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8

2000.11.09

뜨는 한국의 오타쿠, 지는 일본의 오타쿠

  • 입력2005-05-25 1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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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자존심이자 ‘오타쿠’의 대부로 통하는 오카다 토시오씨(42)의 책 ‘오타쿠(お宅)학 입문’이 드디어 국내에도 소개됐다. 일본에서 오타쿠들의 교과서로 통하는 이 책이 출판된 지 꼭 4년 만의 일.

    지난 4년은 한국과 일본의 오타쿠들에게 의미있는 시기였다. 그 사이 일본의 오타쿠 문화는 절정기를 지나 쇠퇴현상을 보인 반면, 존재 자체도 확인되지 않던 한국의 오타쿠들은 양지로 나와 한국 애니메이션계를 이끌 중추세력으로 떠올랐다.

    풍요 속에 자란 일본 젊은이들은 문화를 소비하려 할 뿐 스스로 생산하려 하지 않아 오타쿠적 열기는 상당히 식은 상태. 그러나 일본에 비해 누릴 수 있는 문화가 제한돼 있는 한국에서는 오타쿠들끼리 동호회를 조직하고 동인지를 만들며 인터넷 사이트나 각종 오프라인 행사를 여는 등 오타쿠 문화의 저변이 확대되는 추세여서 침체의 일본과 매우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21세기 문화의 지배자로 불리는 오타쿠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오카다씨는 70년대 일본 오타쿠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각 서클에는 ‘건담’의 대사를 전부 외우는 녀석, ‘루팡’에 등장하는 총기를 순서대로 암기하는 녀석들 정도는 아주 흔했다. 당시 긴키대학 SF연구회의 ‘산린’이라는 친구는 영화 ‘스타워즈’의 대사와 효과음, 배경음악까지 모두 외우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는 사운드트랙 LP를 레코드 홈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들어 ‘스타워즈’의 모든 소리를 아예 먹어버렸던 것이다. 그 친구는 연합 모임에서 자주 ‘스타워즈’를 암송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장장 121분(극장 상영시간과 완벽하게 똑같다!)이 걸리는 엄청난 공연이었다.”



    녹화 장비는 꿈도 꿀 수 없던 시절, 일본 오타쿠들은 TV방송 화면을 직접 사진으로 찍거나, 애니메이션 스태프 리스트를 공책에 깨알같이 옮겨 적고, TV 스피커에 마이크를 부착해 대사만이라도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80년대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불법으로 유통되는 일본 오타쿠 잡지를 수집하고, TV만화영화를 통째로 녹음해서 외우는 이들이 나타났다. 물론 오타쿠의 본고장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출판 만화나 게임 분야에서 나타나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오타쿠는 시각적·백과사전적·자기과시적 특징의 인간형

    보통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오타쿠란 이렇게 삶과는 무관한 일에 정력을 낭비하는 별난, 혹은 ‘정신 나간’ 녀석들이다. 그러나 오카다씨는 “획일적인 젊은이 문화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판단하는 조숙하고 지적인 집단”이라 정의했다. 그가 말하는 오타쿠의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TV 보급과 함께 태어나 영상에 대한 감수성을 크게 진화시킨 시각적 인간이며, 둘째 고도의 백과사전적 능력을 가졌고, 셋째 질리지 않는 향상심(向上心)과 자기과시 욕구를 지녔다.

    상당수 오타쿠들은 단순한 감상자에 머물지 않고 직접 크리에이터로 나서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적 인물이 천재 애니메이터 이타노 이치로(板野一郞·‘건담’ ‘마크로스플러스’를 그렸다)다. ‘이타노 서커스’란 말 그대로 그의 애니메이션은 서커스의 공중그네처럼 사각의 화면 속에서 카메라가 종횡무진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어린 시절 TV영화 ‘인조인간 키카이다’를 보며 오토바이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는 장면에 전율을 느꼈고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발사와 폭발 장면을 묘사할 수 있는지를 연구했다.

    이렇게 오타쿠들은 이제까지 누구도 그린 적이 없는 자기만의 영상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고, 이 힘을 바탕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은 세계 시장을 제압했다.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는 오타쿠들의 주요 이벤트 중 하나인 ‘원더 페스티벌’의 개최가 불투명해지자, 오타쿠 문화가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원더 페스티벌’은 매년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수작업 모형 전시-판매행사.

    오타쿠들은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나오는 미소녀나 로봇 등(‘프라모델’이라 부른다)을 손으로 제작해 이 행사에 들고 나와 판매하고 정보도 교환한다. 하지만 최근 몇년간 참가 오타쿠 수나 작품 수준이 계속 떨어지자 ‘원더 페스티벌’은 지난 8월 여름 대회를 끝으로 영원히 폐막됐다(시사 주간지 ‘아에라’는 최근호에서 ‘오타쿠의 비극’이라는 기사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에 대해 일본의 한 사회학자는 “오타쿠 문화를 주도한 것은 모든 것이 궁핍했던 전후세대들이다. 그들은 부족한 것은 스스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20대 전후의 신세대들은 더 이상 궁핍이란 것을 모르며 그래서 직접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않고 그냥 소비할 뿐”이라고 해석한다.

    문제는 오타쿠 열기가 식으면서 80년대 이후 세계 시장을 석권해온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기도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90년대 초반 ‘드래곤 볼’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의 인기와 최근 ‘포켓몬스터’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일본이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반면 오타쿠 문화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는 한국이 그 바통을 이어받으리라는 희망적 관측도 가능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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