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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기(卒記)

모차르트의 영감과 살리에리의 성공을 동시에 좇다

체코 출신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1932. 2. 18~2018. 4. 13)

모차르트의 영감과 살리에리의 성공을 동시에 좇다

[위키피디아]

[위키피디아]

“그는 가장 용감한 겁쟁이였다.” 

체코 출신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이 영화 ‘고야의 유령’(2008)에 등장하는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 고야를 평한 발언이다. 고야야말로 평생 세속적 영광과 예술적 성취 사이에서 방황한 불쌍한 영혼이었다며. 이는 4월 13일 향년 86세로 숨진 사실이 뒤늦게 발표된 포르만의 인생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포르만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프라하의 봄’이 꼽힌다. 1968년 4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운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공산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서기장이 되면서 시작된 ‘프라하의 봄’은 그해 8월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의 진주로 일장춘몽이 돼버렸다. 당시 파리에서 할리우드 진출을 논의하던 그는 영화감독 작업을 계속하고자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동유럽 공산권 출신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감독 가운데 프랑스계 폴란드인인 로만 폴란스키와 더불어 가장 성공한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1994년 발표된 그의 회고록 ‘선회(Turnaround)’를 통해 그가 겪은 또다른 역경이 밝혀졌다. 포르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혼모였던 생모는 물론, 반평생 생부라 믿었던 인물까지 유대인강제수용소에서 처형된 유대인 혈통이었다. 그는 그것의 의미를 열여섯 살이 됐을 때 깨달았고, 영화감독이 된 뒤 자신의 생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미로 망명한 유대인 건축가임을 알게 됐다. 

자신의 인생 자체가 극적이란 생각에서였을까. 그는 훗날 극작가이자 체코 대통령이 되는 바츨라프 하벨과 같은 명문고를 다니며 극예술가의 꿈을 키웠고, 1964년 첫 장편영화 ‘블랙 피터’로 영화감독이 된다. 이후 그는 공산주의 관료주의를 풍자한 ‘금발 소녀의 사랑’(1964)과 ‘소방수의 무도회’(1967)로 체코 뉴웨이브의 선두주자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당국에 의해 상영금지 처분을 받다 결국 망명객 신세가 됐다. 



포르만은 평생 아웃사이더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저주받은 유대인 고아로, 냉전시대에는 반체제 예술인으로, 1968년 망명 후에는 상업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할리우드 감독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이를 위해 포르만은 평생 대중적 성공과 예술적 완성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아야 했다. 

그에게 각각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감독상을 안겨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아카데미 5관왕)와 ‘아마데우스’(1984·아카데미 5관왕)를 떠올려보라. 정신병동의 부조리함을 조롱하다 결국 광기의 포로가 돼버리고 마는 맥머피(잭 니컬슨 분)의 망연자실한 표정. 일상에선 무능하지만 예술에선 천재였던 모차르트(톰 헐스 분)와 예술적 평범함을 감추려 일상에선 지독히도 비범했던 살리에리(F. 머리 에이브러햄 분)의 현기증 나는 분열증세.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래리 플린트’(1996)는 또 어떠한가. 자본주의 논리에 투철한 포르노 잡지를 발행하면서 민주주의의 토대로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허슬러’ 발행인이야말로 평생 분열된 아웃사이더로 살아야 했던 포르만의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졸기(卒記)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다.






주간동아 2018.04.25 1135호 (p68~68)

  •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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