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5

2017.11.29

특집 | 알·쓸·지·잡

프랑스 계몽주의, 남미 독립은 지진 덕분?

역사 속 대지진 이야기…간토대지진은 일본 군국주의에 영향 끼쳐

  • 입력2017-11-28 17: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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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본을 강타한 대지진은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여전히 인간은 자연 앞에 미약한 존재임을 실감케 했다.[동아DB]

    동일본을 강타한 대지진은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여전히 인간은 자연 앞에 미약한 존재임을 실감케 했다.[동아DB]

    ‘지진보다 더 우리의 질서의식에 강한 충격을 주는 재앙은 없다. 허리케인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신의 자비로운 배려, 즉 섭리와 연관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진은 땅속 깊은 곳에서 기인하며 흔히 신의 분노나 무관심 또는 부존재와 연관된다.’ 

    미국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가 저서 ‘신호와 소음’에서 한 말이다. 현대적 내진설계가 개발되기 전 지진은 곧 한 세계의 붕괴를 의미했다. 이 때문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화가 나면 삼지창을 바닥에 내리꽂아 지진을 일으킨다’는 그리스신화 내용처럼, 지진을 ‘신의 분노’로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러웠는지 모른다. 

    역사상 최악의 지진으로 기록된 1556년 1월 23일 중국 산시성 지진은 8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365년 7월 21일 그리스와 리비아, 이탈리아 등 지중해 일대를 폐허로 만든 대지진 당시에도 수십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저술가 케네스 데이비스는 저서 ‘지오그래피’에서 이 지진의 여파로 거대한 지진해일(쓰나미)이 발생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덮치면서 주민 수천 명이 추가로 익사했다고 기록했다. 이 일로 당시 로마제국 수도로 영화를 누리던 지중해 도시 키레네는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반면 지진이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1923년 9월 1일 일본에서 발생한 간토대지진이 한 사례다. 미국 저술가 앤드루 로빈슨의 책 ‘지진 : 두렵거나, 외면하거나’에 따르면 ‘일본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된 이 지진은 점심시간 직전에 일어났다.


    근대화의 출발점 된 대지진

    ‘수도인 도쿄와 개항지 요코하마, 그리고 주변 지역이 4~5분 동안 흔들렸고, 그 직후에 지진으로 일어난 11m 높이의 거대한 쓰나미 파도가 덮쳤다. 9월 3일 아침까지 최소한 14만 명이 사망했고, 도쿄의 3분의 2, 요코하마의 5분의 4가 재와 파편으로 변했다. 18km2에 달하는 도쿄 지역이 전소됐다.’ 



    로빈슨의 기록이다. 이처럼 거대한 자연 재앙이 기존 질서를 한순간에 파괴하면서 일본 사회는 급속히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지진 피해 복구비용을 마련하고자 경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군인이 실권을 잡았고, 이는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을 걷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도쿄이야기’를 쓴 작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간토대지진이 일본 시민의 일상적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지진 전에는 도쿄시민들이 백화점에 들어갈 때 자신의 신발을 벗고 상점에서 제공하는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그러나 지진 이후 자기 신발을 신은 채 가게에 들어가는 문화가 생겼다. 일본 건축 양식도 급속히 서구화됐다. 전통 목조주택이 사라진 자리를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둘 차지한 것이다. 

    서양인이 사고의 ‘근대화’를 이룬 배경에도 대지진이 있다. 1755년 11월 1일 가톨릭이 크게 기념하는 ‘모든 성인의 날’(All Saint’s Day·만성절)에 맞춰 발생한 포르투칼 리스본대지진이 그 계기로 꼽힌다. 로빈슨의 ‘지진 : 두렵거나, 외면하거나’에 따르면 이날 겨우 15분 만에 대도시 하나가 ‘폐허’가 됐다. 

    ‘진동이 시작되었을 때는 많은 리스본 시민이 도시의 수많은 화려한 성당에서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교인들에게는 참으로 끔찍한 순간이었다. 교회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떨어지는 수많은 돌덩어리에 깔려 죽었기 때문이다. 종교재판소 역시 무너졌고, 화려한 새 오페라하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빈슨에 따르면 이후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해 ‘물가에서 180m 떨어진 길거리와 광장, 정원까지 전부 집어삼켰다. (중략) 파괴된 범위가 워낙 넓어서 20세기 초반까지도 다 복구가 되지 못했을 정도였다.’ 이 참사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물질적 피해는 추산이 불가능했다. 유럽 전반에 미친 정신적 충격도 매우 컸다.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은 저서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에 이렇게 썼다. 

    ‘리스본 지진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의 홀로코스트만큼이나 엄청난 충격을 안겼습니다. 나치스의 잔혹행위는 우리에게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었던 반면에, 리스본 지진은 하느님의 성품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이 리스본처럼 자신을 신실하게 섬기는 도시에, 그것도 모든 성자를 기리는 만성절에 그처럼 잔혹한 자연현상이 덮치도록 허락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한 번의 타격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세상의 선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자연이 독립을 방해한다면 맞서 싸우겠다’

    프랑스 작가 볼테르의 풍자소설 ‘캉디드’도 바로 리스본대지진을 배경으로 쓰였다. 볼테르가 대지진 4년 후 발표한 이 작품에는 리스본의 지진을 막으려고 사회적 약자 몇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식을 벌이는 ‘현자(賢者)’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이것으로 ‘신의 분노’를 잠재우려 하지만, 사형이 집행된 날 리스본에는 다시 지진이 덮친다. 이 작품은 빅토르 위고가 ‘이탈리아에 르네상스, 독일에 종교개혁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다’고 했을 만큼 프랑스 근대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계몽주의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대지진과 밀접한 역사적 인물 가운데는 19세기 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도 있다. 

    1783년 스페인령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난 볼리바르는 이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1811년 7월 5일 카라카스를 수도로 삼아 독립을 선포할 때 중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26일 카라카스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 베네수엘라의 첫 공화정부는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스페인은 이 지진을 ‘신이 반란군에게 내린 징벌’이라고 주장하며 반격 도구로 삼았다. 이후 망명을 떠난 볼리바르는 남미 전역을 주유하며 독립세력을 더욱 규합했고, 1817년 남미 전체 독립투쟁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1819년 콜롬비아, 1821년 베네수엘라, 1822년 에콰도르 등의 독립을 차례로 이끌면서 ‘자연이 우리를 거역한다면 우리는 맞서 싸워 복종시킬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은 ‘자연을 복종’시키기는커녕 지진 발생의 비밀조차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2009년 4월 이탈리아 중부 라퀼라에 규모 6.3 지진이 발생해 309명이 숨졌을 때 이탈리아 사법부는 지진 발생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이탈리아 국립재난위원회 소속 과학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에 세계 과학계가 크게 들끓고 과학전문지 ‘네이처’는 ‘지진 예측은 현재 과학 수준에선 ‘신의 영역’에 해당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탈리아 과학자들은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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