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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이회창 “정국 주도책이 없다”

또다시 ‘생존’을 모색해야 할 국면… 정치 개혁 등 주창하며 여권 자충수 노릴 듯

  • < 조용준 기자 abraxas@donga.com >

고민하는 이회창 “정국 주도책이 없다”

고민하는 이회창 “정국 주도책이 없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열흘 동안의 칩거를 끝내고 1월29일 다시 가파른 정국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날 한나라당 천안연수원의 원내외위원장 연찬회에서 나온 이총재의 정국 해법은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그동안 말해왔던 ‘새로운 정치구상’이나 ‘결단’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이총재 측근들은 “1996년 정치권에 들어온 뒤 처음의 장고”라고 강조하면서 “안기부 자금 수사는 결국 ‘3김정치 부활’을 위한 기초공사 성격으로, 낡은 정치가 다시 연합해 우리 사회를 거꾸로 끌고 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에 이총재의 고민이 모아질 것”이라고 말해왔다.

29일 이총재가 제시한 ‘구상’은 대여투쟁과 민생 현안의 분리 대응으로 요약된다. 이총재는 이날 “국가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경제와 민생문제, 그리고 남북관계 등에 대해선 국회를 중심으로 총력을 기울여 대처할 것”이라며 “그러나 이 정권의 비열한 공작정치에 대해선 국민의 힘을 결집해 강력하게 분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이총재가 말해왔던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내용이다. ‘장기집권 음모’ ‘정치공작’ 등 이총재의 강조점도 전혀 새로울 게 없다.

고민하는 이회창 “정국 주도책이 없다”
사실 이총재의 이런 결말은 28일 이총재가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상도동 집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말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정국 현안을 타개할 해법의 첫 물꼬를 YS 방문으로 잡은 것부터가 ‘장고의 산물’로 보기에는 다소 의외로 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안기부 자금 파문으로 곤혹스런 입장에 몰린 이총재 입장에서는 YS와 함께 대여 투쟁 ‘연대 전선’을 형성하고, 동시에 ‘3김 연대 분위기’를 막을 필요성이 있다는 계산을 할 수는 있다. “이총재가 무슨 구상을 하는지에 따라 결말이 나는 국면이 아니다”(홍사덕 국회부의장) “무슨 수학등식처럼 풀릴 국면은 아니다”(하순봉 부총재)는 말처럼 그것 외에 별다른 뾰족한 해법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YS에게 머리를 굽히고 들어가 도움을 요청한 것은 결국 이총재의 정체성 문제로 귀결된다. 말로는 ‘3김정치 청산’을 외치면서 난처한 일이 생길 때마다 YS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는 비판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총재는 지난해 총선 당시에도 ‘돈 공천 파동’ 등으로 비판 여론이 일자 새벽에 상도동을 찾아갔다. 이번 역시 상도동에 언론 비공개를 요청한 것도 이같은 비판론을 의식한 듯하다.

그렇다고 YS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정작 한나라당과 이총재에게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YS 면담 이후 한나라당에서 ‘공동대응’ ‘화해 분위기’ 등의 설명이 나왔지만 YS의 대변인격인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은 29일 “도와달라는 이총재 말에 김 전 대통령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라”며 “이총재에 대해 흡족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라고 일침을 놓았다. 박의원은 또 “두분 사이 관계는 아직도 서로 서먹서먹하고 관계 개선도 (이총재) 기대만큼 되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총재가 민생과 대여투쟁의 분리 대응을 들고 나온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장외 강경 투쟁이 우리 당에 대한 지지도로 연결되지 않고 있어 곤혹스럽다”고 자주 말한다. 싸워도 국회 안에서 민생 현안을 처리하면서 싸우라는 것이 국민의 일반적 정서이기 때문에 강경 장외투쟁의 ‘약발’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것. 장기간의 장외 투쟁은 한나라당에도 커다란 부담이 된다는 얘기다.

