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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단독취재 평양 7박8일

열린 문틈, 바깥소식에 갈증

만나는 사람마다 남한에 대한 호기심…‘통일 강성대국’ 크나큰 기대와 열망

열린 문틈, 바깥소식에 갈증

열린 문틈, 바깥소식에 갈증
해외 어디를 가든 여행하려는 나라의 국적기를 타면 맨 먼저 접하는 것이 비행기 승무원이다. 북한의 국적기는 고려항공(전 조선민항)인데 베이징-평양을 오가는 비행기(TU-154B)에 탄 여성 승무원은 5명이었다. 서울-베이징을 오가는 제트여객기(보잉 747)에 견주면 단출한 식구다. 하긴 기내의 중앙통로를 중심으로 좌석이 앞뒤로 24열이고 좌우로 3개씩(일반석)뿐이니 승객수도 130명에 불과하다.

평양 시내를 가로지르는 대동강의 하중도인 양각도에 ‘양의 뿔’처럼 삼각형으로 높이 선 호텔이 양각도국제호텔이다. 아침은 대개 호텔에서 먹었는데 미국식 조찬으로 죽과 달걀 프라이를 곁들인 토스트, 그리고 커피가 나온다. 남조선 기자를 처음 접한다(많은 남한 기자들이 각종 남북회담을 수행 취재하러 평양에 갔지만 대개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고려호텔에 묵었음)는 복무원들은 아침을 특히 적게 먹는 기자가 무척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한 사흘 지나자 낯을 익힌 복무원이나 의례원들은 기자에게 “기자 선생님은 사업을 참 효율적으로 성과 있게 하십니다”고 말을 건넸다. 다른 사람들보다 적게 먹고 일은 똑같이 하니 경제적인 인간이라는 유머였다.

우스갯소리로 배를 ‘인격’이라고도 하지만 평양에서는 확실히 인격이 나온 체격 좋은 사내를 만나기가 어렵다. 거개가 단단하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는데 이는 지난 3년여의 ‘고난의 행군’과, 차를 타기보다는 걷는 것이 일상화된 생활상을 반영한 것처럼 보였다. 주체사상탑을 참관할 때 여성해설원은 탑 주변의 각종 군상 조각들을 소개하며 그 중에서 농민군상의 크기가 최대라고 했다. 해설원은 그만큼 먹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김일성 주석이 의식주(衣食住)라는 용어를 식의주(食衣住)로 고쳐 부른 것도 그런 연유라고 설명했다.

7박8일 일정의 대부분을 평양 시내에서 체류했지만 묘향산과 단군릉에 갈 때는 교외의 가을걷이 풍경을 살펴볼 수 있었다. 추수가 대부분 끝난 탓도 있지만 아직 벼가 서있는 논에서도 대규모 기계농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거개가 5∼10명 단위로 손으로 추수를 했고 트랙터는 아주 가끔 보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서는 가끔 이삭줍기를 하는 주민들도 보였다. 사정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에너지난과 식량난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평양의 기점인 김일성 광장에서 묘향산까지의 거리는 136km인데 왕복 4차선 고속도로에서 마주치는 차량은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역시 심각한 에너지난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시내에서 교외로 갈수록 우리 일행이 탄 벤츠 승용차와 주민들의 남루한 입성이 부조화를 연출했다. 벤츠가 등짐과 배낭을 멘 사람들이 끊임없이 걸어가는 도로를 시속 100km 이상으로 쌩쌩 달리는 속도의 부조화 속에서 차창으로 언뜻언뜻 비치는 구호는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이다”였다.



그들은 마치 내세를 위해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는 길 험해도 웃으며 살자’ ‘미래를 위해 살자’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무조건 따른다’등과 같은 구호들이 바로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도록 하는 그들의 정신력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한국 축구가 투지만으로 국제 무대에서 경쟁할 수 없듯이 이들 또한 정치-사상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정신력만으로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닐까.

평양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2층버스는 어쩌면 그런 고민과 변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2층버스는 평양 당국이 명절(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해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북한 당국은 지난 6월 중국에서 2층버스를 생산하는 업체로 유명한 남경금릉쌍객공사(南京金陵雙客公司)로부터 2대를 구매해 시험 운행한 뒤 지난 9월 이 회사로부터 2층버스 100대와 단층버스 200대를 구매했다. 당 창건 55주년 기념일(10월10일)을 계기로 울긋불긋한 색칠을 한 차체에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비정치적인 구호를 옆구리에 달고 광복-통일거리를 달리는 2층버스는 평양의 변화를 실감케 했다.

