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5

2017.09.13

인터뷰

“전우 명예훼손하는 군의 ‘적폐’ 목숨 걸고 바로잡겠다”

‘故 김훈 중위 아버지’ 김척 장군의 끝나지 않은 싸움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7-09-12 10: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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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우들이 함께 싸워준 덕분입니다. 이게 우리한테는 전투였죠. 그리고 그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국방부가 9월 1일 고(故) 김훈 중위를 순직자로 공식 발표한 데 대한 소감을 물었을 때 아버지 김척 예비역 장군(사진)이 한 얘기다.

    그 는 1961년 육군사관학교(육사)에 입교해 97년 11월 육군 중장으로 전역했다. 36년 군 생활 동안 제15사단 소대장, 수색대대장, 한미연합군사령부(연합사) 기획참모부 기획처장, 제1군단 군단장 등을 지냈다. 대통령 표창을 비롯해 월남무공훈장, 보국훈장 등을 받았다. 장남은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 뒤를 따르겠다는 꿈을 품었고, 92년 육사 52기로 입교해 96년 3월 소위가 됐다. 임관 후엔 최전방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근무를 자원했다. 이번엔 아버지가 아들을 자랑스러워할 차례였다. 김 장군은 그 아들을 꼭 ‘김 중위’라고 불렀다.

    “처음엔 이 길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 내 임지를 따라다니느라 서른여섯 번이나 이사해야 했던 집사람이 김 중위를 많이 말렸죠. 그런데 꼭 군인이 되겠다더군요. 그러고는….”
    김 장군이 “다 알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기자를 바라봤다.





    “평생을 바친 대한민국 군대가 겨우…”

    그렇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을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났다. 1998년 2월 24일 낮, JSA 지하 벙커에서 김 중위가 관자놀이에 관통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육군은 신속하게 ‘최전방 부대에서 장교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자살 원인은 불명. 그것이 전부였다. 3성 장군 아버지를 따라 명예로운 군인이 되려 했던 김 중위는 이유 없이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약한 패배자’가 돼 있었다. 그로부터 19년 만에 국방부가 ‘순직’을 인정하기까지 김 장군은 자신과 아들이 평생을 바쳐 충성했던 ‘대한민국 군’을 향해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를 벌여야 했다. 

    아 들이 왜 사망한 걸까, 그 이유를 알아내려는 김 장군의 눈에 석연찮은 점이 하나둘 들어온 게 시작이었다. 문제를 제기하면 군은 회피하고 발뺌하다 ‘우리가 설명해주는 대로 믿으라’고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석 달 전까지만 해도 깍듯이 예우하던 ‘별’에게조차 군은 폐쇄적이고 고압적이었다. “나도 이런 꼴을 당하는데 그동안 군에서 자식을 잃은 다른 부모들은 어땠을까. 어떻게 우리 군이 이럴 수 있나.” 김 장군은 가슴을 쳤다. 이대로 넘어가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이걸 보세요. 내가 이걸 구하는 데만 여러 달이 걸렸어요.”

    김 장군이 1998년 당시 연합사 ‘상황보고’ 문건을 하나 꺼내 보였다. 제목이 ‘JSA 경비중대 소속 소대장 자살’이다. ‘수수일시’ 기록에 따르면 연합사는 2월 24일 오후 2시 20분 이 문건을 받았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12시 20분 김 중위 시신이 처음 발견된 뒤, 사망 원인을 밝히려고 미군 수사대가 현장에 도착한 게 오후 3시 반이다. 우리 군 수사대는 오후 4시 40분에야 사고 현장에 들어갔다. 한미 양국 군 어디에서도 조사를 하기 전, 이미 연합사는 ‘사고자가 권총으로 두부를 발사하여 현장 사망’이라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받은 것이다. 김 장군에 따르면 국내 언론이 ‘전방 부대 장교 자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날 오후 4시 43분이다. 그가 “애초부터 자살로 결론을 내려놓고 짜맞추기식 수사를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나”라고 의혹을 제기한 출발점이다.

