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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새 야심

‘공룡 삼성’ 미술계 평정 노린다

미 대사관 숙소 부지 1400억에 매입…인사동-경복궁 잇는 ‘문화벨트’ 만들 듯

‘공룡 삼성’ 미술계 평정 노린다

‘공룡 삼성’ 미술계 평정 노린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지난 2월24일 이색적인 보도자료를 냈다. “한 한국회사와 서울 종로구 율곡로에 있는 부지 1만800평 매각 계약을 체결했다”는 내용. ‘한 한국회사’는 삼성생명이고 매각대금은 1400억원으로 알려졌다.

행정구역상으로 서울 종로구 송현동 49-1호인 이 땅은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미국대사관 직원과 가족의 숙소로 사용중이다. 그러나 세종로에 있는 미국대사관 이전 계획(미국 대사관은 덕수궁 뒤 옛 경기여고 자리로 이전할 예정)이 확정되면서 매물로 나온 것. 삼성측이 이 땅에 눈독을 들인 것은 지난 97년 여름부터였다.

미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97년 여름 삼성측과 계약을 체결했었는데 IMF 사태로 달러값이 두배 가까이 뛰자 (삼성측에서) 취소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다시 사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계약을 파기했었기 때문에 계약금(200억원 정도)을 한번 떼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삼성측은 이번에 다시 부지를 매입했다.

삼성측이 미 대사관 숙소부지를 사들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문화계에서는 “미술계 평정을 노린 삼성 프로젝트가 현실화했다”며 “미술관 등 문화센터를 지을 목적”이라고 전망한다. 매매 과정에서 삼성측과 접촉했던 한 인사도 “삼성측으로부터 ‘직원 용도는 아니다. 문화사업 용도’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또다른 미술계 인사도 “97년 당시 삼성은 미술관 건립을 목적으로 3000억원에 가까운 자금준비 계획을 마련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그러나 삼성생명 고준호홍보과장은 “사무용으로 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숙소부지에 사무용 건물을 짓기는 적합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종로구청 관계자에 따르면 이 땅은 고도제한에 묶여 높이 16m(5층 정도)까지만 건물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은 재벌그룹 중 문화계 투자를 가장 활발히 하고 있는 그룹이다. 호암미술관 호암갤러리 등이 그것인데 그 중심에는 이건희삼성그룹회장의 부인인 홍라희여사가 있다. 서울대 미대를 나온 홍여사는 특히 미술계에서 ‘큰손’으로 알려져 있다. 홍여사는 그동안 ‘이중섭전’ ‘마르크 샤갈전’ ‘전환의 공간전’ ‘구겐하임 미술전’ ‘박수근전’ 등을 잇따라 개최, 미술계 인사들로부터 안목과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런 홍여사의 오랜 꿈은 현대미술을 위주로 한 ‘삼성미술관’을 짓는 것. 지난 93년에는 중앙일보 사옥 건너편에 사무실을 두고 20여명으로 팀을 만들어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95년 호암미술관장에 취임한 홍여사는 “삼성미술관을 짓겠다”고 공개적으로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미술계 인사들은 삼성의 미대사관 숙소부지 매입으로 미술계에 대한 삼성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 미대 교수는 “현재 미술시장의 70, 80%는 삼성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다. 거기에 줄대지 않고서는 못산다”고 말했다. 정도가 문제일 뿐 미술시장에 미치는 삼성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데는 미술계 인사 누구도 이론을 달지 않는다.

인사동의 한 관계자는 “미술계가 IMF 사태를 거치면서 이 정도라도 버틸 수 있었던 데는 삼성의 힘이 컸다”고 말했다. “외국작품을 많이 구매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삼성마저 우리 미술시장을 외면했다면 미술계 전체가 고사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또다른 미술계 인사는 “삼성은 외국 바이어들이 왔을 때 호암미술관 등을 활용해 좋은 이미지를 심어줌으로써 계약을 성사시킨 적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문화계에 대한 투자를 비즈니스로 연결시키기도 한다는 것. 삼성측은 문화계 투자에 연간 100억원 이상을 쓰고 있으며 삼성문화재단과 삼성생명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미술업계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삼성은 호암미술관을 통해 고미술 분야를 평정, 국립중앙박물관 다음 가는 명성을 얻고 있다. 지금 추세로 보면 현대미술쪽도 평정할 것 같다. 이번 숙소부지 매입으로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지난 92년 경기도 용인에 개관한 호암미술관(관장 홍라희)은 1만5000여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국보와 보물급만 100여점에 달한다.

삼성의 숙소부지 매입 사실이 알려진 뒤 미술계와 인사동 일부 인사들은 벌써부터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안국동 네 거리 지하를 뚫어 숙소부지와 인사동을 연결하면 인사동-숙소부지-경복궁으로 이어지는 멋진 벨트를 만들 수 있으며 인사동 화랑가를 찾는 사람들이 훨씬 늘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문화계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인사동의 한 관계자는 “작가들 중에는 삼성측에서 자신의 작품을 사갔다는 점을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 또 삼성이 매입하면 작품값도 껑충 뛴다. 따라서 삼성이 미술관을 건립하면 미술계가 삼성의 영향력에 휘둘릴 위험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염려했다. 또다른 인사는 “삼성은 고급취향이어서 미술시장의 저변 확대라는 측면에서 보면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삼성의 미술관 건립 움직임에 대해 미술계 일각에서는 이색적인 분석도 나온다. “호암미술관 하면 골동품과 고 이병철회장이 떠오른다. 홍여사는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한 삼성미술관 건립을 통해 시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능력을 인정받으려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삼성의 미술관 건립 움직임은 몇 년 전부터 시작됐다. 미술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측은 97년 미 대사관 직원숙소 부지 매입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현대그룹 본사 건너편에 있는 옛 중앙문화센터 주변을 매입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어려움에 봉착해 매입을 포기하고 말았다”고 전했다. 당시 삼성측은 지하 6층, 지상 15층짜리 건물을 짓는다는 설계도까지 만들었다. 프랑크 게리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방한해 터를 둘러보기도 했다.

삼성은 현재 국세청이 들어선 옛 화신백화점 자리, 서울시립미술관이 들어선 옛 경희궁 터, 관훈동에 있는 구민정당사 터 등에도 ‘눈독’을 들였다고 한다. 또 용산에 짓고 있는 국립박물관 자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었다. 인사동 한 관계자는 “삼성측은 지난 연말 한 건설회사에 팔린 인사동 ‘12가게 터’ 에 대해서도 매입의사를 타진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번에 삼성이 매입한 숙소부지가 경복궁, 민속박물관 등 전통문화의 공간과 금호미술관, 선재미술관, 갤러리 현대 등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랑들과 인접해 있다는 점도 관심가는 대목이다. 문화계 일각에서는 진작부터 “민속박물관 입구 건너편에 있는 군부대를 이전하고 그 자리에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분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덕수궁-경복궁-국립현대미술관 분원-선재미술관-인사동-운현궁-창덕궁으로 이어지는 ‘문화벨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인사동의 한 관계자는 “숙소부지에 미술관 등을 망라한 문화센터를 만들면 위치상으로 볼 때 문화벨트의 중심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삼성측에서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가지고 땅을 매입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편 삼성측은 최근 출판문화회관 건물의 매입 가능성을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건물을 매입하면 숙소부지는 경복궁과 곧바로 연결된다. 삼성측에서 이미 장기적 계획을 갖고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주간동아 227호 (p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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