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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나? 캥거루족이야

“어른되기 너무 겁나요”

고슴도치 교육에 ‘피터팬증후군’ 만연…부모에 기대 독립하지 않고 ‘성장’ 거부

“어른되기 너무 겁나요”

IMF 외환위기로 나라가 들썩이던 97년 말, 1년 간 교환교수로 미국에 머물던 오욱환 교수(이화여대·교육학)는 유학생 사회의 어이없는 모습에 분노를 느끼며 동료교수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 와서 확인하고 놀란 사실은 대부분 학생들이 한국의 부모로부터 ‘생돈’을 송금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이며 여행경비, 심지어 유흥비까지 받는 고슴도치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 학생들의 아내들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한다는 얘기는 아직 한 번도 못 들었습니다. 물론 도서관에 붙박혀 공부하는 학생은 아무도 못 만났습니다.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한다는 녀석들이 일체의 유흥경비를 부모로부터 조달해 쓴다면, 도대체 그 학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들의 아내라는 한국 여자들은 세계에서 제일 편한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렇게 부모 품에 안겨 자라고 공부한 고슴도치들이 무슨 학문적 자존심을 갖겠으며, 자존심 없이 한 공부에 무슨 독창적 아이디어를 담아내겠습니까.”

오교수는 한국의 상황도 유학생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결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당연한데, 요즘 대학원생들은 돈 한푼 벌지 않으면서 쉽게 결혼하는 걸 보면 놀랍다”면서 늙은 고슴도치가 큰 고슴도치, 작은 고슴도치까지 부양하는 이상한 한국의 가족주의를 지적했다.

10년 동안 유학간 아들 내외의 뒷바라지를 하다 노후자금을 날린 것은 물론이고, 빚까지 져 생활이 어려워진 어느 은퇴 교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부모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오랜만에 아들 내외를 만나러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웃에 사는 미국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당신이 그댁 어머니냐? 우리는 어느 재벌집 아들인 줄 알았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들 내외는 집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공부하고, 손주들을 사립유치원에 보내는 등 넉넉하게 살고 있어서 주위에서는 재벌집 아들로 소문났다는 것이다.



사회 부적응, 멀쩡한 직장 그만두고 ‘컴백 홈’

IMF 시절 대학가에서 ‘캥거루족’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엄혹한 ‘취업 빙하기’를 비켜가기 위한 수단으로 휴학을 하든 대학원에 가든 가급적 학생 신분으로 남기 위해 발버둥치거나, 졸업 후에도 취업을 못한 채 계속 부모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신조어였다.

문제는 ‘캥거루족’이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장기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어른으로서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성장을 거부하며 ‘피터팬증후군’(Peter Pan Syndrome)을 보인다.

피터팬증후군은 육체적으로는 성숙했지만 여전히 어린아이로 남기 바라는 심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1983년 미국 심리학자 댄 카일러 박사가 ‘피터팬 신드롬’ 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했다. 카일러 박사는 1970년대 후반 미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성들의 정신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남녀에 관계없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자신감 부족, 무책임, 무기력증 같은 양상을 설명하는 데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피터팬증후군의 대표적인 행동양식이 졸업기피증이다. 요즘은 여학생도 4년 안에 대학을 졸업하는 경우가 드물 만큼 휴학이 보편화돼 있다. 올 상반기 교육부가 조사한 전국 161개 대학 166만6749명의 재학생 중 30.5%인 50만8647명이 휴학 중이었다. 물론 그 중 절반 이상이 군입대를 위한 휴학이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졌거나 외국유학, 연수 등을 이유로 한 일반휴학도 38.1%에 달했다. 부모로부터 학자금을 지원받지 못할 정도의 형편이 아니라면, 휴학을 한 뒤 취업에 필수라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하는 게 관례다. 물론 비용은 대부분 부모 부담. 휴학한 만큼 졸업이 늦어지니 부모에게는 이중고통이다.

또 뚜렷한 목표도 없이 전공을 바꿔가며 공부만 계속하는 ‘학위사냥꾼’들도 피터팬증후군을 의심해봐야 한다. 이들은 공부한다는 핑계로 모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유예기간을 늘려간다. ‘졸업하고 갈 데가 없으면 대학원 가면 되지’ ‘유학이나 가버릴까?’ 유학 가서도 쉽게 대학을 옮길 수 있는 점을 이용해 끊임없이 옮겨다니며 유학기간을 연장시킨다. 심지어 멀쩡하게 직장을 다니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때려치우고 ‘컴백 홈’을 선언하기도 한다.

