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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채식주의자, 동성애자였던 천재

5월 2일 500주기 맞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숨겨진 이야기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5-06 09:3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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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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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500주기다. 이를 앞두고 미국 전기작가 월터 아이작슨의 평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반백년 동안 그의 예술세계를 연구한 마틴 켐프 옥스퍼드대 예술사 명예교수의 책 ‘레오나르도 다빈치 : 그와 함께한 50년’이 잇달아 출간됐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인물을 거론할 때 빠지는 법이 없는 그가 21세기 한국에 태어나도 똑같은 천재성을 발휘했을까. 그가 살던 16세기보다 훨씬 자유로운 세상이 됐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는 물론 지금도 그가 처한 상황을 곱게 보지 않을 사람이 넘쳐 난다는 점에서 낙관할 순 없다. 이들 책을 읽어보면 그가 사생아로 태어났고, 주의력결핍 및 과잉행동장애(ADHD) 증세에 시달렸으며, 동성애자였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이중가정에서 자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다비드’. 열네 살 무렵의 레오나르도를 모델로 삼았을 개연성이 크다. [브리태니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다비드’. 열네 살 무렵의 레오나르도를 모델로 삼았을 개연성이 크다. [브리태니카]

    성(姓)인 다 빈치는 ‘빈치 마을 출신’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빈치 마을 출신의 레오나르도라는 소리다. 이 때문에 그를 변변한 성이 없는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의 가문은 귀족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 중산층이었기에 고향을 성으로 삼았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서쪽으로 30km가량 떨어진 농촌마을이다. 레오나르도는 이 마을 출신으로 5대째 공증인으로 일하던 피에로의 사생아였다. 피에로는 스물다섯 나이에 피렌체 정부 청사 맞은편에 위치했던 포데스타 궁전 외곽에 사무실을 둘 만큼 성공했다. 게다가 피렌체의 유명한 구두 장인의 열다섯 살 딸 알비에라와 약혼한 사이였다. 그런데 여름 휴가철 본가가 있는 빈치를 방문했다 약혼녀와 동갑내기 고아인 카테리나와 하룻밤 불장난으로 혼외 자식을 낳았다. 이 아이가 레오나르도였다. 

    피에로는 수완가답게 이 곤란한 상황을 돈으로 해결했다. 카테리나를 자기네 집안일을 봐주던 농부 겸 가마노동자 안토니오 디 피에로 델 바카와 결혼시키고 인근 농가에 살림을 차려준다. 놀랍게도 이들 부부는 금슬이 좋아 4남1녀를 낳았다. 



    친엄마 손에 자라던 레오나르도는 동생이 많아지자 다섯 살 무렵부터는 친할아버지 집에서 컸다. 결혼한 친아버지와 의붓어머니는 이 무렵 피렌체로 이사했는데 레오나르도가 열두 살 때 의붓어머니가 첫 출산을 하다 숨지자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피에로는 이후 3차례 더 결혼해 12~16명의 자식을 낳지만 레오나르도는 스물다섯 살 때까지 피에로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쉽게 말해 레오나르도는 아빠가 둘, 엄마도 둘인 ‘이중가정’에서 환영받지 못한 아이로 자란 셈이다. 한국이라면 ‘콩가루 집안’이라고 놀림받기 딱인 환경에서 자란 셈이다. 물론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기는 ‘사생아들의 황금기’(야코프 부르크하르트)로 불릴 만큼 사생아들이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차별도 덜 받았다. 시인 페트라르카와 ‘데카메론’의 저자인 보카치오,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 화가 필리포 리피가 사생아였고, 레오나르도와 함께 르네상스적 천재의 쌍두마차로 불린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경우는 사생아라는 사실이 가업인 공증인을 물려받는 데 걸림돌로 작용해 당시 지식인에겐 필수 코스인 ‘라틴어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주산학교’만 나왔다. 이것이 모든 것을 경험을 통해 터득하며,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스스로를 ‘무학자’로 낮춰 부르는 열등감의 원천이 된 것도 사실이다.

    주의력결핍과 동성애

    레오나르도가 26세 때 의뢰받은 미완성작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오른쪽 끝의 고개 돌린 청년이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으로 추정된다. [위키피디아]

    레오나르도가 26세 때 의뢰받은 미완성작 ‘동방박사의 경배’에서 오른쪽 끝의 고개 돌린 청년이 레오나르도의 자화상으로 추정된다. [위키피디아]

    물론 레오나르도는 어린 시절부터 빼어난 외모와 출중한 그림솜씨를 자랑했기에 할아버지와 이중부모로부터 모두 사랑받았을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양가 모두에서 눈치를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싫증을 잘 내고 주의가 산만했다. 특히 창의적이지 않고 반복적인 일을 할 때면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월터 아이작슨은 “그가 21세기 초 학생이었다면 감정기복과 ADHD를 치료하기 위한 약물 처방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성인이 된 뒤에도 한 가지 프로젝트를 미처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프로젝트에 달려들기 일쑤여서 유독 미완성작이 많은 화가였다. 그가 직접 그리거나 주도적으로 참여한 회화작품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20여 점에 불과하며, 이 중 대다수 전문가가 진품으로 인정하는 작품은 15점가량밖에 안 된다. 

