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리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기생충 불편한 진실

낯설고 불편하니까, 예술이다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6-24 08: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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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바른손이앤에이]

    [사진 제공 · ㈜바른손이앤에이]

    개봉 4주 차를 맞은 영화 ‘기생충’이 관객 800만 명을 돌파했다. 한국 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야자상을 수상했다는 점이 흥행폭발의 기폭제가 됐음은 물론이다. 지난해 황금야자상 수상작으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관객 수가 17만여 명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이는 더욱 뚜렷해진다. 

    그러나 정작 영화를 본 관객은 많지만 뜨뜻미지근한 반응도 꽤 됐다. 공통된 반응은 불편하다였다. 빈부격차를 너무 노골화해서 불편했다, 가난한 사람을 부자에게 기생하는 뻔뻔한 이들로 그려 불편했다, 15세 관람가라 가족관람을 택했는데 부부관계를 맺는 장면이 너무 민망해 불편했다…. 

    칸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안목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미국 아카데미시상식과 달리 칸영화제 최고작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으로 승부를 건다. 사람들이 익숙하다고 여기는 것을 낯설게 만들고, 편안하다고 여기는 것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20세기 이후 예술의 진면목이기 때문이다.

    스칸달론으로서 ‘기생충’

    ‘상상계’의 연교(조여정 분  ·  왼쪽)와 ‘상징계’의 기정(박소담 분) . ‘실재계’의 근세 역 맡은 박명훈 배우. (왼쪽부터) [사진 제공 · ㈜바른손이앤에이, 사진 제공 · 딥 포커스]

    ‘상상계’의 연교(조여정 분  ·  왼쪽)와 ‘상징계’의 기정(박소담 분) . ‘실재계’의 근세 역 맡은 박명훈 배우. (왼쪽부터) [사진 제공 · ㈜바른손이앤에이, 사진 제공 · 딥 포커스]

    그렇다고 무조건 불편한 영화가 예술적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미학적 완성도가 높으면서 사람들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불편함이다. ‘음, 저 작품이 세계적인 영화상을 수상했다는데 왜 나는 이렇게 별로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을 도식화한 것에 불과한 거 같은데 도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꼭 저렇게 뻔뻔하고 냄새 나는 존재로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이와 관련해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통념을 깨면서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인간은 대부분 일상의 삶에선 결코 깊이 사유하지 않는다. 그 일상을 뒤흔들거나 다리 걸어 넘어뜨리는 일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생각을 시작한다. 



    여기 매일 같은 길로 등하교하는 학생이 있다. 매일 아무 생각 없이 등하교하던 그는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발이 걸려 나뒹굴게 됐을 때 비로소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한다. ‘아니, 멀쩡하던 보도블록이 왜 깨져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다 사회 문제에 눈을 뜨기도 하고 ‘아, 나태했던 나에게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구나’라며 자기성찰에 잠기기도 한다. 

    오늘날 ‘추문’으로 많이 번역되는 스캔들은 본디 걸림돌을 뜻하는 고대희랍어(헬라어) 스칸달론에서 기원했다. 스캔들이라고 하면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커리어에 치명적인 걸림돌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기독교 성경에서 예수를 스칸달론에 비유하곤 한다. ‘신의 아들로 태어난 지존(至尊)이 지상 최악 범죄자들의 처형대인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추문의 주인공이 돼서’라는 해석은 1차원적이다. 가장 귀한 존재가 왜 그토록 비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그럼 예수는 왜 인간의 몸으로 지상에 강림한 것일까라는 불편한 질문이 돼 무수한 신자의 영혼을 거세게 두드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는 들뢰즈가 말한 깨진 보도블록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걸어 넘어뜨리는 존재다. 

    ‘기생충’의 불편함이 스칸달론으로 작동한다 해도 과연 미학적으로 완성도가 높으냐는 별개의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 그리고 더 가난한 자의 계층구조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한 듯한 이 영화의 탁월함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 마니아가 그동안 이에 대해 설명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스칸달론이 존재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영화 초반부 설정 외에는 언급하지 말아달라는 봉준호 감독의 특별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명하고 싶어도 설명할 수 없는 딜레마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다 개봉 3주 차에 영화를 본 사람이 아니고는 결코 알 수 없던 근세 역의 배우 박명훈 씨가 언론인터뷰에 나섰다. 봉 감독의 주문에 의해 마술램프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지니의 봉인이 풀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영화의 심층구조에 대해서(이하 스포일러 포함).

