘사 나운규 20주기 추도 기념 작품인 장동휘 주연의 ‘아리랑’을 보기 위해 마포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 3가에 내려 단성사에 들어갔던 날의 감회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단성사의 휴게실을 돌면서 ‘지상에서 영원으로’ ‘노틀담의 꼽추’ 포스터에 매료되어 제일 늦게 극장 밖으로 나섰다.”(한국영화문화연구소 대표 정종화)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과 추억을 선사한 단성사가 사라져야만 하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성사를 운영하고 있는 신도필름측은 “단성사의 역사적 상징성을 그대로 살려 특성있는 멀티플렉스로 운영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건물의 옛 모습은 사라져도 새로 짓는 건물에 한국영화 기념관이라도 만들어 지난 세월을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영화팬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