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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재벌시대 끝?

퇴출 위기 맞은 ‘황제경영’

현대 ‘3부자’ 전격 퇴진 발표…전문경영인 시대 개막은 ‘기대 반 회의 반’

퇴출 위기 맞은 ‘황제경영’

퇴출 위기 맞은 ‘황제경영’
최근 현대건설 임원 A씨는 평소 절친한 사이였던 현대자동차 고위임원 B씨를 오랜만에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당분간 ‘서로를 위해’ 만나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동안 두 사람은 자주 어울렸으나 올 3월 정몽구-몽헌 회장의 후계다툼이 불거지면서 만남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A씨는 “B씨와는 지금도 가까운 사이지만 두 사람의 의사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누구를 모시고 있는지에 따라 ‘저 사람은 누구 편’이라는 식으로 분류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우울하다”고 말했다. 잘 알려진 대로 현대건설은 정몽헌회장 계열이고, 현대자동차는 정몽구회장이 경영을 맡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은 당분간 더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5월31일 정주영명예회장 및 몽구-몽헌 회장의 동반퇴진 발표 이후 몽구회장이 자동차 회장직 고수를 선언하면서 오히려 두 형제의 갈등이 증폭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 이같은 오너간 갈등은 어느 한쪽에 줄을 서도록 강요함으로써 기업 임원들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정명예회장의 퇴진 발표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전문경영인 중심으로 그룹을 이끌어가겠다고 했지만 정명예회장 눈치를 보지 않고 기업을 경영해갈 전문경영인이 과연 있겠느냐는 것.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도 6월1일 성명을 통해 “정명예회장이 과거처럼 공식직함 없이 그룹 경영을 배후에서 전횡하려는 것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경위야 어찌 됐든 정주영명예회장의 발표가 엄청난 충격을 준 것도 사실이다. 정명예회장 발표 이후 날개 없이 추락하기만 하던 현대그룹 주가뿐 아니라 주식시장이 급등으로 돌아서는 등 시장은 환영 분위기 일색이었다.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정명예회장 퇴진 발표를 두고 “시장의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킨, 소떼 방북 못지 않은 대형 이벤트”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권은 유한해도 재벌은 영원하다’는 말처럼 눈을 감을 때까지 그룹 경영을 좌지우지할 것 같던 정명예회장이 스스로 사퇴한다고 발표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정명예회장과 몽헌회장의 사퇴로 현대는 그룹 ‘체제’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현대의 모든 계열사가 완전한 독립체제로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재로서는 전문경영인들이 경영하는 계열사의 자율성이 과거보다는 현저히 강화된 상태에서 전략적 제휴는 존속되는, 다소 느슨한 연합체 형식을 띨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분석이다. 한마디로 전문경영인에 의한 독립경영체제 확립 계기가 마련됐다는 얘기다.

이는 김대중 정부가 추진해온 재벌개혁의 핵심 수단이기도 하다. 금융감독위원회 관계자는 “과거와 같은 재벌 시스템으로는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재벌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개별 기업들이 독자적으로 투자를 판단하고 책임도 지는 체제로 만들자는 게 재벌개혁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명예회장의 사퇴 발표는 오너경영체제 붕괴의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재벌들이 가장 민감하게 주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H그룹 관계자도 “그룹 임원들이 정명예회장 퇴진에 ‘외압’이 있었는지의 여부가 향후 재벌정책의 중요한 잣대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이를 파악하느라 법석을 떨었다”고 귀띔했다. 총수 ‘보호’를 위한 임원들의 충성경쟁이 벌어졌다는 것.

정명예회장 퇴진에 대해서는 특히 현대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삼성그룹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오너인 이건희회장이 여전히 경영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 삼성이 정명예회장 퇴진 직후 “현대의 이번 조치는 원론적으로 경영현안 타개책으로 발표된 것으로 삼성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입장을 밝힌 것도 삼성으로 향하는 여론의 시선을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오너경영체제가 붕괴하고 곧 전문경영인체제가 들어설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성급한 기대에 불과하다. 재경부 관계자는 “사실 재벌개혁의 핵심은 현대 삼성 LG SK 등 4대 그룹이긴 하지만 이들 그룹의 오너가 과거와 같은 ‘황제경영’만 하지 않는다면 정부로서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 없는 것 아닌가”고 반문했다.