결국 “이총재의 진짜 고민은 정국을 주도해 나갈 뚜렷한 방책이 없다는 데 있다”는 한 측근 인사의 실토가 현재 이총재가 처한 입장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이총재 또한 이런 고민을 주변에 여러 차례 토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총재의 고민은 1월28일 저녁 서울 강남의 한 한정식집에서 열린 미래연대(한나라당 소장 개혁파 인사들의 모임) 회원들과의 간담회에서도 드러났다. 이날 모임에는 김부겸 남경필 김영춘 의원 등 미래연대 소속 11명의 국회의원들이 참석했다. 이총재는 이 자리에서 “그동안 칩거하면서 여러 생각을 해봤는데 의연하게 정도를 걷는 것 외에 특별한 방책이 없는 것 같다”며 “여권이 어떤 구상을 갖고 있으며 한나라당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말해달라”며 의견을 구했다는 것.

이 자리에 참석한 한 초선의원은 “이총재가 아직 여권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그는 살아남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투쟁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총재실의 참모 A씨는 “이총재의 10일 칩거는 특별한 구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의원 꿔주기’와 ‘안기부 비자금 사건’에서 받은 충격이 꽤 컸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총재는 지난해 가을부터 ‘새해에는 상생의 정치를 선보이겠다’며 내부적으로 구상을 가다듬어 왔다. 그런데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이총재 구상은 완전히 헝클어졌다. 또다시 생존 자체를 모색해야 하는 국면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이총재는 과거와 같은 투쟁을 펼치는 것은 여권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때문에 새로운 투쟁 방법을 찾기에 고심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시시각각 자신을 옥죄어 오는 정국 상황에 대한 이총재 고유의 돌파책은 과연 없는 것일까. 한나라당 총재실 주변에서는 대략 세 가지 방향으로 이총재가 풀어놓을 보따리를 예측하고 있다. 이총재의 한 참모는 “이총재가 정치개혁을 앞서 주창하는 등 선수를 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권이 올 한 해 남북문제와 경기 부양책이라는 두 카드로 정국을 이끌려 한다고 보고 ‘정경분리 대응’ ‘강도 높은 정치개혁 주창’ 등을 통해 이를 정면 돌파한다는 것. 2월 초순으로 예정돼 있는 교섭단체 대표연설 등을 통해 이총재의 이런 구상이 조금씩 현실화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전언이다.

최근 들어 급속히 퍼진 ‘당직개편설’도 정국 해법의 가닥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새롭게 조성된 정치환경 속에서 새로운 진용을 짤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퍼지고 있는 것. 총재실 참모 B씨는 “총재는 아직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당직자들의 움직임에서 당직개편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며 “YS와의 관계 개선 등을 고려해 서청원 의원 등 민주계가 중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고 전했다.

‘비주류 및 소외 세력 끌어안기’도 이총재로서는 빼놓을 수 없는 사안. 이총재부터 여권의 정계재편 기도가 한나라당 일각을 허무는 ‘DJP+α’ 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는 만큼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여권에 그런 기회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 최근 들어 민주당 동교동계의 핵심인 한화갑 최고위원도 4년 중임제 및 정-부통령제 도입 개헌론을 강조하는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여권이 남북관계 등 돌발적인 카드를 갖고 개헌이나 정계개편 등을 추진할 것으로 보는 것이 이총재 생각이다. 총재실의 한 관계자는 “YS는 물론이고 박근혜 부총재나 김덕룡 의원 등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총재 캠프가 정작 기대하는 것은 여권의 ‘자충수’인 듯하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이대로 대선을 치르지는 않겠다는 여권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난 만큼 여야 관계는 정치적인 대결국면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며 “하반기에 들어가면 여권 내에서 여러 흐름들이 나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상반기를 잘 넘기면 또다시 국면을 반전시킬 수 있는 시기가 온다”는 기대감이 실린 관측이다.

한나라당은 그런 자충수가 여권 내 대권주자들 사이의 경쟁이 심화하면서 찾아올 것으로 본다. 그 경우 야당에 유리한 새로운 정치환경이 열릴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총재의 성격으로 볼 때 ‘이에는 이’라는 식의 정공법으로 대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주간동아 2001.02.08 270호 (p18~19)

< 조용준 기자 abraxas@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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