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2

2015.11.09

“영향력 안 키우면 ‘동네북’ 신세”

이민 1.5~2세 주축 미주한인위원회 출범…주류사회 파워그룹으로 성장해야

  •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장 edward.chang@ucr.edu

    입력2015-11-09 13: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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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향력 안 키우면 ‘동네북’ 신세”

    미국 백악관 내 아이젠하워빌딩에서 열린 브리핑에 참석한 미주한인위원회(CKA) 회원들(아래). CKA 연례회의 및 만찬이 성공적으로 진행됐음을 알린 CKA 인터넷 홈페이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선거 공화당 경선 주자는 수차례 한국을 “부자이면서도 안보를 미국에 의지하는 안보 무임승차 국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정작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군사원조를 받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압력단체 또는 파워그룹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미국 정치권에서 이스라엘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일종의 금기다. 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힘이 그만큼 막강하기 때문이다. 반면 미주 한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매우 미미한 수준이다. 최근 미국의 정·관계, 재계, 사회·문화·교육계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한인이 한자리에 모여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모색한 것은 이런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0월 23, 24일 미국 수도 워싱턴DC에서 열린 미주한인위원회(Council of Korean Americans·CKA) 연례회의 및 만찬 얘기다.

    멕시코계보다 더 열악한 아시아계 입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축하 메시지를 전달하고 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기조연설을 한 이날 행사의 주축은 미국 정치에 관심이 많은 이민 1.5세와 2세였다. 이들의 목표는 미주 한인의 권익을 신장하고 그들의 의견을 미국 정치권에 전달해 정책에 반영하는 것이다. CKA는 이를 위해 이번 행사를 연방의회 상원의원 회관인 러셀빌딩과 백악관에서 진행했다. 또 상원의원과 백악관 정책담당자 등을 만나 정책 설명을 듣고 한인 사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전달했다. 한인들이 미국 주류사회 정책입안자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은 건 상징적 의미가 있다.

    미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집단은 공공연히 차별과 모욕을 당한다. 트럼프가 멕시코계 이민자들을 ‘강간범 또는 살인자’라고 비하한 데서도 알 수 있다. 트럼프는 이런 막말을 퍼부어도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기는커녕 오히려 언론의 주목을 받고 지지율이 올라가는 현실을 악용하고 있다.

    눈여겨볼 것은 미국에서 아시아인의 정치적 입지가 멕시코계에 비해 더욱 열악하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한인이 시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건 1952년이다. 50년대 초반까지 한인은 미국 시민권을 받을 수 없었고 투표도 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당연히 기본권조차 보호받지 못했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시아인이 정치력 확대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에서 흑인 중심의 민권운동이 전개되면서부터다. 특히 일본계 이민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적국 시민’으로 낙인찍혀 포로수용소에 감금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조용히 정치활동을 확대했다. 그 결과 많은 일본계 정치인이 탄생했고, 결국 미국 정부가 포로수용소에 감금됐던 모든 일본계 미국인에게 사죄하고 배상까지 하는 정치적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중국계 이민자들 역시 정치력 향상을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미국 정부와 의회가 중국계 또는 아시아계를 차별할 경우 즉각 성명을 내고 대응책 마련을 요구한다. 최근 미국 사회에서 중국계 정치인이 괄목할 만큼 늘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계 이민자 사회의 지속적 노력과 조직력이 뒷받침된 결과다.

    반면 미국 사회에서 한인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좁은 편이다. 현재 미국에는 아시아계 하원의원이 10명 있는데 일본계 4명, 중국계 3명, 필리핀·인도·사모아계 각 1명씩이다. 한국계 하원의원은 없으며,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로스앤젤레스(LA) 시의회에서 올해 처음으로 데이비드 류 의원이 당선해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1992년 발생한 이른바 ‘LA 흑인 폭동’ 때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도 배상은커녕 사죄조차 받지 못한 미주 한인 사회는 이후 정치력 신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럼에도 정치력이 여전히 미미한 배경에는 미주 이민 1세 한인이 지닌 근본적 한계가 있다. 이들이 중심이 된 기존 한인 사회는 극심한 반목과 경쟁으로 분열돼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미국 내 정치력 신장’을 구호처럼 외치면서도 실상은 모국(한국) 정치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이중적 행태’를 보여왔다. 그 결과 미국 주류사회는 미주 한인 사회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고, 한국계 이민자는 미국의 정책 수립이나 한미관계 형성 등에 전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CKA가 과거의 갈등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민 1.5세와 2세 중심으로 구성된 것은 이런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00% 한국인, 100% 미국인

    “영향력 안 키우면 ‘동네북’ 신세”

    미주한인위원회(CKA) 연례회의에 참석한 그레이스 정 베커 전 법무부 민권담당 차관보, 해럴드 김 상공회의소 법제개선연구소 부대표, 티나 김 뉴욕시 부감사원장, 찬 박 상원법사위원회 자문위원, 폴 송 ‘커리지 캠페인’ 대표(왼쪽부터) 등 미주 한인 사회 인사들.

    이번 행사에 참석한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미주 한인 행사에 여러 번 참석했는데 이번처럼 내가 소외됐던 적은 없다. 동시에 이렇게 뿌듯한 감정을 느낀 적도 없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알아보지 못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미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뛰어난 공훈을 세운 끝에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16인’ 명단에 이름을 올린 고(故) 김영옥 대령(1919~2005)은 생전에 자신을 ‘100% 한국인, 100% 미국인’이라고 했다. 현재 미주 한인에게 필요한 의식이 바로 이것이다.

    CKA가 출범 첫 사업으로 고 김영옥 대령에게 미국 대통령 훈장을 수여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난 김 대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 사병들을 지휘해 세계 각지에서 ‘불패 신화’를 썼고, 그 공로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한국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 미국과 세계 평화를 위해 피 흘린 그가 미국 대통령 훈장을 받게 되면 미주 한인의 위상이 높아질 뿐 아니라 한미관계와 한일관계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CKA는 미국 정치인 또는 유명인이 반한·혐한 발언을 하거나 미국 내에서 한인과 타 인종 사이에 문제가 생길 경우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을 구축했다. 나아가 더 많은 한인 정치인이 탄생하도록 조직적인 후원활동도 전개할 계획이다. 앞으로 CKA가 미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단체로 발전하고 기금을 조성해 정치적 힘도 행사할 수 있게 되면 미국의 대외정책, 특히 한반도 통일 및 북한 관련 정책 수립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CKA 출범은 미국에서 미주 한인의 권익 신장과 정치력 향상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뜻한다. 미국 사회에서 개별적으로 성공한 기업가, 의사, 변호사, 교수, 고위공직자들이 모여 한인 사회에 힘이 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도 의미 있다. 이 첫걸음이 큰 힘으로 발전해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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