    공증인인 그의 아버지가 ‘30개월 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면 아무런 보상 없이 그림을 몰수당해도 좋다’는 계약서까지 작성했던 ‘동방박사의 경배’조차 밑그림만 남아 있을 뿐이다. 레오나르도 역시 자신의 노트에 ‘무엇이라도 완성된 것이 있는지 말해봐. …말해봐. …말해봐. ’라는 메모를 되풀이 할 정도로 중도포기는 그의 고질병이었다. 

    동성애 성향에 대해선 이론이 없다. 레오나르도는 생애 최초의 기억에 대해 ‘요람에 누워 있는데 입에 솔개가 꼬리를 넣고 흔들었다’고 적었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1910년 이를 동성애 성향으로 분석하고 레오나르도가 그 욕망을 억압한 것이 뜨거운 창조성의 원천이 됐다고 주장했다. 미완성 작품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라고 했다. 프로이트의 분석 자체는 여러 오류가 드러나 비판받았지만 레오나르도의 동성애 성향을 보여주는 증거는 계속 쌓여갔다. 

    레오나르도는 천재 하면 떠올리는 은둔형 괴짜가 아니었다. 동시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금발 곱슬머리에 빼어난 미남인 데다 친근하고 관대하며 품위도 있어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긴 의복을 입었는데 레오나르도는 무릎까지 오는 짧은 장밋빛 튜닉을 걸치곤 했다.” 그는 남다른 패션감각을 지닌 데다 사교성도 좋은 미남이었다. 

    하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교제한 여인도 없었다. 이성간 성교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교접 행위와 거기에 사용되는 신체 기관은 너무도 역겨우므로, 얼굴의 아름다움과 행위자들의 치장과 억눌린 충동이 없다면 자연은 인류라는 종을 잃게 될 것이다.’ 

    그가 이성 대신 미소년 제자들과 ‘남성적 사랑’을 선호했다는 증언은 여럿이다. 심지어 스물다섯 살이던 1476년 자코포 살타렐리라는 남창과 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두 차례나 고발됐다는 문서자료도 나왔다. 당시 동성애는 중죄였지만 함께 고발된 이들이 모두 명문가 자제들이라 유야무야 넘어갔다. 

    레오나르도의 연인이었다고 추정되는 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잔 자코모 카프로티다. 천사 같은 곱슬머리에 악마 같은 미소를 지닌 그는 열 살 때부터 레오나르도의 조수로 함께 살았다. 하지만 도벽증세가 있고 사고를 많이 쳐 ‘작은 악마’라는 뜻의 ‘살라이’로 불렸고 그림솜씨도 형편없었다. 레오나르도는 평생 그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멋진 옷을 잔뜩 사줬고 심지어 유산도 물려줬다. 살라이가 슬쩍 빼돌린 그림 중에는 ‘모나리자’도 끼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살라이는 ‘성 세례 요한’은 물론, 레오나르도의 노트 속 관능적 젊은이의 모델로 끊임없이 등장한다. 살라이가 모델인 듯한 젊은이와 등을 맞댄 늙은이(레오나르도의 분신)를 그린 우의화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쾌락과 고통은 쌍둥이로 형상화된다. 한쪽 없이는 반대쪽이 절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왼손잡이 채식주의자

    살라이를 모델로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 세례 요한’(왼쪽)과 레오나르도의 노트 속 우의화 ‘쾌락과 고통’. [사진 제공 · ㈜북이십일 아르테]

    살라이를 모델로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 세례 요한’(왼쪽)과 레오나르도의 노트 속 우의화 ‘쾌락과 고통’. [사진 제공 · ㈜북이십일 아르테]

    레오나르도의 특이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왼손잡이라는 사실에 비해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그의 채식주의는 식물과 달리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도덕적 선택이었는데, 피가 흐르는 것은 먹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죽은 동물의 일부를 몸에 걸치고 싶지 않아 리넨 소재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 요즘 유행하는 비건(채식 근본주의자)의 선구자나 다름없었던 그는 이런 글도 남겼다. ‘당신이 정말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처럼 동물의 왕이라면 어떻게 혀의 만족을 위해 다른 동물을 키우고 그 새끼를 취한단 말인가.’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21세기 한국에 이런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태어나도 500년 전과 같은 천재로 빛을 발할 수 있을까. 주류의 속성과 배치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혐오의 독기를 품어내기 일쑤인 사람들의 등쌀을 견뎌낼 수 있을까. 

    레오나르도의 성취는 그가 사생아·주의력결핍·동성애자·왼손잡이·채식주의자라는 점을 극복해서 이뤄낸 것이 아니다. 반대로 비주류의 성향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기에 주류가 못 보는 것을 보고, 생각 못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을 ‘경험의 제자’라고 불렀다. ‘타인의 지식으로 무장한 채 자만심과 거만함에 취해 우쭐거린다’고 주류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체험하고 터득한 것만을 지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에는 ‘경험의 제자’가 얼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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