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1

2017.08.16

인터뷰

“김기덕 감독 사건, 떠들썩하게 시작하기보다 의미 있게 끝내겠다”

영화계 구태 ‘갑질’에 경고장 날린 이명숙 ‘나 · 우리’ 대표변호사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7-08-14 13: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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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드카펫 행사가 열릴 때면 늘 볼 수 있는, 아름답고 유명한 여성 예술인한테서 얼마 전 전화가 왔어요. 이번 사건을 맡아줘 고맙다고, 자신도 힘든 일이 있었는데 의논하고 싶다고요. 걱정 말고 찾아오시라 했죠. 전부터 그런 연락을 종종 받았어요. TV나 스크린 속에서는 늘 밝게 웃는 사람이 그동안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할 고통을 혼자 겪었겠구나 싶어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8월 8일 법률사무소 ‘나·우리’의 이명숙 대표변호사(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 대표·사진)가 한 얘기다. 그는 최근 김기덕 감독을 강요와 폭행, 모욕, 명예훼손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한 배우 A씨의 변호를 맡아 화제를 모았다.



    “관행적 갑질을 끝내자”

    8월 8일 ‘영화감독 김기덕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연 기자회견에 따르면 A씨는 2013년 김 감독 영화에 출연했다 촬영장에서 대본에도 없는 곤혹스러운 연기를 강요받았다. 김 감독으로부터 폭행과 모욕 등 각종 인격 모독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결국 영화 촬영을 중단했고, 이후 한동안 여성단체와 여러 상담소, 변호사사무실, 국가인권위원회 등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다, 1월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영화노조)이 영화인의 고충을 접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이곳 문을 두드렸다. 거기서 이 변호사를 소개받아 사건 발생 후 4년 만에 비로소 법적 대응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현재 공대위에는 이 변호사 외에도 영화노조 등 영화계와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 등 법조계 인사들이 참여해 A씨를 지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 세 직군이 힘을 모아 영화계 내 인권 침해 문제에 공동대응하고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변호사는 “개인적으로는 문화예술계의 관행적 ‘갑질’ 피해자를 법률적으로 지원한 일이 몇 번 있다. 피해자가 신원 노출에 의한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언론의 관심을 끌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최대한 조용히 사건을 처리하곤 했다. 이번 일도 그렇게 진행하려 했는데, 검찰에 김 감독에 대한 고소장을 접수한 사실을 한 언론이 보도하면서 사건이 공개됐다”고 했다.

    이번 사건 외에도 문화예술계 내 인권 침해 사건이 빈발한다는 얘긴가.
    “내가 그 안에 몸담고 있는 사람만큼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우연한 기회로 몇몇 유명인의 사건을 맡으며 감독과 연기자, 매니저와 연기자, 또는 같은 직군 사람들 사이에서 성폭력, 폭행, 협박, 명예훼손, 강요, 출연료를 둘러싼 분쟁이나 부당한 대우가 적잖이 일어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도 많은 이가 언론에 보도될까 봐, 혹은 함께 고생하는 동료에게 폐를 끼치게 될까 봐, 아니면 연예계를 떠나게 되거나 ‘문제아’로 낙인찍힐까 봐 등 갖가지 이유로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 채 참고 지내더라.

    그 과정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은 점점 안하무인 ‘슈퍼갑’이 되고,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긴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참 좋아하는, 채널만 돌리면 나오는 유명인이 실은 카메라 뒤에서 인격적 모멸감을 느끼며 일하는 문화를 이제 끝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A씨의 호소를 들었을 때도 ‘아,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했다.”

    A씨는 이 변호사님을 만나기 전에도 여러 사람을 만나 어려움을 털어놨다는데, 사건 후 4년이 지나도록 왜 법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나.

    “이분의 피해 이야기를 들은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안타깝긴 하지만 그냥 덮자’는 쪽으로 조언해준 것 같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한테 섣불리 맞서는 건 ‘달걀로 바위 치기’ 아니냐, 언론에 알려지면 당신만 손해를 볼 수 있다. 같은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데도 누구 하나 시원하게 손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단죄보다 세상 바꾸는 게 중요

    이 변호사님 생각은 달랐나.
    “A씨와 서로 생각이 통한 거다. 이분과 얘기했다. 이제라도 당시 김 감독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리고, 그 결과 김 감독이 조사를 받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영화계 풍토에 변화가 생길 거라고 많은 사람이 짐작하듯 우리나라 1, 2세대 연출자 중 상당수는 인권 의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관행이 세월이 흐른다고 저절로 사라지는 게 아니다. 겉으로는 다 참고 지나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인격 침해를 당하는 사람은 매우 긴 시간 동안 고통에 시달릴 수 있고, 그것이 문제라는 걸 젊은 사람들이 드러내야 변화가 시작되지 않겠나. 다시는 누구에게도 ‘예술’이나 ‘연출’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소송은 그 첫걸음이다.”