    이상한 점은 더 있었다. 당시 군은 김 중위가 총격에 저항한 흔적이 없고,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권총이 김 중위 본인 것이라는 ‘사실’을 자살의 유력한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는 모두 사실과 달랐다. 사건 당일 김 중위 손목시계는 파손된 상태였으며, 벙커 내에 있던 대인(對人) 지뢰의 스위치 박스도 망가져 있었다. 군 수사대는 뒤늦게 현장 사진을 확인한 유족 등이 이를 문제 삼기까지 몸싸움의 정황 증거가 될 수 있을 이런 단서들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사건 발생 당일 현장의 혈흔을 지우는 등 지하 벙커를 대대적으로 청소하고, 이튿날은 페인트칠까지 새로 했다. 이로써 증거는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김 중위는 비무장지대에서 경계, 수색, 매복, 정보 수집 등을 담당한 장교였어요. 그런 사람이 공무수행 중 시신으로 발견됐으면 군대는 원인을 철저히 조사해 한 점의 의혹도 남지 않도록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군이, 어떻게 최전방에서 이럴 수 있느냐는 거죠.”

    연합사 문건의 ‘접수 시간’을 가리키는 김 장군의 손가락이 흥분으로 가늘게 떨렸다.

    그 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는 등 평생 전장에서 살아온 무관이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날, 군에서 사고에 대한 전화를 받고 처음 든 생각도 ‘대통령 취임식을 하루 앞두고 적이 침투했구나. 그 과정에서 김 중위가 총을 맞았구나’였다. 부대로 달려가면서 속으로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라고 계속 되뇄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는 아들의 주검을 마주하고, 군의 형편없는 사건 처리 태도를 마주하고, 그 문제를 따지는 김 장군을 ‘아들의 죽음 앞에서 제정신을 잃은 유족’ 정도로 치부하는 옛 동료들을 마주하며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간인이 밝힌 사건의 진실

    “새 정부가 출범하기 하루 전날이었죠. 김 중위 부대 지휘관이 새 정부 육군 참모총장으로 내정된 상태였고요. 그럴 때 군에서 사건을 처리하는 태도가 어떠리라는 걸, 사실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압니다. 사건이 타살이면 지휘관 책임 문제가 생기고 그러면 진급을 못 해요. 나머지 사람들도 그렇죠. 조사가 시작되면 계속 불려 다니고 이래저래 피곤해지는데, 그러고 싶겠습니까. 이왕 죽은 사람을 자살자로 만들면 모두가 편안해져요. 자기 안 다치려고 필사적으로 죽은 사람한테 달려들 수밖에요.”

    게다가 군은 폐쇄적이고 수직적이며 보안을 최우선으로 한다. 사고 발생 시 수사팀이 도착하기 전 현장을 훼손하고, 관련자 알리바이를 맞추는 게 어렵지 않다. 수사팀 또한 부대 지휘관이 관할한다. 사건 관련자의 은폐 노력에 맞서 진실을 찾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 안에서 유가족이 진실을 밝히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 장군이 보기엔 김 중위 부대에서 벌어진 상황이 바로 그랬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이번엔 유가족이 3성 장군, 피해자가 육사 출신 장교라는 점이었다. 김 장군에겐 30여 년간 함께 군 생활을 해온 ‘전우’들이 있었고, 김 중위의 동기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기에 평소 김 중위를 믿고 따르던 ‘정의감 있는’ 사병들이 힘을 보탰다.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고 동분서주하는 김 장군에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도움의 손길이 오곤 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권총의 진실도 그렇게 드러났어요. 한 사병이 우리에게 ‘권총의 총기번호를 잘 보세요’라고 하고는 가버린 겁니다. 간신히 확인해보니 현장에서 수거된 권총과 김 중위 권총 소지증에 적힌 총기번호가 서로 달랐어요.”

