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30

2018.03.21

커버스토리

20년 전 미투가 일어났다면… 그래도 희망은 있다

정부·지자체·기업이 대책 마련 부심, 성폭력 예방교육 요청 쇄도

  • 입력2018-03-20 13:5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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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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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력 피해는 절대로 그 피해를 입은 본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불붙은 ‘미투운동(#Me Too)’이 대한민국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문학계, 종교계, 정치계 등 사회 각계각층으로 확대되고 있는 미투운동의 근간에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눈감아온 잘못된 성 인식, 양성불평등, 권력형 억압에 대한 강한 분노와 개혁 의지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사회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성폭력을 근절하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기록이다. 

    더욱이 미투운동은 누군가의 뼈아픈 고백과 고통 어린 기억의 소환을 자양분으로 삼는 만큼 결코 가볍게 혹은 헛되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 금세 끓었다 식어버리는 것이 아닌, 강한 연대로 꾸준히 이어져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1908년 3월 8일 여성 노동자 1만5000여 명은 미국 뉴욕 루트커스 광장에 모여 노동조합 결성권과 선거권을 요구했다. 당시 이들은 먼지가 자욱한 공장에서 하루 14시간씩 일하며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이날의 외침으로 2년 뒤 세계 최초 ‘의류노동자연합’이 탄생했고, 1911년부터는 세계 곳곳에서 같은 날 세계 여성의 날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권력형 성폭력 범죄 형사처벌 강화

    올해 우리나라 세계 여성의 날 행사의 화두는 단연 ‘미투’였다. 지금까지 언론에 드러난 한국의 미투 피해자는 모두 자신이 속한 조직의 상사나 권위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점에서 110년 전 루트커스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여성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 모두가 ‘포스트 미투’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미투운동이 전개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인식 변화는 분명 일어나고 있다. 3월 1일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가 일반인 106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8.6%가 ‘미투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동참 의사가 있다는 응답 역시 74.4%에 달했고, 피해자를 격려한다는 응답도 73.1%로 집계됐다.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묻는 질문에는 93.7%가 ‘매우 심각하다’고 답했다. 미투운동이 대중화되면서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상당 부분 변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지자체), 기업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3월 8일 정부는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을 발표했다. 여성가족부를 비롯한 12개 관계부처와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범정부 성희롱·성폭력 근절 추진 협의회’는 권력형 성폭력 범죄를 조직적으로 은폐하거나 방조하는 행위에 대해 형사처벌하고, 직장 내 성범죄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사업주는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의 대책을 발표했다. 

    먼저 형법 제303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의 법정형을 현행 징역 5년 이하, 벌금 1500만 원에서 징역 10년 이하, 벌금 5000만 원 이하로 2배 이상 높이기로 했다.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의 법정형도 현행 징역 2년 이하, 벌금 500만 원 이하에서 징역 5년 이하, 벌금 3000만 원 이하로 상향조정한다는 방침이다. 또한 사업주의 성희롱 행위는 물론, 성희롱 행위자를 징계하지 않은 것까지 징역형이 가능한 방안도 검토 중이다.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지하고 신변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도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역고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사 과정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 위법성 조각사유를 적극 활용하게 하고, 온라인상 악성 댓글에 대해서도 사이버 수사 등을 통해 엄정하게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이 밖에도 권력형 성범죄를 뿌리 뽑기 위한 대책이 정부 부처별로 추진된다. 고용노동부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직장 내 성희롱 익명 신고시스템을 이달부터 개설해 운영하고, 익명 신고만으로도 행정지도에 착수해 피해자 신분의 노출 없이 소속 사업장을 대상으로 예방 차원의 지도감독을 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번 미투운동에서 드러난 문화예술계의 심각한 성범죄를 근절하고자 민관 합동 특별조사단과 함께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신고·상담센터를 운영한다. 가해자는 보조금 등 공적 지원에서 배제하고 국립문화예술기관 임직원 채용 시 제외하는 등 제재를 시행할 방침이다. 

    여성가족부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공공부문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특별신고센터를 마련해 6월 15일까지 100일간 운영하며 국가기관, 지자체, 공공기관 등 4946개 기관을 대상으로 성폭력 관련 피해 사건을 접수받는다. 전화(02-735-7544)나 비공개 온라인 게시판(www.stop.kr), 등기우편 등을 통해 가능하다.

    男 직원들, 성폭력 예방교육에 귀 ‘쫑긋’

    3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 여성의 날 전국여성노동자대회에서 가면을 쓴 한 참가자가 미투 손팻말을 들고 있다. [뉴시스]

    3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3·8 세계 여성의 날 전국여성노동자대회에서 가면을 쓴 한 참가자가 미투 손팻말을 들고 있다. [뉴시스]

    미투운동이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되면서 국내 주요 기업도 긴장하는 모습이다. 대기업은 임직원 수가 수천에서 수십만 명에 달해 통제하기 쉽지 않은 데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해 외부로 알려질 경우 불매운동 등 최악의 상황까지 맞을 수 있다는 점에서 미투운동을 더욱 무겁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임직원 교육을 확대하는 것은 물론, 건전한 회식문화를 권장하는 등 혹시 모를 사내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예방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재계 한 고위 관계자는 “사실 대기업은 성희롱·성폭력 예방과 관련해 이미 엄격한 시스템을 작동 중이지만 언제, 어디서 문제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늘 조심해야 한다. 지난해 모 가구업체도 사내 성폭력 사건이 터지면서 불매운동이 확산되고 결국 홈쇼핑에서 퇴출당하지 않았나. 조직 내 성폭력은 피해자 개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뿐 아니라 소속 회사에도 엄청난 피해를 안길 수 있는 만큼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투운동의 확산으로 성폭력 예방교육 열풍도 불고 있다. 한국성폭력예방교육원 등에 따르면 최근 들어 도내 공공기관과 기업, 단체의 교육 요청이 전년 대비 2배 이상 늘어났다. 한국성폭력예방교육원의 경우 지난해 한 달 평균 60여 건의 교육 요청이 들어왔지만, 미투운동이 시작된 올해 1월부터 120건을 웃돌고 있다. 

