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0

2000.11.23

북한이 원산항 개발에 나선 까닭…

일본과의 경협 대비 위한 중단기적 포석…클린턴 방북 등 미국엔 애정 공세

  • 입력2005-05-30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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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 원산항 개발에 나선 까닭…
    한동안 북한의 대외정책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이었다. 그러다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자 최근에는 주미종남(主美從南)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고 있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그보다는 연미경일(軟美硬日)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미국 대통령선거 투표일인 11월7일 북한 조선노동당의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의미심장한 논평을 실었다. ‘조미(朝美)관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원칙적 입장’이란 제목을 단 이 논평은 개인 명의로 된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언론매체가 앨 고어와 조지 W. 부시 중 누가 당선되는지에 따라 북미관계가 달라질 것이라고 점치는 상황에서 북한의 당기관지가 미 대통령선거 당일에 ‘원칙적 입장’을 밝힌 것은 의미가 크다.

    이 신문은 논평의 첫머리에서부터 “최근 조미관계에서 주목되는 긍정적 움직임들이 보이고 있다. 조미 사이에 전례없는 관계개선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두 나라 인민들의 지향과 이익, 현 국제관계 발전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며 역사의 흐름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신문은 특히 지난 10월 김정일 총비서의 메시지를 전달한 조명록 특사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나온 북미 공동성명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조미 공동콤뮤니케는 우리와 미국이 관계개선 입장을 확언한 역사적인 외교문건이다. 이것은 보도적 성격과 함께 국제법적 효력을 가진다. 이에 따라 조미 쌍방은 공동콤뮤니케를 리행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지금 국제사회도 조선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 발전을 주시하면서 조미관계가 하루빨리 정상화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우리도 같은 입장이다. 미국 인민들의 마음도 같을 것이다. 조미관계 개선은 두 나라 인민들의 염원과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다. 조미관계가 개선되면 그것은 두 나라에 다 이로울 뿐 아니라 조선반도와 아시아태평양지역, 나아가서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주권에 대한 호상 존중과 내정 불간섭의 원칙에 따라 조미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성의 있는 노력을 다할 것이다. 미국도 신의와 약속을 철저히 지켜야 하며 자기 할 바를 다해야 할 것이다.”

    북한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든 북미관계의 개선 의지를 천명한 역사적인 북미 공동성명을 이행할 터이니 미국도 신의를 지키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이 대통령 당선자를 확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11월10일자)가 ‘로동신문’의 위 논평을 근거로 “빌 클린턴 대통령이 퇴임 전 평양을 방문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전망한 것이다.



    이 신문은 11월7일자 ‘로동신문’ 논평을 근거로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회담(10월23∼24일)에 대해 “진전이 있었다”고 말한 점 △미 국무부가 콸라룸푸르 북미 미사일회담(11월1∼6일)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한 점 등을 들어 클린턴의 방북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이어 현재까지 미국 대선 결과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부시 후보가 당선돼도 미국의 대북정책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향후 북미 관계에 대해서도 “얼마간의 시차는 있겠지만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조미관계가 개선 쪽으로 나가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런 희망 섞인 관측은 미국 언론들이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부 정적인 예상을 내놓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구애의 표시’로 받아들일 만하다. 북미관계에 대한 이같은 낙관적 전망은 특히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북일수교 11차 본회담(10월30∼31일 베이징)에 대한 북한 언론의 ‘뻣뻣한 논조’와 대비된다.

    11차 본회담을 하루 앞두고 ‘로동신문’(10월29일자)은 ‘성근(誠勤)한 반성과 사죄를 떠난 관계개선이란 있을 수 없다’는 개인 명의의 논평에서 “일본은 세기 교체가 진행되는 역사의 이 시각까지도 … 과거 일제가 저지른 전대미문의 죄행에 대해 사죄를 똑똑히 하지 않고 있다”면서 “성근한 반성과 사죄를 떠난 신뢰와 관계개선이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또 ‘조선신보’(11월8일자)는 일본 정부의 대북 쌀 지원 결정과는 관계없이 북일 수교협상과는 분명한 선을 그음으로써, 미국 언론의 부정적인 전망에도 클린턴의 방북을 희망하는 북한의 태도와 대조를 보였다.