7박8일 동안 둘러본 평양 시내에는 단독주택보다 아파트가 더 많아 보였다. 평양의 대표적인 아파트촌은 89년 청년학생축전(13차)을 계기로 만경대구역에 건설한 3만 세대와 92년 낙랑구역의 10차선 통일거리 주변에 건설한 2만 세대다. 지은 지 10년 어간인 이 아파트들은 비교적 튼튼해 보였다. 그래서 참 잘 지었다고 운전사에게 인사를 건네자 “이만하면 세계적 수준 아닙니까”고 반문했다.

일반 가정을 들러볼 기회는 없었지만 김장김치를 보존하는 법을 통해 아파트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북한은 일찍이 가사일을 공장화해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김장도 그중 하나다. 평양 시내에서는 김치라는 글씨를 쓴 탑차를 가끔 볼 수 있다. 이것은 각 구역마다 있는 김치공장에서 아파트 세대들에 한해 공장김치를 배급하는 차량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공장김치는 손맛으로 내는 가정김치보다 맛이 덜해 일반 가정에서는 다들 제집 김치를 조금씩 담가 먹는다고 한다.

평양의 아파트에서는 아파트 베란다에 판자를 깔고 그 위에 김장독을 올려놓고 신문지를 물에 적셔 다섯 겹 정도 붙여 김장김치를 보관한다. 독이 얼지도 않고 적당히 온도를 유지해 김치가 시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김치독을 넣을 만한 크기로 나무상자를 짜 그 안에 김치독을 넣고 상자 안을 겨로 채워 놓는다. 역시 김치가 얼지도 시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아파트에 사는 평양 시민들은 다들 이렇게 집에서 김장김치를 담가 먹는다며 서울 가서 해보라고 권했다.

북한 주민들은 기자가 북한 체제에 대해 갖는 호기심보다 더 큰 호기심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한국에서 온 기자임을 밝혀도 피하는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우연히 말문을 트게 된 호텔의 여성 복무원들은 두 시간 남짓 대화를 가진 뒤 기자가 자리를 뜨려 하자 오히려 “기자 선생님, 남조선 얘기 좀 더 해주고 가세요”라며 옷소매를 잡기도 했다. 아이 엄마인 이들은 남한이 북한이나 중국보다 더 잘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점을 부러워했다. 또 기자가 전한 남한의 생활상을 행여 놓칠세라 호기심 많은 소녀들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 받은 것을 아느냐고 묻자 십중팔구는 모르고 있었다. 북한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은 탓이었다. 노벨상 소식을 전하자 “두 분이 함께 받아야 하는데 혼자만 받아 장군님이 안타깝다”는 반응도 있었고 “노벨상을 받아도 김대중 대통령이 변치 말고 남북관계가 잘 되기를 바란다”는 반응도 있었다. 김대통령에 대한 일반 주민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기대는 6·15 공동선언에 대한 기대와 통일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장군님이 서울 가시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지만 ‘미국놈들’ 때문에 (신변안전이) 걱정된다”는 여성도 있었다.

정치 구호 뺀 울긋불긋한 ‘2층버스’는 변화의 상징

기자가 만난 일반 주민들은 거개가 통일이 안 되는 이유를 미국 때문이라고 했다. 북한의 주적은 남한이 아닌 미국인데 왜 남한은 북한을 주적으로 삼는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었다. 왜곡 과장된 현실 인식도 적지 않았다. 평양 시민들은 광주에서 수천수만명이 학살당했으며, 서울에서는 미군범죄가 끊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기자는 “주한미군 범죄가 문제되고 있지만 선량한 미군도 많다”며 “남한이 미제의 식민지이고 통일이 안 되는 이유도 미국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는 취지로 진지하게 설명하자 놀라면서도 거짓말은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곤혹스런 질문은 “남조선에서도 우리 장군님을 우러러 받든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물을 때였다. 기자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을 얘기하면 그렇지 않다. 그 누가 되었든 북한에서처럼 우러러 받드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6·15 공동선언을 계기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이미지는 많이 좋아졌다.” 그러자 처음에는 깜짝 놀라다가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북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대화가 통했다. 경제강국 남한과 정치-사상강국 북한이 힘을 합치면 ‘통일 강성대국’을 이룰 수 있다는 그들의 낙관적 전망이 오히려 부담스러울 만큼 그들의 통일 열망과 기대는 크고 강했다.



주간동아 2000.11.09 258호 (p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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