    김 중위 사망 후 7개월이 지난 그해 9월 비로소 드러난 사실이다. 김 장군이 군 수사 책임자에게 이 사실을 추궁하자 그는 “충격적이다. 당연히 김 중위 것인 줄 알고 총기번호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답을 내놓았다. 얼마 지나고는 “그날 김 중위 권총이 고장 나 다른 사람 권총을 가져간 것”이라고 해명했다. 

    만사가 그런 식이었다. 유족이 갖은 노력으로 수사 과정의 문제점을 찾아내도 군은 아무 일도 아닌 듯 넘기곤 했다. 해외 법의학전문가와 미군 수사대가 김 중위 손에 남은 화약흔 등을 근거로 ‘자살로 단정할 수 없다’는 의견을 보내와도 묵살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대통령 아들이 죽어도 어떻게 안 되는 거야.”

    김 장군이 한숨을 내쉬며 토해낸 혼잣말이다.

    그 가 말했다. “내가 분노하지 않았으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았으면 벌써 지쳐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김 장군은, 그리고 그의 아내와 김 중위의 하나뿐인 동생은 정말 죽을힘을 다해, 진실을 밝히겠다며 ‘목숨을 걸고’ 싸웠다. 군이 없애버릴 수 없는 진짜 증거를 찾으려고 전역하거나 전출한 김 중위 소대원을 수소문하며 전국을 떠돌았다.

    김 장군을 만난 곳은 서울역 근처 한 커피숍이었다. 그들 가족은 한때 바로 이곳, 서울역 광장에서 진상규명을 호소하며 서명운동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군복 입은 군인뿐 아니라 사복 입은 군인들까지, 울부짖는 그의 아내에게 찾아와 ‘포기하지 말라’며 지지 서명을 해주고 가곤 했단다. 한 마디 두 마디 필요한 정보를 건네주는 사람도 있었다. 기차역 근처에서 약국을 하던 김 중위의 이모도 오가는 장병들에게 사건 내용을 전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김 중위 사건을 아는 이들을 찾아내고,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침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모티프가 된 전방부대의 군기 문란 사건까지 밝혀냈다. 김 중위 소속 부대원들의 북한 불법 접촉 얘기다.



    명예로운 군인을 비겁자로 만드는 군대

    김 장군은 “군이 사망 사건을 처리하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했다. ‘해당 부대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사망자 개인이 이상했다’고 몰고 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집안의 우환, 여자 문제, 부채 등까지 끌고 들어온다. 결국 사망자는 ‘모범부대’와 전우들에게 폐를 끼친 비겁자가 돼 유족과 친지의 가슴에 큰 상처만 입힌 채 잊히고 만다.

    김 중위 사건 때도 군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해당 부대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강변했다. 그런데 김 장군이 아들의 부대 동료들을 통해 들은 얘기는 딴판이었다. 김 중위가 몸담고 있던 최전방 부대 소대원들이 1997년 여름부터 밤 시간을 이용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 초소를 드나들고, 한 번 갈 때마다 여러 시간씩 머물며 각종 선물까지 받아왔다는 것이다. 김 중위가 이 사실을 파악하고 바로잡으려 했던 정황도 드러났다. 김 장군이 부대에서 받은 김 중위 유품 중 독일제 연고가 있었는데 약국을 운영하는 김 중위의 이모에게 확인한 결과 국내에서 유통되는 제품이 아니었다. 김 장군은 “김 중위가 일부 병사의 북한 불법 접촉 사실을 알고 남몰래 물증까지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여겼다.

    이 사실은 김 장군 측의 조사와 국회 국방위원회의 추가 조사로 전모가 밝혀지면서 1990년대 말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전방 부대원의 불법적 대북접촉을 차단하고 군기를 바로잡으려 한 국군 장교가 이에 불만을 품은 자에 의해 살해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지만, 군은 이번에도 ‘일부 병사가 호기심에 월북했을 뿐’이라며 ‘김 중위가 자살했다’는 결론을 바꾸지 않았다.