    “일본정부의 조선에 대한 50만t의 쌀 지원이 양국 관계 개선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도 곧 일본정부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조일회담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의 부당한 주장을 인정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다.”(조선신보)

    이 신문은 더 나아가 “일본 언론들이 ‘북조선은 그 어떤 양보도 하지 않는데 어째서 막대한 세금을 쓰고 지원해야 하는가’ 식의 억지주장을 늘어놓은 데 대해 스쳐 지나갈 수 없다”고 일침을 놓았다. 한국 정부는 값싼 태국산 쌀 60만t을 사서 지원하는데 왜 일본은 값비싼 국산미(1t당 23만엔)를 지원해 거액의 내외 가격차를 국민 부담으로 안기느냐는 일본 언론의 지적에 대한 반론이다.

    “50만t의 구성은 1995년산 18만t, 96년산 32만t이다. 이것들은 초고미(超古米)이며 그 일부는 이 이상 주식용으로 보존하는 것이 곤란하고 남으면 1t당 1만3000엔 이하의 가격으로 사료나 공업용으로 처분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때문에 50만t을 창고에 그냥 놔둬도 막대한 재정부담을 면치 못하는 쌀들이다. 이번의 쌀 지원은 일본의 과잉미를 처리하는 국내 대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처치 곤란한 쌀 좀 주면서 생색내지 말고, 특히 쌀을 고리로 수교협상에서 양보를 기대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이런 ‘뻣뻣한 태도’와는 별개로 북일관계 개선에 대비해 원산항 개발에 착수한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익명을 요구한 대북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한 관계자에 따르면, 북한 당국은 최근 원산항 개발을 위한 관련 자료를 제공하고 남한 기업에 의향을 타진했다. 북한 당국의 이같은 의향은 기자가 방북(10월14∼21일)했을 때 평양에서 만난 관계자들로부터도 확인되었다. 한 관계자는 북일 수교협상에서 배상금으로 100억달러를 청구한 사실과 함께 원산항 개발 의향을 확인해주었다. 더구나 원산항 개발 자본은,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서방의 한 다국적 민간펀드인 것으로 알려져 시선을 끈다.

    원산항 개발에는 적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원산항은 북한 해군이 1968년 당시 미 해군의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해 한 동안 예인해둔 북한의 대표적 군항이다. 또 북한의 잠수함 기지가 있는 곳이다. 또 원산항은 일본의 니가타항을 왕래하는 부정기 항로가 다니는 동해의 대표적 항구다. 따라서 북한의 원산항 개발 의향은 장기적으로는 원산항을 나진-선봉처럼 개방기지로 삼고, 중단기적으로는 북일수교 이후 일본과의 경제협력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최근 북한은 대남관계에서도 의미있는 메시지를 몇 차례 보내왔다. 우선 북한 적십자회는 장충식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월간조선’과의 인터뷰 기사에 대해 두 차례(11월3, 8일)나 경고성 항의성명을 내 남한 당국을 긴장시켰다. 남한 당국은 남북이 합의한 이산가족 2차 교환방문단 생사 확인자 명단교환(11월10일)과 교환방문(11월30일∼12월2일)이 예정대로 진행될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북측은 11월9일 뜻밖의 전화통지문을 보내와 이산가족 교환방문 성사 의지를 밝혔다.

    또 북한은 11월9일부터 평양에서 개최된 제2차 남북경협 실무접촉에서 투자보장, 이중과세 방지, 상사분쟁 조정절차, 청산결제 등 4개 분야에 대해 일괄 타결하고 합의서에 가서명함으로써 남북경협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남북한은 그동안 경제협력 원칙에 대해 합의한 적은 있지만 구체적인 경제활동에 대한 제도를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최근의 남북관계에 비추어 이러한 제도적 합의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북한의 메시지는 제2차 남북경협 실무회담 남측 대표단이 11월9일 “대북 식량차관의 투명한 배분을 확인하기 위해 평양 근처 식량창고 두세 곳을 남측 실사단이 방문토록 해달라”고 북한측에 공식 요청한 다음날 오후 북한 당국이 남측 실사단에 식량분배 현장(평양 모란봉구역 서흥식량공급소)을 공개한 것이다. 남측 정부가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부터 인도적 차원의 대북식량을 제공한 이후 북측이 남측 당국에 식량 분배현장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이를 “전반적으로 일정부분 궤도에 오른 남북관계의 기초 위에서 대미-대일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11월10일 서해대교 개통식에서 행한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은 이런 메시지에 대한 총론적인 화답의 성격이 짙다. 김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남북관계는 우리를 중심으로 해서 한-미-일의 굳건한 공조 속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구한말 이후 100년 만에 우리 문제를 우리 스스로 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한-미-일 3국의 공조에 의한 대북정책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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