“아들이 유학을 가겠다며 직장을 그만두고 처자식까지 데리고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어차피 같이 살 텐데 하루 빨리 합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요즘은 마음이 불편해요. 다 큰 자식이 부모 집에 얹혀 사는 모양새도 안 좋고, 며느리 용돈까지 신경써야 할 때는 왜 자식을 낳아 키우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은퇴할 나이에 자식 교육비, 손주 양육비까지 부담하게 된 김모씨(58)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막상 자식들은 경제력이 있는 부모로부터 지원받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며칠 뒤면 스물 여덟살이 된다는 하모씨의 신분은 미국 유학생. 선을 보기 위해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서른이 가까워오니 초조하죠. 미국에 있을 때 학비 빼고 매달 120만원 정도를 생활비로 송금받았는데 정말 빠듯해요. 호화판 유학생활 어쩌구 하는 것은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차피 한국에 있을 때도 용돈으로 그만큼 썼는데 미국에서는 공부까지 하잖아요. 부모님 부담은 마찬가지일 테고 아직 그 정도 경제능력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씨는 서른까지 유학생활을 계속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아니다 싶으면 당장 돌아올 수도 있다. 어차피 외국 경험을 쌓고 영어를 익히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셈이라고. 그러나 직업은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혼하면 미국에서 살 거냐고 물었더니 “기왕이면 아이도 미국에서 낳아 들어오겠다. 그렇게 되면 여자 쪽 부모님이 생활비를 보태주는 게 관례 아니냐?”고 되물었다. 하씨는 한국에 부모가 자신 명의로 분양받은 아파트 한 채가 있어 귀국하면 그것을 밑천삼아 장사라도 하면 된다고 말한다.

서울대 김모 교수는 몇 년 전 막내아들이 요구한 ‘대학 입학 선물’ 때문에 입이 벌어졌던 사건을 이야기한다.

“대뜸 70여만원짜리 아르마니 코트를 사달라는 거예요. 너무 놀라 ‘엄마는 그런 브랜드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학생인 네가 어떻게 값비싼 수입 옷을 입겠다는 거냐’고 야단쳤더니, 되레 ‘한국도 이제 그런 국수주의적인 생각으로는 안 된다, 싼 옷 다섯 벌 사는 비용으로 좋은 옷 한 벌 사는 게 더 가치가 있다, 친구들도 다 입는데 왜 안 되느냐’며 나름의 논리로 반박하더군요.”

김교수는 아들에게 시달리다 못해 결국 세일 기간에 코트를 사줬다며, 서울 강남지역에는 부모의 능력만 믿고 분에 넘치는 소비를 당연히 여기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사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즘 청소년들은 기본적으로 예전보다 돈이 많이 필요하다. 전에 없던 휴대전화요금, 인터넷 전용회선비, 게임방 비용이 매달 꼬박꼬박 들어가고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친구 생일선물 등 특별비용도 만만치 않다. 거기에 하고 싶은 일도 많아 컴퓨터나 외국어, 악기, 운동까지 남들만큼 하려면 월 20만~30만원도 모자랄 지경이다.

서울대 이순형 교수(소비자아동학)는 독립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 미국에서조차 캥거루족이 늘고 있다면서 “베이비 붐 세대(1943~1960)들은 정열적으로 일하며 스스로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했지만 X세대나 N세대로 불리는 신세대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부모가 이루어놓은 부를 함께 향유할 수 있었다”면서 “어릴 때부터 고급소비생활에 익숙한 신세대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을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에 독립 대신 부모 곁에 남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부모가 자식의 정신적 이유(離乳)를 방해하고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돈은 나중 일 ‘공부나 해라’ 부모들에 일차적인 책임