    현재 공공기관은 성희롱·성폭력·성매매·가정폭력 등 4대 폭력 예방교육을 연중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민간기업은 성희롱 예방교육만 1차례 진행하면 되지만, 최근에는 민간기업에서도 성희롱뿐 아니라 나머지 폭력 관련 예방교육을 요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안명자 한국성폭력예방교육원장은 “성폭력·양성평등·직장 내 예절 등 다양한 커리큘럼을 요구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 강의 청취 분위기도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질문이 많아졌고, 강의 후 자료를 개별적으로 요청하는 경우도 늘었다. 특히 그동안 교육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남자 직원들이 요즘에는 ‘여성 직원들을 대할 때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이처럼 미투운동은 짧은 기간에 법적제도 마련과 조직문화 변화 등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미투운동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특히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정봉주 전 의원의 성폭력·성추행 논란이 정치적 이슈로 확대되면서 미투의 본질과는 무관한 새로운 갈등이 일고 있다. 피해자들이 불순한 의도로 해당 사건을 확대 혹은 조작했다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갈등이다. 이러한 일각의 시선은 ‘여성 기피 현상’으로 확대되는 분위기다.

    안희정 미투,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의혹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도 극명하게 나뉜다. 일각에서는 성폭력 피해자인 김지은 전 수행비서를 향해 “성폭행을 당했으면 바로 신고해야지, 수개월간 당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 “안 지사와 잠자리가 있었던 건 맞더라도 정말 강압에 의한 것인지 철저히 밝힐 필요가 있다” 등의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성폭력 상담 전문가들은 안 전 지사의 사건을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으로 분석한다. 

    가스라이팅은 ‘가스등(Gas Light)’이라는 연극에서 비롯된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다. 이 연극에서 남편은 집 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만들고는 아내가 집 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아내를 매도한다. 이에 아내는 점차 자신의 현실인지 능력을 의심하고 끝내 남편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김지은 씨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김씨는 안 전 지사로부터 받은 피해를 폭로하는 인터뷰에서 “(지사님이) 항상 ‘다 잊어라’고 얘기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잊어야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나에게 분명 있는 기억이지만 없는 기억으로 살아가려고 모든 것을 도려낸 채 지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변신원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김씨는 안 전 지사에게 평소 좋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심지어 같은 비전을 갖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만큼 성폭행을 당하고서도 자기불확실성에 놓이게 됐을 것이다. 자신이 입은 피해가 정말 피해가 맞을까 끝없이 자신을 의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형법 제303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은 폭행·협박이나 피해자의 저항 여부를 따지지 않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실상의 지배력을 행사했는지가 문제가 된다. 현재 일고 있는 많은 추측과 논란에도 상당수 전문가가 “김씨는 명백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정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안 전 지사와 김씨는 도지사와 수행비서로 업무상 고용관계가 확실하다. 너무나 전형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 멀리 있지 않다”

    3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소속 노동자들이 3·8 세계 여성의 날 전국여성노동자대회를 마친 후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왼쪽). 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 오전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들이 성폭력 저항운동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상징하는 하얀 장미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뉴시스]

    3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소속 노동자들이 3·8 세계 여성의 날 전국여성노동자대회를 마친 후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왼쪽). 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 오전 광화문광장 인근에서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들이 성폭력 저항운동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상징하는 하얀 장미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뉴시스]

    정봉주 전 의원과 관련한 미투는 정 전 의원이 ‘성추행 의혹’을 보도한 언론사 4곳의 기자 6명을 공직선거법 제250조 허위사실공표죄 혐의 등으로 고소하면서 ‘무고’라는 좀 더 강력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정 전 의원의 주장대로 무고가 맞다면 이 역시 당사자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투운동이 확산되기 전 유명인사의 성폭행 사건에서 무고죄가 성립된 경우가 적잖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성폭행·성추행은 대부분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만큼 증거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해자가 수치스러움에 스스로 증거를 없애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피해자에게 성폭력 증거를 모두 입증하라는 식의 조사 방법은 분명 문제가 있다. 수사관들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전형적·고전적인 몇 가지 상을 만들어놓고 그 틀에 끼워 맞춰 수사한다는 내용이 학계에 계속 보고되고 있다. 따라서 경찰, 검찰 조사관의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양성평등 실현에 앞서 우리 사회가 반드시 겪어야 하는 ‘성장통’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 고비를 넘어야만 미투운동이 성폭력을 넘어 ‘젠더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젠더(gender)는 생물학적 성(sex)과 달리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성을 의미한다. 권력위계에 따른 폭력도 단순한 성폭력이 아닌 젠더폭력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젠더적 관점의 차별을 극복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하려면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현재 일고 있는 미투운동에 대해서도 “20년 전 이미 일어났어야 하는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노재윤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과장은 “1980년대 말 우리나라 대학에 여성학이 처음 도입됐고, 대중문화에서도 양성평등과 관련한 다양한 담론이 활발하게 오갔다. 그때 그 동력을 이어갔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2000년대 들어 퇴보했다고 보는 전문가가 많다. 지금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 미디어 환경의 발달 등으로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만큼 초중고교의 인권교육을 비롯해 공공·민간기업에서의 젠더교육이 활성화된다면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결코 멀리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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