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8

2000.11.09

무인가 감청장비에 짓밟히는 통신인권

검·경 등 3년간 353대 구매 ‘법적으론 이상무’…장비 사용 관련 정보공개도 안 돼

  • 입력2005-05-18 15: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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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인가 감청장비에 짓밟히는 통신인권
    올상반기 긴급감청 영장 청구 118건(99년 동기 대비 31.7% 증가)”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 이동전화 감청장비 국내 도입 가능성”(이상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 “5개 대형 이메일 서비스업체, 올 상반기 수사기관에 대한 통신자료 제공 476건(97년 중순∼99년 말 제공 건수 대비 2.4배 증가)”(한나라당 김진재 의원)

    지난해에 이어 10월초부터 야당 의원들에 의해 또다시 불거진 이같은 ‘감청’ 논란의 정점엔 ‘무인가 감청장비’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는 지난해 말 실시된 감사원의 불법 감청 특감 결과 이미 적발된 사항. 그러나 최근 정보통신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감자료를 통해 뒤늦게 드러난 ‘사실’이다.

    ‘주간동아’가 10월23일 김진재 의원으로부터 입수한 ‘감사원 감사결과서에 나타난 불법-부당한 감청 및 정보제공 실태’ 자료에 따르면 대검찰청과 경찰청, 국방부 법무운영단, 서울세관 등 국가기관이 지난 3년여간 구매한 무인가 유-무선 감청장비는 무려 353대. 96년 5월부터 99년 10월까지 모두 49차례에 걸쳐 구입한 이 장비들은 외국산으로 국내 오퍼상 등이 수입해 판매한 것들이다. 보안업체 관계자들조차 놀랄 정도로 엄청난 양이다.

    ‘영장 없는 감청’ 도구로 사용 우려

    ‘무인가’ 장비란 한마디로 불법 장비를 뜻한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이 정통부장관의 인가를 받지 않고 감청설비를 제조-수입-판매한 자에 대해 5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사원 지적에 따라 정통부는 현재 문제가 된 무인가 감청장비 판매업체들을 대상으로 관련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실상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통신비밀보호법은 이런 장비의 소지-사용 주체인 ‘국가기관’에 대해서는 전혀 인가를 받을 필요가 없도록 예외를 두고 있다. 구조적으로 국가기관은 감청장비 구입시 무인가임을 알든 모르든 그 어떤 경우에도 법적 책임을 면할 수 있게 돼 있는 것이다.

    “국가기관은 구매처인 민간기업이 인가를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할 의무가 없다. 또 국가기관이 조달청을 통하거나 직접 ‘수입자’가 돼 민간업체에 구매를 위탁할 경우엔 해당 업체(장비공급업자)도 인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 정통부 전파감리과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국가기관에는 검-경찰 등 수사기관은 물론 세관 등도 포함된다”고 덧붙였다. 결국 민간업자가 인가 없이 자체 생산하거나 수입한 장비를 판매할 때만 법적 제재를 받는 셈이다.

    지금껏 국내 도입된 수입 감청장비 중 인가를 받은 경우는 전무하다. 정통부에 따르면 지난 94년부터 99년 말까지 3개 국내업체가 자체 생산해 국방부와 경찰 등에 납품한 유선전화감청기 842대가 유일한 ‘인가’ 케이스다.

    법원 영장이 있어야 가능한 일반 통신감청의 제약을 넘어 국가기관들이 얼마든지 무인가 감청장비를 ‘합법적’으로 구입해 ‘자유롭게’ 감청할 수 있는 초법적인 여지를 남겨둔 것은 현행 법의 명백한 맹점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미 도입된 감청장비의 제원과 성능은 베일에 가려 있다. 정통부의 ‘무인가 감청장비 판매명세’ 자료에도 일부 모델명만 기록돼 있을 뿐 구체적인 사양은 모두 빠져 있다. 그러나 상당수 감청장비가 모양만 조금씩 다를 뿐 거의 대동소이한 외국산 고성능 장비란 점에서 그 특징을 추정해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현재 도입돼 있는 무인가 감청장비 중 가장 소형은 일명 ‘카드 송신기’로 불리는 초소형 송신기. 유선전화 또는 사무실 내에 설치해 통화내용이나 대화내용을 전파 형태로 쏘아 포착하는 장비로 신용카드 크기 정도. 50∼100m 떨어진 곳에서 감청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10∼100m 밖에서 실내의 통화 및 대화내용을 수신하는 수신기와 자동채록장비를 갖춘 고성능 송수신기, 전화가입회선을 따서 음성통화내용이나 전화번호, 통화시간 등을 수신해 녹음하는 휴대용 전화녹음기 등도 있다.