이기호 경제수석이 6월2일 “전문경영인에 의한 독립경영체제를 도입하는 그룹에 대해 여신에서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에서도 정부의 이런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 정부의 재벌개혁은 독립-전문경영인체제의 유도를 통한 재벌 시스템의 해체이지 일본식의 ‘인위적인’ 재벌해체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부 관계자들은 이미 김대중대통령이 작년 8·15 경축사에서 재벌개혁 3원칙(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 순환출자 및 부당내부거래 억제, 변칙상속 차단)을 밝힌 이후 재벌해체 논란이 일었을 때도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당시 이기호 경제수석은 “재벌의 선단식 경영구조를 고치려는 것이지 소유구조에 손대려는 것은 아니다”며 정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사실 전문경영인체제가 반드시 효율적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SK그룹의 한 임원은 “오너경영체제의 장점도 있다”고 말한다. 외국 선진기업의 경우 아직도 오너경영을 하고 있는 곳이 많을 뿐 아니라 주인 없는 기업의 경우 비효율적인 측면도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방송대 경제학과 김기원교수는 “전문경영인 체제라 하더라도 그 전문경영인의 선출과 교체에 관한 투명한 원칙이 확립되지 않으면 최고경영진의 판단력 마비 및 부적격 최고경영진의 계승이라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공기업이나 은행 등에서 그런 가능성이 존재하며 김선홍회장의 기아그룹은 그 전형적인 예라는 설명이다. 또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세계적인 초우량 기업 중에서도 소유경영을 하는 곳이 많다(물론 빌 게이츠는 미국 정부의 마이크로소프트 분할 방침이 나온 이후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나 이사회 의장직만 유지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점에서 ‘소유경영이냐, 전문경영이냐’ 하는 논란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김기원교수는 “기업의 동태적 발전 과정에서 새롭게 창업 발전하는 대기업이 소유경영의 형태를 띠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한다. 한성대 무역학부 김상조교수도 “소유경영인지 전문경영인지 하는 점보다는 최고경영자에 대한 사전적-사후적 견제장치가 있는지 없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장치만 있다면 창업자 후손이 최고경영자가 된다고 해서 꼭 시비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경우 재벌개혁에 대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재벌개혁을 위한 법과 제도를 정비하긴 했지만 여전히 이사회가 최고경영자에 대한 감시와 견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 기업지배구조에는 문제가 많다는 주장이다. 한성대 김상조교수는 “이는 채권단이나 소액주주, 종업원 등 기업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사외이사 선임 과정에서 소외되고 있고, 그 결과 총수와 친분있는 사람들로 사외이사가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부의 재벌개혁 드라이브 와중에도 총수의 이익을 위해 소액주주들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졌던 것도 이런 허점 때문이었다는 것. 가령 삼성그룹의 경우 시민단체와 소액주주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편법적’인 3세 승계가 거의 완료된 상태이며, 이사회 중심 경영을 한다고 외쳐왔던 LG화학은 대주주의 비상장 계열사 지분 고가 매입 의혹이 일기도 했지만 이들 회사의 이사회는 무력하기만 했다.

또 경영자에 대한 사후적 감시장치인 적대적 인수-합병 시장도 전혀 형성되지 않은 상태. 따라서 외국처럼 경영을 잘못해 주가가 떨어지면 적대적 인수-합병을 통해 경영자를 퇴출시키기도 힘들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최근 적대적 인수-합병을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은 긍정적인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략적 의사 결정을 하는 외국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같은 전문경영인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쌍용그룹의 한 관계자는 “현재처럼 은행 돈을 빌려 은행 빚을 갚는 방식으로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정도이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고 경영진에 건의해도 이들은 ‘노 코멘트’로 일관한다”면서 “전문경영인들이 오너 목에 방울을 달 수 없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초래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도 “재벌그룹 전문경영인 출신들은 죽을 때까지 총수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하는 것 같더라”면서 “우리나라에 과연 전문경영인이 존재하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이들이 정부에 들어와도 과거 몸담았던 재벌에 대해서는 ‘손이 안으로 굽는’ 행태를 보인다는 것. 청와대 관계자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 그룹 출신의 한 고위 공직자는 청와대의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고 귀띔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재벌 스스로 변화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금융감독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현대에 이어 다른 그룹에서도 비슷한 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고 소개했다. 현재 이 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는 어느 그룹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이어 “삼성이 자동차사업을 포기한 것도 그룹경영 체제의 비효율성을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하나만으로도 수조원의 흑자를 내고 있는 삼성이 과거처럼 그룹경영체제를 유지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자동차 하나쯤 끌고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텐데 이를 포기한 것은 삼성 스스로 시대 변화를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코오롱그룹 관계자는 “오너의 인사권은 아직도 막강하지만 금융환경의 변화가 재벌체제 ‘해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과거 선단식 경영을 가능하게 한 수단이었던 지급보증은 이미 금지된 데다 은행에서도 외형보다는 수익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내부거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어 그룹 경영 시스템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

분명한 것은 ‘제비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일부에서 정주영명예회장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이 일고 있기 때문에 ‘제비’의 정체에 대해서마저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재벌 시스템 해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 과제다.





주간동아 2000.06.15 238호 (p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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