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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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영어” F학점의 법조인들

영어 기피증 심각, 수준급 10%선 그쳐…“법률시장 개방 앞두고 이래서야”

  • 입력2006-04-04 12: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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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묻지마, 영어” F학점의 법조인들
    “99년 로아시아(Lawasia) 서울총회 때, 처음에는 내국인 참가 신청자가 너무 적어 주최측이 몹시 초조했다고 한다. 주된 원인은 회의가 수입에 직결되는 일도 아닌데다 모두 영어로만 진행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한국 법조계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낸 부끄러운 이야기다. 우리가 유치한 대회에 정작 우리 식구들의 참석이 저조했더라면 우리 체면이 어찌 될 뻔했겠는가. 하도 기가 막혀 한 법률전문 신문에 ‘로아시아 총회에 적극 참여하자’는 간절하고도 따끔한 글을 실은 적도 있다. 다행히 참가자가 늘어 주최측이 한숨을 돌렸다고 한다.”

    대구지방변호사회 유병갑변호사가 최근 법조계의 한 계간지에 기고한 글이다. 유변호사는 “우리나라 법조인은 외국의 법조인과 경쟁은커녕, 대화도 잘 못하는 한심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고 한탄했다. 한 변호사가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워싱턴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일행과 흩어져 시내를 둘러보고 한 시간 뒤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이 변호사만 나타나지 않았다. 일행들은 한참 후 이 변호사가 길을 묻는 질문조차 못하는 완벽한 ‘영맹’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해외 연수 프로그램 경쟁 치열

    법조인의 ‘영어기피증’은 듣기에 따라선 ‘재미’있는 일인데 이와 관련된 일화는 많다. 그 중에는 과장된 얘기들도 있을 것이다.

    한국 법조인들의 평균적인 영어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법률시장 개방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다가오고 있고 세계화 물결에 쓸려 한국 법률산업의 미래가 어디로 가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판사 검사 변호사의 세계화 적응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법조 3륜(판사 검사 변호사)의 영어실력을 계량적으로 전수 조사한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조사를 하려 해도 법조계의 보수적 분위기에선 잘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서울지방변호사회 관계자). 따라서 제한적 수치와 주요업무 담당자들의 말, 영어교육시스템 등 각종 정황으로 미루어 전체의 수준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대법원은 올해 20명의 현직 판사들을 미국에 1년간 연수 보낼 계획이다. 이 연수프로그램은 경력 6∼8년차 3개 기수 판사들을 대상으로 했다. 거의 모든 판사들이 이 프로그램 참여를 희망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는데 토플성적이 중요한 선정기준이 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커트라인은 토플 580점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올해 시험대상인 3개 기수의 총인원 200여명을 표본으로 했을 때 토플 580점 이상(수준급이라고 평가됨)의 영어실력을 갖고 있는 판사는 전체의 10%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나머지 90% 판사들의 수준은 어떨까. 판사들은 일반적으로 어떻게 어학공부를 하는지 대법원 과장급의 한 현직 판사로부터 직접 들어보았다.

    “판사로 임용되면 정신이 없습니다. 98년의 경우 한해 동안 법관 1인당 사건부담 건수는 4318건에 이릅니다. 영어 공부할 시간이 나겠습니까. 그러다 6년차가 되면 다시 영어에 눈을 돌립니다. 1년간 해외연수라는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틈틈이 토플공부를 하는데 80%는 미끄러지죠. 3년이 지나면 연수자격이 없어집니다. 그때부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정년 때까지 영어와는 인연을 맺지 못하는 것이죠. 재판에서 영어 쓸 일이 별로 없는 것도 한 가지 이유입니다.”

    1년 해외연수를 가는 판사들이 모두 영어능통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미국 로스쿨 연수를 다녀온 한 현직 판사의 회고담.

    “시험도 치러야 하고 논문도 제출해야 됩니다. 자연히 혼자서 책보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화능력의 향상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김우진 법원행정처 국제담당관은 “판사 중 영어 능통자는 희소하다”고 말했다. 법무부도 올해 수명의 검사들을 미국으로 연수 보낸다. 법무부 소속 한 검사에 따르면 영어에 관한 한 검사도 판사와 거의 비슷한 ‘전철’을 밟는다고 한다. 토플 550점, 토익 800점은 기본으로 받는 대기업 신입사원들에 비교하면 2800여 현직 판-검사 대다수의 영어실력은 ‘부끄러운 수준’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이야기다.

    변호사의 경우도 전체 4625명의 10% 정도인 400여명만이 변호업무와 연계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태평양 법무법인 오양호변호사). 이는 외국과 관련된 법률문제인 ‘섭외거래’ 를 취급하는 변호사 수를 기준으로 한 것. 섭외거래는 대형 로펌들이 70%를 맡고 있는데 이들은 일정 근무기간이 지난 소속 변호사들에게 2년간 해외연수지원을 해주고 있다. 이밖에 일부 소형 로펌이나 개인사무소들이 섭외거래를 하고 있다.