사실 대학생이 돼도 부모로부터 학비는 물론 용돈까지 받아 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어쩌다 고학하는 학생이 있으면 측은하게 여기는 분위기. 자라는 동안 돈 버는 법을 배울 기회도 없었고, 과외 아르바이트를 빼놓고는 마땅히 돈을 벌 만한 일도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하니 ‘어린 게 공부나 할 것이지 돈은 왜 벌어?’라며 어른들로부터 핀잔을 듣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돈을 버는 일보다 공부만 하기를 강요당하고 있어요.”(‘탈학교 모임’ 박경수)

경수군은 지난 8월 ‘유스페스티벌 2000’ 행사로 진행된 청소년노동포럼에서 “한국은 청소년들이 돈을 벌기에 너무 힘든 세상”이라고 토로해 그 자리에 모인 청소년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근로기준법상 18세 미만의 청소년에게는 원칙적으로 야간근무, 휴일근무를 시킬 수 없도록 돼 있다. 온종일 학교에 묶여 있어야만 하는 아이들이 이 법을 어기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는 무척 어렵다. 또 18세 미만 연소자는 그 연령을 증명하는 호적증명서와 친권자 또는 후견인의 동의서를 사업장에 비치해야 하는 등 규정이 복잡해 10대들의 일할 기회를 빼앗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들이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불법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저급한 임금)를 받고 있다고 김군은 주장했다.

리더십 영재교육원의 최창호 박사(심리학)는 아이를 독립시키는 방법으로 “일찍부터 돈을 가르치라”고 조언한다. 지금과 같은 성적 지상주의 교육은 고학력 룸펜을 키우기에 딱 맞다는 것이다.

“먹을거리를 스스로 구하고,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르쳐 줘야 해요. 일정한 나이가 된 후에도 일을 하지 않고 주위의 부양만 받게 되면 점차 무기력에 빠지는데 무기력의 끝은 망상이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망상환자가 됩니다.”

용인정신병원의 하지현 과장은 “피터팬 신드롬의 원인은 부모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 요즘 부모들은 자식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는 만큼 기대감도 크다. 심지어 대학생 자녀의 학점 때문에 교수를 찾아가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취업고사장에까지 부모가 기다리는 과잉보호가 만연해 있다. 이것은 거꾸로 자식 입장에서 보면 부모에게 돌려줄 것이 많다는 의미. 부모에 대한 부채감이 크면 클수록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지고 언제까지 보호받는 어린아이 상태로 남으려는 성향을 보이는데, 지나치면 정신병인 ‘우울증’으로 발전한다고 경고했다.

피터팬 신드롬의 공통점은 인생의 목표가 없다는 것. 최창호 박사는 중앙대와 강남대 심리학개론 수강생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가 그 결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응답자의 35%가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를 적어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나 마찬가집니다. 성장을 하려면 가족 이외의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들의 시야는 늘 가족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죠. 결국 부모에 대한 애착이 지나쳐 집착이 되면 피터팬신드롬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사회에 만연한 조기교육, 영재교육도 피터팬신드롬의 한 원인이다. 논술지도교사인 유용선씨는 조기교육이 실패에 대한 공포를 가르친다고 설명했다.

“조기교육은 항상 정답만 유도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은 정답이 따로 없는 질문에도 ‘이렇게 해도 되나요?’라고 되묻습니다. 틀린 답에 대한 공포를 너무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죠.”

부모가 판단하고, 정답을 찍어주는 데 익숙한 아이들은 정체감을 상실하거나 반대로 자신의 정체감을 너무 일찍 타인에 의해 ‘획득’한다. 즉 자신이 고민해보지도 않고 부모가 만들어놓은 정체성을 그대로 받아들여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흔히 ‘헛똑똑이’라고 하는 아이들이 이런 유형이다. 하지만 평소 좌절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사소한 실패에도 크게 좌절하며, 성공에 대한 집착과 부담이 스트레스를 일으켜 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과거지향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명지초등학교 이귀윤 교장은 “문제를 줘야 해결도 있다”면서 교육의 목표는 독립임을 강조했다. 문제는 독립에 이르기까지 잠깐의 혼란도 참지 못하는 부모들의 조급함이다.

“인간은 남에게 간섭받기 싫어하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자꾸 간섭을 하고 못하게 합니다. ‘그게 아니다’ ‘하지 말라’ 식 교육의 결과는 끝없는 의존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슴도치 부모가 결국 캥거루족을 길러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간동아 2000.11.23 260호 (p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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