    이 변호사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는 아직 검찰 조사조차 시작되지 않았고, 상대가 있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언론 플레이’를 하면서 떠들썩하게 누구를 창피 주려는 마음도 없다고 했다. “영화계 내부에서 변화가 시작되는 출발점을 만들려면 오히려 더 조용히, 법률적 관점에서 사건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떠들썩하게 시작했다 별 결실 없이 유야무야되는 것보다 의미 있는 마무리가 중요하다”고도 했다. 어쩌면 A씨에 앞서 그의 손을 잡았던 또 다른 문화예술계 ‘을’들도 이 변호사의 이런 태도에 의지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의 힘을 이용해 특정인을 단죄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주위 사람의 인식을 바꾸고, 업계 관행을 바꿔, 결국 세상을 바꿔나가는 출발점을 만들어내려는 자세 말이다.

    이 변호사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여러 건의 공익소송도 바로 그런 결실을 만들어내곤 했다. 이 변호사는 그동안 등굣길에 참혹한 성폭력을 당한 ‘나영이’, 영화 ‘도가니’의 실제 주인공인 광주인화학교 장애인 피해자들, 새엄마의 상습적 매질에 시달리다 끝내 목숨을 잃은 ‘칠곡 계모사건’ 등 돈 없고 억울한 이들의 변호를 맡아온 인물이다. 이들 소송에서 때로는 흉악범, 때로는 ‘악마’의 손아귀로부터 힘없는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 국가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마침내 승리를 거둬, 그것을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으로 삼기도 했다.



    “‘을’을 제도적으로 돕는 일하겠다”

    나영이 사건 당시 이 변호사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건 일은 유명하다.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국가가 나영이 가족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보고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결국 국가는 나영이에게 1000만 원, 어머니에게는 300만 원을 각각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아동 및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범죄에 관한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개정되기도 했다.

    이 변호사는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는 대한변호사협회(변협) 세월호 참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서울과 전남 진도 팽목항을 오가며 희생자 가족에 대한 법률적 지원을 이끌기도 했다. 이런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 변호사가 여성과 어린이, 학대 피해자 문제 등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것이 앞선 문화예술계 유명인들과 A씨 등이 그를 찾아가게 만드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 변호사는 이런 일에 앞장서게 된 계기로 “여성변호사가 드물던 시절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을 들었다. 한국여성변호사회장 등을 지낸 이 변호사가 법조계에 진출한 1990년에는 전국적으로 여성변호사가 10명 정도밖에 안 됐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여성  ·  아동 관련 사건이 발생하면 자연스레 ‘여성’ 변호사인 그를 찾는 이가 많았고,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돕다 보니 저절로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을’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일에 나설 방침이다. 대표로 있는 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를 통해 가정폭력과 아동학대 사건 피해자 등을 지원하고, 이들을 제도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도 마련하려고 노력 중이다. 현재는 오랫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아내가 남편을 살해할 경우 정당방위의 범위를 넓게 인정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 제정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그가 대표로 있는 법률사무소 ‘나·우리’의 인터넷 홈페이지 첫 화면엔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권리는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법원이 가정폭력 피해 아내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이명숙 변호사가 요즘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가정폭력 피해 아내에 대한 법률적 보호’ 문제다. 그는 요즘 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한 여성 살인자를 변호하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결국 그를 살해한 이 여성은 범행 후 곧바로 자수했고, 이후 교도소에 갇힌 채 재판을 받고 있다. 이 변호사가 해당 여성을 알게 된 건 그의 자녀가 연락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어머니는 죄가 없다고, 제발 어머니를 도와달라고 호소하더라고요. 아버지가 평생 어머니한테 폭력을 저질렀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 법원은 이럴 때 여성을 ‘살인죄’로 처벌하는 게 대부분이에요.”

    지난해 대법원은 남편의 가정폭력에 오랫동안 시달린 사람이라도 당장 목숨을 위협받지 않는 상황에서 남편을 살해했다면 정당방위로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현실적인 생명의 위협이나 폭력이 발생한 상태에서 아내가 남편을 살해했을 때도 정당방위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외국 사례는 좀 다르다. 호주 빅토리아 주는 가정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요건을 인정하고, 프랑수아 올랑드 전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해 폭력 남편을 죽인 아내를 영구사면했다. 미국에서는 남편이 무기를 들고 아내에게 접근하는 상황에서 남편을 살해한 아내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나라도 이런 상황에 놓인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입법적 장치를 마련할 때가 됐다는 게 이 변호사의 생각이다.  

    그는 “한국에서 1990~2002년 살해된 여성의 21.2%가 배우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내연이나 동거관계에 있는 남자에게 죽임을 당한 여성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이 46.4%에 이른다”며 “가정폭력을 단죄하고 가족 구성원을 보호하되, 필요할 경우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법제도가 필요한 때”라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정춘숙, 금태섭 의원 등이 이 뜻에 공감해 국회에서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 작업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이 변호사는 “변호사로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법과 제도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사회 인식과 문화를 바꾸는 것이 소송을 잘 진행하는 것 못잖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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