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63

2018.11.09

구기자의 '오타쿠글라스'

당신의 재능은 신의 축복인가, 저주인가

뮤지컬 ‘랭보’

  • 입력2018-11-12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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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기자의 '오타쿠글라스'

    ※관객이 공연장에서 작품과 배우를 자세히 보려고 ‘오페라글라스’를 쓰는 것처럼 공연 속 티끌만 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고자 ‘오타쿠글라스’를 씁니다.

    [사진 제공 · 라이브,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사진 제공 · 라이브,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여기 두 명의 시인이 있다. 한 사람은 바람 구두를 신고 어디에도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채 파편 같은 단상을 단숨에 시로 써 내려가는 인물, 세상의 ‘투시자’를 지향하는 10대 청년이다. 타오르는 불처럼 뜨겁고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다. 다른 한 사람은 10대 청년에게서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본다. 지켜야 할 게 많은 가장이 된 그는 ‘나도 예전에는 저렇게 자유로웠는데’ ‘나도 예전에는 언제 어디서든 시를 쓸 수 있었는데’라고 동경하면서 때로는 강렬하게 질투한다. 전자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 후자는 ‘시인의 왕’으로 불린 폴 베를렌이다. 

    “랭보? 영화 ‘토탈 이클립스’의 그 랭보?” 

    맞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눈부신 외모로 더 유명한 ‘토탈 이클립스’를 봤다면 랭보와 베를렌이 익숙한 이름일 터. 라이브㈜와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가 공동제작했다.

    가장 역동적인 시 낭송회

    작품 속 주인공이 ‘시인’이라는 건 일단 노래 가사와 대사가 미려하다는 뜻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시인은 피곤한 삶을 자처하는 마조히스트다. 자신을 괴롭혀 낳은 결과물이 바로 ‘시’다. 뮤지컬에는 랭보와 베를렌이 남긴 수많은 시구가 곳곳에 쓰였다. 이들의 시를 사랑한다면 4인조 라이브 밴드와 함께하는 이 작품이 세상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 낭송회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약 3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친 뮤지컬은 초연과 동시에 해외에도 진출하며 덩치 큰 대극장 작품들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기존 뮤지컬의 경우 인기 가수의 노랫말을 이야기 흐름에 맞춰 넣다 보니 ‘이 노래가 왜 거기서 나와’ 같은 상황이 종종 연출되곤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대사를 전부 새로 쓴 것처럼 자연스럽다. 나중에 보니 랭보의 대사에만 실제 시 4편(‘인내의 축제’ ‘태양과 육체’ ‘파리의 향연’ ‘고별’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쓰였다. 넘버에도 7편의 시가 들어갔다. 베를렌의 대사에는 ‘고뇌’ ‘잊혀진 노래’ ‘기괴한 사람들’ ‘랭보에게’ ‘옛날과 지금’ ‘마침내 새벽이 왔기 때문에’ 등 시 6편, 넘버에는 시 10편이 쓰였다. 랭보가 베를렌에게 완성하면 꼭 보여달라고 말하는 ‘초록’이라는 시도 실제로 베를렌이 쓴 작품이다. 눈에 보이는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시다. 

    공연 1시간 전 극장에 도착해 관객을 살폈다. 단체 관객을 제외하면 대부분 혼자 온 여성이었다. 극 내내 박수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로 강한 집중력은 오랜만에 느꼈다. 등장인물들의 신경전에 빠져들어 박수 칠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110여 분의 공연이 끝난 뒤에야 관객은 미뤄온 박수를 쏟아냈다. 연출가 성종완은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이들의 여정이 인생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중하지만 무겁지 않은 문학 뮤지컬

    [사진 제공 · 라이브,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사진 제공 · 라이브, 더블케이필름앤씨어터]

    랭보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 아래 자랐다. 시를 쓰면서 반항과 방랑이 시작됐고 16세에 학업을 포기했다. 이 때문에 그의 시 일부에는 가톨릭이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한 혐오가 가득하다. 진정한 시인이란 먼저 자기 자신을 깨닫고 정진하는 ‘투시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 랭보. 어쩌면 그는 답답한 현실 도피 수단으로 ‘시의 세계’를 택한 게 아니었을까. 

    처음 공연을 관람할 때는 베를렌에게 완벽하게 이입한 상태로 봤다. 돈 벌 생각은 없이 시만 쓰는 랭보는 베를렌에게 세상과 타협하지 말라고 호통친다. 작품을 보다 보면 랭보는 이상주의자, 베를렌은 현실주의자를 대변하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뮤지컬 ‘엘리자벳’의 ‘죽음’이라는 캐릭터처럼 랭보라는 캐릭터 역시 종종 실존 인물이 아니라 ​베를렌의 잊힌 동심, 꿈, 희망, 이상 등을 대상화한 것처럼 느껴진다. 

    ​베를렌과 들라에 역을 맡은 배우들은 랭보의 죽음 이전과 후의 세월을 별다른 장치나 분장 없이 연기로 표현한다. 이들의 다채로운 연기를 보는 것도 작품이 주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시인들이 현학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나 주고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첫 장면에서 베를렌 역의 배우 정상윤이 눈물을 후드득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 

    시대를 풍미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방랑시인 랭보 역은 박영수, 정동화, 손승원, 윤소호가 맡았다. 랭보의 시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긴 베를렌 역에는 에녹, 김종구, 정상윤이 캐스팅됐다.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지만 순수한 영혼을 가진 들라에 역은 이용규, 정휘, 강은일이 맡았다. 남자배우만 나오는 작품, 동거하는 두 남자, ​여성관객 예매율 90% 이상. 이것만 보면 ​‘이거 또 대학로에서 여성관객 대상으로 장사하려는 흔한 브로맨스극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뮤지컬에서 ​두 남자는 팽팽한 시상으로 교류하고 ​교감할 뿐, 그 이상의 접촉은 없다. 아, ​키스신이 있긴 한데 어떤 키스신인지는 ‘직관’하길. 

    ​뮤지컬 ‘나쁜 자석’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쓰릴 미’ 등이 묻어 있는 작품이다. 죽은 친구의 삶을 되짚어가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 은유적인 이야기 속 이야기, 두 남자의 긴장감과 애증 등에서 그간 봐온 극들이 문득 떠올랐다. ​들라에와 랭보의 관계가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앨빈과 토머스 같다면, 랭보와 베를렌의 관계는 ‘나쁜 자석’의 고든과 프레이저 같다고 할까. ​ 

    걸그룹 ‘모모랜드’의 팬이 찍은 ‘직캠’ 중 ‘연우 보러 갔다 주이에게 입덕하는 영상’이 유명한 것처럼 랭보 보러 갔다 베를렌에게 입덕할지도 모른다. 시인에게 ​주어진 재능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인생이 쉴 틈 없는 불행의 연속이라면 우리는 왜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것일까. 이 작품 덕에 오랜만에 서점에 들러 시집을 골랐다. 랭보처럼 처절한 ‘투시자’는 되지 못할지언정 언제든 ‘독자’는 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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