    국방부는 군 사기 떨어뜨리는 ‘강도떼’

    유족, 국회, 언론 등에서 지속적으로 각종 증거를 내놓으며 ‘타살 의혹’을 제기하면서 군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이듬해 4월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김 중위 사건을 조사해야 했다. 그러나 처음 수사를 맡은 육군 제1군단 헌병대, 2차 수사를 한 육군본부 검찰부, 그리고 3차 수사를 진행한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합조단)까지 모든 군 수사의 결론은 ‘자살’이었다. 김 장군이 보기에, 이 기간 군이 공을 들인 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오히려 김 중위가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는 쪽이었다.

    1999년 합조단이 내놓은 수사 결과의 ‘종합판단’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김 중위는 (중략) 평소 내성적인 성격관계로 타 소대장 및 소대원들보다 업무 면에서 뒤지는 무력감과 소외감을 해소하지 못한 채 고민해오다가, 사고 다음날로 예정된 업무보고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자살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미화한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통하여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군은 ‘한 사병이 김 중위 사망 당일 그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봤다’며 이를 자살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김 장군이 이에 반발해 “군 조사단이 진실을 은폐·왜곡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과정에서 이러한 군의 주장은 상당 부분 뒤집어졌다.

    이 사건을 담당한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합조단은 (중략) 김훈이 자살을 미화한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중략) 사건 발생 이후 촬영한 사진에 의하면 이 사건 사고 당일 김훈의 책상 위에는 적극적 생활태도를 권장하는 내용이 담긴 일본 작가 나리카와 도요히코의 수필 ‘아침을 여는 3분 성공체크’가 놓여져 있었던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바,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김훈이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하였다는 합조단의 판단은 다소 무리한 추측이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한 일병이 3차 수사 과정에서 이 사건 사고 당일 06:10경 막사로 내려가다가 김훈이 소대장실과 식당 사이의 철제난간에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것을 2~3m 거리에서 목격하였다는 취지로 진술하였고 합조단은 이러한 진술내용을 그대로 기재하였으나, 이 사건 사고 당일 문산 지역의 일출시간은 07:11이고 위 철제난간 부근에 별다른 외부 조명시설이 없는 사실에 비추어 (중략) 위 진술은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할 것’이라는 대목도 있다.

    당 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사건에 대해 ‘김훈이 사망하자마자 이 사망 사고가 미군 측과 대대장 등 부대원을 통하여 자살로 성급히 판단되었고, 그에 따라 당일 언론을 통하여 김훈이 자살하였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부검을 담당한 군의관은 부검 직후 자살로 예단한 사체검안서를 작성하다가 이를 삭제하는 등 사건 발생의 초기부터 제대로 된 조사나 수사 없이 김훈이 자살한 것이라는 예단이 부대 내·외부에 지배적이었고, 그러한 정황이 수사기관의 수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바, 과연 군사법경찰관에게 진상규명의 의지가 있기는 하였던 것인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초동조사 실패 때문에 사건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워졌음을 비판한 것이다.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김 중위 가족에 대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군을 제외한 모든 국가기관, 즉 법원,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 등은 김 중위 사건을 조사할 때마다 유사한 결론을 냈다. 사건 초기 대응 실패 때문에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를 분명히 밝히기 어렵고, 이러한 ‘진상조사 불능’의 책임이 군에 있다는 것이다. 육사총동창회는 이런 조사 결과를 근거로 ‘김훈 중위는 자살이 아닌 ‘진상규명 불능자’이니 순직 처리를 해달라’는 청원을 냈다. 권익위도 국방부에 공식적으로 순직 결정을 권고했다.

    그러나 군은 계속 ‘김 중위는 자살자’라는 수사 결과를 고집했다. 이를 위해 망자의 명예를 훼손하기도 했다. 1999년 4월 14일 국회 국방위원회 회의록엔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던 서청원 국방위원과 국방부 합조단장이 질의응답을 나누는 부분이다.

