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40

2016.06.01

책 읽기 만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16-05-30 17:2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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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정혼자 이수일과 은행가의 아들 김중배 사이에서 갈등하던 심순애는 결국 가족의 권유와 돈에 굴복해 김중배와 결혼한다. 한편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지 못한 굴욕감에 몸부림치는 남자 이수일은 이렇게 절규한다.

    “순애야, 이년, 순애야, 이년, 너의 마음이 이렇게 변한 까닭으로 이수일이라 하는 놈은 낙심되는 끝에 발광하여 일평생을 그르치는구나. 학문이 다 무엇이냐? 오늘 저녁으로 마지막이다.”

    일제강점기 베스트셀러였던 조중환의 번안소설 ‘장한몽’(1913)의 주인공들은 세상의 지배적 질서에 압도되거나 체념하며 자학과 자기연민, 죄의식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신파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신파(新派)란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신파성 작품을 즐기는 것일까. 신파성의 무엇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오랫동안 대중예술을 연구해온 이영미 씨가 ‘한국대중예술사, 신파성으로 읽다’를 펴냈다. 각주와 참고문헌, 색인까지 첨부한 700쪽 가까운 분량의 연구 논문이지만 읽기의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저자의 분석 대상이 일제강점기부터 1990년대까지 문학, 영화, 드라마, 음반, 대중가요, 만화 등을 망라하기 때문이다. 이미자의 노래 ‘동백아가씨’(1964)를 틀어주는가 하면,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1968)의 최루성 세계로 안내하고, 트윈폴리오의 ‘하얀손수건’(1969)과 ‘웨딩케익’(1969) 같은 포크송에 담긴 ‘슬픔의 절제’를 발견하게 해준다.

    한국 대중예술사에서 ‘신파’는 문자 그대로 ‘새로운 경향의 연극’이란 의미로 출발해 신파극에서 흔히 써왔던 과장된 대사 억양과 움직임 등의 연기 경향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나아가 ‘최루적’ 경향을 지칭하거나 ‘뻔하다’ ‘촌스럽다’ ‘통속적이다’ ‘저속하다’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세기 중반부터 “‘신파적’이라는 말은 정확한 의미에 대한 구명 없이 그 자체로 평가절하의 언어가 됐다”며 “신파성에 대한 연구는 이 땅에서 살아갔던 대중들이 세상이 슬픔과 고통이라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견디고 드러내며 살아갔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1936년 임선규가 극본을 쓰고 동양극장 전속단체 청춘좌가 공연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당대 최고 흥행 작품으로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재공연됐다. 기생 일로 오빠를 뒷바라지한 홍도는 오빠 친구이자 부잣집 아들인 영호를 사랑한다. 그러나 영호에게는 정혼녀 해정이 있고 집안에서도 홍도와의 결혼을 반대한다. 주위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하지만 시댁의 구박과 해정의 음모에 빠진 홍도는 남편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다 해정을 죽이게 되고 검사인 오빠 손에 잡혀간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 곁에서 ‘막장드라마’라는 이름으로 변주되고 있다. 그래서 신파는 힘이 세다.






    무신론자의 시대
    피터 왓슨 지음/ 정지인 옮김/ 책과함께/ 832쪽/ 3만8000원


    1882년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후 철학자, 화가, 극작가, 시인, 소설가, 심리학자, 과학자, 무용가 같은 이들이 신 없이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구상했다. 저자는 이 책 서문에서 “우리 삶에는 무언가 빠져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니체의 탓인가”라는 물음을 던진 뒤 신도 이성도 없이 스스로 예언자가 되려 한 용감한 인간이 걸어온 지성사를 정리했다.




    판다의 엄지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사이언스북스/ 464쪽/ 2만2000원


    고생물학과 진화생물학의 권위자인 저자가 1980년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된 대표작. 굴드가 ‘내추럴 히스토리’에 ‘이런 생명관’이라는 제목으로 27년간 연재한 300여 편의 글 가운데 31편을 추린 것으로, 자이언트판다의 ‘가짜’ 엄지를 해부학적으로 분석한 ‘판다의 엄지’부터 굴드의 대표 이론인 ‘단속평형설’에 대한 개괄, ‘이기적 유전자’를 쓴 도킨스와의 논쟁,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배격, 공룡의 지능 문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 등을 담았다.