    또 특정한 팩스번호의 송수신 내용을 인터셉트하는 팩스감청 녹취시스템, 무선호출기에 찍힌 호출번호와 호출시각 등을 가로채 볼 수 있는 무선호출신호분석기, 여러 채널을 엿들을 수 있는 다채널 감청기 등도 무인가 상태에서 버젓이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려되는 것은 이들 무인가 장비가 언제든 ‘영장없는 감청’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인가된 감청장비에서도 문제점은 발견된다. 장비들이 언제 어떤 목적으로 사용됐고 또 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공개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감청장비의 모델명, 성능, 운영실태 등에 관한 구체적 정보는 해당기관만 갖고 있다.

    김진재 의원의 자료에 따르면 대검은 지난 94년부터 99년까지 모두 56대(40여억원 상당)의 감청장비를 J교역 등 3개 무역대리업자를 통해 외국에서 들여왔다. 이들 중엔 아날로그형 이동전화감청기가 8대나 있다. 이중 5대는 98년 이후 2억5500여만원을 들여 구매한 것. 물론 이 장비들은 수사기관이 조달청을 통해 구입한 것이므로 현행법상 ‘무인가’는 아니다.

    “이동전화감청기가 있는 건 사실이다. 물론 이 장비로 수사상 감청을 한 적도 있다.” 대검 관계자는 “그러나 아날로그 이동전화서비스가 올 1월 퇴출된 만큼 이 장비는 이미 무용지물이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감청장비에 관한 정보는 기밀사항이므로 더 이상은 알려줄 수 없다”며 말을 아꼈다. 이른바 권력을 가진 수사기관의 감청장비에 대한 정보 접근은 이렇듯 쉽지 않은 실정이다.

    지난 10월 중순 한나라당 인권위원회 소속 이주영 의원 등이 무인가 감청장비 실태 확인을 위해 검찰과 경찰에서 현장조사를 벌이려 했지만 이마저 ‘국가기관’들의 거절로 성사되지 않았다. 그나마 현재까진 감사원 특감 결과가 유일한 감청장비 실태조사일 뿐이다.

    다만 지난해 국감 당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디지털이동전화의 감청 가능성 논란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상태다.

    “디지털이동전화 통화내용 감청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무의미하다. 이동통신회사의 협조가 없어도 손쉽게 감청할 수 있는 장비가 이미 외국에선 시판되고 있다.” 민간 보안업체 한국기업보안㈜의 안교승 대표는 “일례로 미국 보안회사인 CCS사가 개발한 디지털이동전화 감청기는 대당 가격이 4억~5억원 가량”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이 감청기가 국내에 ‘존재’하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대검도 “구매 의사도 없고 구입할 예산조차 없다”며 이를 부인하고 있다.

    사실 각종 첨단범죄가 급증하는 마당에 수사상 필수적인 감청 자체를 나무라긴 힘들다. 그러나 이미 감청이 유-무선 전화 수준을 넘어 팩스, 이메일, PC통신, 인터넷폰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수사방법으로 확대된 만큼 감청 남용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과 의혹은 여전하다.

    “감청과 도청은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다. 기계적 원리도 동일하다. 결국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다.” 보안업체 ‘스파이존’의 이준희 부장은 “아무도 감청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현대사회에서 감청으로부터 자신을 완벽히 차단할 방법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도-감청 문제로 한창 시끄러웠던 지난해 9월 “정부기관의 불법 감청은 일절 용납돼선 안 되며, 합법적 감청도 가능하면 줄이고 법의 맹점이 있으면 즉각 시정조치를 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법의 맹점은 그대로 남아 있다. 지난 7월 최우선 개혁입법대상으로 선정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문제도 여야간 이견으로 표류중이다. 개인의 사생활과 통신비밀 보호를 위해 ‘통신 인권’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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