    서청원 국방위원 단장님은 육사 나오셨습니까.

    국방부 합조단장 그렇습니다.

    서청원 김훈 중위가 육사를 졸업할 때 몇 등으로 졸업했습니까.

    합조단장 230여 명 중에 71등입니다.

    서청원 그러면 굉장히 우수한 성적이지요?

    합조단장 굉장히 우수한 장교입니다.

    서청원 단장 스스로 김훈 중위가 우수한 장교라고 얘기해놓고 비록 그 사람이 자살했는지, 타살했는지는 아직 더 경위를 밝혀야겠지만, 일국의 육군 장교를 그렇게 비하해서 아주 몹쓸 장교처럼 이렇게 수사보고서를 내도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이렇게 공개돼도 되는 것입니까. 대한민국 육사를 71등으로 졸업한 장교가 죽었는데, 그 장교에 대해 이렇게 모욕적으로, 군대에서 필요 없는 얘기를 써서 보고서에 넣어도 되느냐 이겁니다. 단장도 육사 나왔지 않소. 그러고서 무슨 쓸데없는. 그렇게 죽은 사람을 모독하고 비하시키고. 단장의 처사가 비인간적이요. 흥분해서 못 견디겠어요. 그렇지 않소?

    이런 상황은 김 장군을 몹시 괴롭혔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대한민국 군대는 조국을 위해 싸운 전우의 명예를 지켜주기는커녕, 오히려 비겁자로 만들어버렸다. 강도떼와 다를 게 뭐냐”고 울분을 토했다. 이런 군의 태도에 김 중위의 동기였던 육사 출신 장교들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례적으로 많은 수가 임관 5년 차에 전역을 선택해 군을 떠났고, 상당수 동기가 지난 19년간 군 안팎에서 김 장군의 진실 추적과 김 중위 명예회복에 힘을 실어줬다고 한다.



    국민의 신뢰 받는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야

    2006년 김 중위 추모식 때는 동기회에서 찾아와 ‘훈이는 인내심과 끈기가 탁월한, 정의롭고 사명감이 투철한 젊은 장교의 상징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몇몇 사람은 우리의 기억과는 다르게 훈이를 유약하고 책임감 없는 장교로 (평하고), 더러는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로 그의 삶과 인격을 폄훼하고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사실 그대로의 훈이를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들 양심의 소리를 따라서 보태거나 덜지도 않고 우리가 기억하는 그대로를 널리 알리도록 할 것’이라는 내용의 추모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 장군의 동기들과 육사총동창회도 힘을 보탰다. 그런 응원이 김 장군이 계속 싸움을 이어갈 수 있는 배경이 됐다.

    김 장군은 “군인이 전쟁에서 총을 드는 건 전우 때문이다. 크게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싸우지만, 그 바탕에는 전우에 대한 믿음이 있다. 전우가 전장에서 내 목숨을 구해주고 명예를 지켜줄 것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전장에 서겠나. 그런데 우리 군은 전우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걸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래서는 아무리 비싼 무기를 가져도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19년을 싸우는 사이 여러 번 정부가 바뀌었고,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군 의문사를 ‘적폐’로 규정했다. 권익위 권고 후에도 5년을 버티던 군은 그제야 비로소 김 중위를 순직 처리했다. 김 장군은 아들의 순직 결정이 난 뒤 무척 많은 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며 “특히 군대에서 아들을 잃고 그동안 별다른 대응도 못한 채 고통스럽게 살아온 ‘엄마’들이 많이 연락해왔다. ‘이렇게 쉬운 걸 그동안은 왜 안 해줬나’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 편히 지내라’는 얘기를 하더라”고 전했다.