    군함도 1, 2
    한수산 지음/ 창비/ 1권 484쪽, 2권 476쪽/ 각 권 1만4000원


    일제강점기 군수기업 미쓰비시가 운영하던 하시마(瑞島) 탄광에서 벌어진 강제징용과 나가사키 피폭 문제를 다룬 장편소설. 섬 모양이 군함을 닮아 ‘군함도’라 불리던 하시마는 한 번 들어가면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고 할 만큼 가혹한 노동 착취로 유명했다. 작가는 이런 실화를 바탕으로 2003년 소설 ‘까마귀’를 펴냈고, 이를 보완해 일본어판 ‘군함도’(2009)를 출간한 뒤 등장인물들의 출신과 배경을 새롭게 설정하는 등 대폭 개작한 결정판을 출간했다.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384쪽/ 1만3000원


    ‘7년의 밤’ 40만 부,  ‘28’ 20만 부, ‘내 심장을 쏴라’ 20만 부 등 잇달아 베스트셀러를 내놓고 있는 작가가 3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란 사실만으로도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작품. 주인공 유진이 집 안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된 어머니를 발견하는 것에서 사건이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씩 발견되는 단서를 따라 지난밤의 기억들을 확인해가며 그 ‘누군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진실이 드러난다.




    오래된 아름다움
    김치호 지음/ 아트북스/ 360쪽/ 3만 원

    저자가 ‘고미술의 유혹’(2009)에 이어 두 번째로 쓴 미술책. ‘고미술에 매혹된 경제학자의 컬렉션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컬렉션 문화와 고미술에서 찾은 한국미의 원형을 소유하려는 ‘아름다움’의 본질과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설명한다. 또 컬렉터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긴 호흡과 미술에 대한 취향, 시대를 앞서 보는 안목, 신뢰할 수 있는 상인과의 만남, 가격에 집착하는 않는 자세 등을 꼽았다. 




    줌 인 러시아
    이대식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374쪽/ 1만5000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로 불러야 하는 이유, 모스크바 ‘붉은 광장’이 붉지 않은 이유, ‘고맙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스파시바’가 ‘신이여 구하소서’라는 종교적 언어인 이유, 보드카가 40도인 이유 등 러시아에 대해 사소하지만 꼭 알아야 할 사실을 인문학적으로 설명한 책. 12년간 러시아에서 공부한 저자가 사회, 역사, 예술, 문학, 리더, 경제 6가지 주제로 러시아를 ‘줌 인’해 보여준다.




    멈출 수 없는 사람들
    데이비드 애덤 지음/ 홍경탁 옮김/ 반니/ 344쪽/ 1만6000원


    보통 사람은 하루에 4000가지 생각을 하지만 그 생각이 모두 소용이 있거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운전하다 고의로 추돌을 일으키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낯선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거나 돈을 훔치는 상상을 한다. 이런 기이한 생각과 충동을 ‘침투적 사고’라 하며 강박장애 환자는 이를 억누르려고 강박 행동을 한다. 저자가 직접 체험한 강박장애의 실체와 치료법을 설명한다.




    페랑디 요리 수업
    미셸 탕기 엮음/ 강현정 옮김/ 시트롱마카롱/ 696쪽/ 10만 원


    1920년 설립된 프랑스 국립요리학교 페랑디가 처음으로 공개하는 레시피. 이 책 제작에 미식 전문기자인 탕기와 페랑디 교수진, 미슐랭 스타 셰프 30여 명이 참여했다. 육수와 소스, 달걀, 생선류, 육류, 채소, 과일 등 재료를 중심으로 장을 구별한 뒤 각각 기본 재료 선택과 손질법을 설명하고 난이도에 따라 3단계로 구분한 레시피를 소개했다. 요리도구와 ‘포커스’로 표시한 요리 팁도 유용하다.


    만보에는 책 속에 ‘만 가지 보물(萬寶)’이 있다는 뜻과 ‘한가롭게 슬슬 걷는 것(漫步)’처럼 책을 읽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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