    서울 한 로펌 변호사의 말. “모든 법조인이 영어를 배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 법률소비자의 요구에 너무나도 못미치는 수준이다. 외국기업과의 제휴, 인수합병과정에서 한국 변호사들의 법적 보호는 대기업에 그치고 있다. 이는 영어를 할 줄 아는 변호사가 그 정도밖에 안된다는 의미도 된다. 국제법과 국제적 규범이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에 변호사의 영어실력은 변호사업계만의 일이 아니다. 기업과 국가의 전략적 과제로 접근해야 한다.”

    신웅식 국제한인변호사회 회장은 “외국변호사들이 진출하지 않은 지금 한국 변호사들은 한국내 기업간 국제거래의 50% 이상을 국내에 진출한 교포변호사들에게 내줬다”고 말했다.

    왜 이처럼 법조인들의 영어 실력이 부족한 것일까. 김성준 법무부 법무심의관은 “법조인 양성교육의 국제경쟁력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법과대학-사법시험-사법연수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법조인 양성과정에서 영어가 끼여들 틈이 없다는 것이다.

    전국 법과대학 중 영어원서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는 학교는 단 한 군데도 없다. 한국 법조계가 법률용어들을 영어로 어떻게 부르는지조차 모르는 수준이 된 것은 이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97년 사법시험 영어응시자는 7500명. 이보다 많은 7854명은 영어가 아닌 외국어를 시험과목으로 택했다. 서울 신림동 고시학원 태학관의 노종곤주임은 “고시생들이 영문독해에 약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1차시험과목인 영어는 3월부터 9월까진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 3시간 공부를 하고 그 이후부터 시간을 줄여 나간다. 다른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다. 말하기, 듣기 공부는 안한다. 무조건 외운다. 영어 독해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제2외국어로 바꾸는 고시생이 많다.”

    사법연수원 2년 동안에도 영어에 가까워지지 않는 것 같다. 30기 연수원생 L씨는 “한가하게 영어 공부하고 있다가는 연수원 성적이 엉망이 된다”고 털어놓았다. 30기 사법연수원생 48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70.6%가 ‘외국어실력 향상의 필요성을 느끼나 현실적 여건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한 현직 검사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판-검사, 변호사양성제도는 영어교육을 포기해온 것이 아니라 영어를 아예 못배우도록 막아왔다.”

    한국 덤핑 피제소건수 세계 3위(87∼98년 152건), 97년 1년간 외국과의 사법공조건수 1800여건-매년 10% 증가, 2000년 1월 외국(호주)과 처음으로 민사사법공조조약발효, 국제통상법-국제계약법-국제중재법-해상법-국제금융법-지적재산권법-국제조세법-국제기업법 등 국내법률시장 광범위한 개방 예고(법무부 관계자), 한국 로펌의 외국법률시장 진출 미미(로펌의 한 변호사), 5년 내 국내 송무시장 포화 예상(서울 개인사무소 한 변호사), 외교통상분야 변호사 조력 극히 저조(로펌의 한 변호사)….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영어를 잘하지 못하면 잃을 게 너무 많다는 징후들이다.

    “영자신문-TV 등 보며 닥치는 대로 공부”

    세계 법정 누비는 김갑유변호사 … “영어 모르면 도태, 배워야 산다”


    태평양 법무법인 김갑유변호사(사시26회)는 사법시험에 두 번 합격한 ‘악바리’다. 그는 영어도 ‘이를 악물고’ 배웠다. 그래서 지금은 세계의 법정을 누비는 스타변호사가 됐다. 김씨는 대학 4학년 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사법연수원행을 포기하고 이듬해 사법시험에 다시 응시해 합격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 합격은 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판사 임용을 받지 못할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판사가 되겠다는 그의 목표는 그만큼 확고했다.

    그러나 그는 로펌에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진로를 바꿨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던 생각의 폭이 확 넓어지더군요.” 이렇게 해서 그는 88년 서울에 있는 한 로펌의 변호사가 됐다. 선배 변호사와 한 조가 돼 외국 의뢰인을 상대하던 그에게 어느 날 위기가 닥쳤다. 선배가 출장을 간 새 그는 홍콩의 한 의뢰인으로부터 온 국제전화를 받았다. “당황스럽기도 했고 여하튼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 의뢰인은 변호사가 법률지식이 부족하고 불성실하다며 회사측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대다수 변호사가 그러하듯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영어 밑천의 전부였다고 한다. 그는 영어를 못하면 아무리 법을 잘 알아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회사로 들어오는 모든 영문팩스를 번역하고 영문신문이나 TV를 보며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12년이 지난 지금 그는 싱가포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국 제약업체와 홍콩 회사간의 중재사건을 맡고 있다. 유려하고 위트 있는 영어 화술 덕에 국제 항공-해상 분야에선 최고 변호사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는 젊은 변호사들에게 “영어를 배우라”고 조언한다. “포화상태의 국내 송사시장에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영어를 잘해 국내외에서 변호사가 일할 새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게 훨씬 생산적이죠. 국익을 지키고 기업, 소비자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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