    연교, 기정, 근세의 삼각도

    [사진 제공 · ㈜바른손이앤에이]

    [사진 제공 · ㈜바른손이앤에이]

    사회적 계급구조에만 초점을 맞추면 영화 속 인물은 3개 계층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꼭대기에 세련된 고급저택에서 사는 동익(이선균 분)과 연교(조여정 분) 가족이 있다. 그리고 반지하 집에 사는 기택(송강호 분), 충숙(장혜진 분), 기우(최우식 분), 기정(박소담 분)으로 이뤄진 가족이 위치한다. 마지막으로 동익네 도도한 가정부인 문광(이정은 분)과 그의 보호 아래 비밀 지하공간에 숨어 사는 근세(박명훈 분) 부부가 있다. 

    전원이 백수인 기택네 가족은 4수생인 기우가 대학생으로 신분을 속이고 동익네 과외교사가 된 기회를 활용해 기정을 막내아들의 미술교사, 기택을 운전기사, 충숙을 입주가정부로 취업시키는 데 성공한다. 자신들이 사는 반지하 집에 기생하는 꼽등이 못지않은 생존력을 지닌 기택네 가족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현실 논리를 앞세워 후안무치한 사기극을 펼치며 전 가족이 동익네에서 기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동익네 가족이 1박 2일 여행을 떠난 사이 주인 집에서 파티를 열다 자신들의 음모로 쫓겨난 문광의 초인종 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이 몰랐던 섬뜩한 현실에 눈뜨게 된다. 

    이들 세 가족을 계급구조의 틀로만 바라보면 재미가 반감된다.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으로 바라볼 때 그 풍성한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라캉은 우리의 현실이 상상계(the Imaginary), 상징계(the Symbolic), 실재계(the Real)라는 3개 차원으로 구성된다고 설파했다. 

    상상계 속 존재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유아적 환상이 투여된 거울 속 자아상에 심취한 채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세속의 홍진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며 도발적 상상을 즐기는 동익이나,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는 연교가 이를 대표한다. 특히 연교가 그러한데, 적확한 언어구사력이 떨어지는 데다 아들 다송(정현준 분)이 미술 천재라는 환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상징계 속 존재는 언어와 규칙을 통해 세상살이의 처세술에 눈뜬 존재다. 현란한 말솜씨와 상류층의 기대심리를 읽어내는 ‘게임의 규칙’에 능수능란한 기택네 가족이 이에 속한다. 그중에서도 연교의 대척점에 선 기정이 이를 대표한다. ‘독도는 우리 땅’ 리듬에 맞춰 “제시카는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과 선배는 김진모, 그는 니 사촌”이라는 키워드를 한 번 읊더니 단숨에 연교와 다송을 휘어잡아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현실은 불가에서 말한 언어도단의 세계다. 언어와 논리로 포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기발한 상상력까지 압도하는 ‘섬뜩한 것(the uncanny)’이 문득문득 출몰한다. 영화 속에서 문광의 그로테스크한 등장과 그로 인해 저택 지하 비밀공간 속에 숨어 사는 근세야말로 그런 실재계에 속한 섬뜩한 것의 출현을 담아낸다. 그 순간 기택네 가족은 자신들의 간지(奸智)로는 형용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지게 된다.

    “마약 사줘”  =  “열려라 참깨”

    [사진 제공 · ㈜바른손이앤에이]

    [사진 제공 · ㈜바른손이앤에이]

    ‘기생충’은 이런 라캉적 사유를 한국적 현실 속에 그럴 듯하게 투영하면서도 희비극이 교차하도록 능수능란한 변주에 성공했다. 상상계에 사는 사람들은 어딘지 코믹하게, 상징계에 사는 존재는 세상 풍파에 닳고 닳은 존재로, 그리고 실재계 속 존재는 일면 그로테스크하지만 알고 보면 ‘허당’에 가까운 존재로 포착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재즈의 즉흥연주를 보는 듯한 현란한 연기도 큰 몫을 했다. 우아한 속물로 분해 엉뚱한 웃음을 안겨주는 조여정, 세상살이에 도통한 척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같은 문어체 대사를 남발하는 송강호, 도도한 표정 뒤에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살아왔음이 들통 난 뒤 갑자기 북한 방송 아나운서 성대모사로 관객의 허를 찌른 이정은의 연기다. 