    “그분들 얘기를 들으며 더더욱 이 싸움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죠. 나 같은 사람도 ‘김척이 아들 잃더니 정신병자가 됐다. 자기 아들 국립묘지에 보내려고 군을 공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일반 유족은 어디 가서 말 한마디 붙이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잖아요. 이 말 꼭 하고 싶습니다. ‘지금 한국은 3성 장군의 아들도 군대에서 죽으면 도리가 없는 나라다. 이래서는 안 된다. 정의로운 국가라면 나라를 믿고 금쪽같은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가 마음 아프지 않게 해줘야 한다. 그렇게 해야 군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 진짜 강군이 될 수 있다’라고요.”

    김 장군은 “군이 19년 전 김 중위 사건을 제대로 조사했다면, 그리고 그의 명예를 지켜주고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했다면 우리 가족은 그 긴 세월을 고통에 신음하며 살아가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순직 처분을 해놓고도 누구 하나 사과하는 사람이 없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도 없다. 이런 식으로 어영부영 넘어가면 나중에 정부가 다시 바뀌고 군 통수권자의 의지가 사라졌을 때 우리 군이 과거 관행대로 흘러가지 않겠나. 이 기회에 보안과 보신을 최고 가치로 삼는 군 체질을 바꾸고, 투명하고 민주적인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직 자식이 왜 죽었는지 의문을 풀지 못한 채 고통받고 있는 다른 군 의문사 유가족에게는 “절대 굴하지 말고 계속 문제제기를 하라. 소리를 내라. 그러면 정의로운 사람들이 반드시 도움을 준다”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비로소 국립묘지에 묻히게 된 김 중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지 물었다. 내내 아들을 ‘김 중위’라 부르던 김 장군이 처음으로 ‘우리 훈이…’라며 입을 열었다.

    “자 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죠. 나는 그렇게 묻으면 잊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병이 나서 죽어가는 걸 본 것도 아니고, 멀쩡한 애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고 나면…. 나는 계속 같이 살아온 거예요. 그동안, 우리 훈이랑.”

    김 장군이 손을 가슴팍에 올렸다. 그리고 힘차게 두드렸다. “훈이가 여기서 이렇게 나와 함께 숨을 쉬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한테 계속 얘기했어요. ‘힘내세요, 아버지. 저는 정말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버지, 해보세요. 반드시 됩니다.’ 그게 느껴져서, 그래서 내가 계속 싸울 수 있었어요.”

    김 중위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을 잃은 슬픔과 세상에 대한 배신감, 모멸감에 숨이 막히던 순간에도 자신이 흔들리면 집안이 다 무너져버릴까 봐 눈물 한 번 흘리지 못했다는 김 장군의 눈가가 이내 촉촉해졌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라고 말한 그는 또 한 번 이를 악물었다.



    never forget, never again

    “군이 김 중위의 순직을 인정했을 뿐 아직도 우리 훈이가 왜 죽게 됐는지 분명히 밝혀진 게 없어요.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군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까지,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투명한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까지 계속 싸울 겁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 훈이의 명예가 회복되면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작은 의자를 하나 만들고 싶어요. 유대인이 홀로코스트를 말할 때 ‘never forget never again’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의미를 담아, ‘98년 세상을 떠난 젊은 장교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의자를 만드는 것, 그런 일을 하는 게 내 마지막 바람입니다.”

    ‘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미신불사, 즉적불감모아의).’

    김 장군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 감히 이 열한 자가 떠올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쓴 글이다. 충무공은 정유재란 당시 ‘수군을 해체하라’는 조정 명령에 불복하고 자신에게 남은 열두 척의 배로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하며 바로 이 장계를 올렸다. ‘미천한 신(臣)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충무공의 결기에 “아직 나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김 장군 모습이 겹쳤다. 김 장군은 군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국방부의 ‘부당한’ 결정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자신이 36년간 목숨 바쳐 지켰고, 대를 이어 아들이 충성했던 조국과 군대를 위해 앞으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 그 앞에 놓인 것은 다시는 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를 바꾸고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김 장군은 다시 한 번 전선에 섰다. 아마도 틀림없이 목숨을 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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