    모럴 드라마로서 ‘기생충’의 진짜 묘미는 이런 수직적 심층구조에 다시 수평적 반전의 묘미를 안겨준 데 있다. 주인 가족이 여행을 간 뒤 저택 거실에서 파티를 즐기던 기택네 가족은 하나 둘 죄의식을 토로한다. 지금의 위치를 차지하고자 원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을 거짓말과 음모로 몰아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순순히 속아 넘어간 동익-연교 부부가 순수하고 착하다는 찬사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문광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자신들의 간지에 희생된 근세 부부의 섬뜩한 처지를 목도하면서 할 말을 잃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엔 동익네 가족이 급작스러운 폭우로 여행을 취소하고 귀가한다. 가정부 충숙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헐레벌떡 거실 탁자 아래로 몸을 숨기는데, 하필 거기서 부부관계를 갖는 동익-연교의 대화를 반강제로 듣게 된다. 그런데 순수하고 고고한 줄 알았던 그들이 자신들의 은밀한 환상 충족을 위해 아랫사람들에 대한 경멸, 그리고 그로 인해 촉발한 속옷 페티시와 마약 탐닉까지 마다않는 위선적 존재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영화는 여기서 일대 윤리적 전회(轉回)를 일으킨다. 그 전까지만 해도 영화 제목이 말하는 기생충에 가까운 존재가 기택네였다면 이 장면을 기점으로 동익 부부 또한 아랫사람들에 대한 심리적 소외와 착취를 벌이는 기생충 같은 존재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파 위에서 연교가 신음하며 외치는 “마약 사줘”라는 대사는 이 영화의 심연을 열어젖히는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 후 얼이 빠진 듯 동익네 저택을 빠져나온 기택네 식구의 반지하 집이 홍수에 수몰되는 장면은 이런 윤리적·심리적 전회를 극적으로 포착한 명장면이다. 또 동익네 가족이 들이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나느냐며 농을 던지던 기택이 종반부에서 냄새 문제에 민감히 반응하며 헐크처럼 돌변하는 것 역시 이를 통해 해명된다.

    ‘호모 사케르’로서 근세와 기택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실재는 늘 현실을 붕괴시킨다. 영화에서 동익네의 환상적 ‘스위트 홈’과 상징게임에 강하던 기택네 가족이 무너지는 것 역시 실재계에 속한 근세가 지하를 벗어나 햇빛으로 출현하는 순간 이뤄진다. 이 장면은 또한 최고주권자와 그 대척점에 위치한 호모 사케르(사회적 보호막 바깥에 위치한 벌거벗은 생명)의 역동성을 논한 이탈리아 사상가 조르조 아감벤의 이론과 기막히게 공명한다. 

    근세는 사채업자에게 쫓겨 스스로를 지하에 유폐한 유령 같은 존재라는 점에서 호모 사케르라고 할 수 있다. 동익은 그런 근세의 대척점에 취한 존재라는 점에서 최고주권자라고 할 수 있다. 동익은 근세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지만 근세는 동익이 움직일 때마다 실내등을 켜주고 ‘리스펙트’를 외칠 정도로 존경한다. 하지만 그 둘이 만나는 순간 양극과 음극이 만나듯 스파크가 발생하고 영화는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암굴왕’이나 다름없는 근세의 자리를 기택이 물려받는 장면 또한 울림이 크다. 반지하에 살던 기택은 더 깊은 지하에 사는 근세를 만나면서 자신의 미래를 예감한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비극이 닥치자 근세가 있던 곳으로 숨어들어가 자신들 가족 때문에 근세가 겪은 굶주림과 외로움의 고통을 홀로 짊어진다. 하지만 세상에 밀려 그 자리로 밀려든 근세와 스스로 속죄의 십자가를 짊어진 기택을 결코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근세가 남긴 모스부호로 세상을 향해 신호를 보내는 기택이 그 원뜻(신성한 인간)에 가까운 호모 사케르로 길이 기억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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