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가 있을 때 우리는 그이의 모습을 담고자 한다. 눈에 담고, 마음에 담고, 뜨거운 심장 가장 깊숙한 곳에 담으려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지긋이 바라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찰칵’ 사진을 찍거나. 두근두근 서울여행, 오늘은 바로 이 여행을 제안하려 한다. 길을 떠나는 대신 가만히 앉아 서울의 모습을 한 번 그려보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꼭 닮게 그릴 수 있다면 참 좋듯, ‘연인 같은 도시’ 서울을 내 손으로 그릴 수 있다면 서울이 더욱더 사랑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림 그리기의 첫걸음은 위성사진이나 인터넷 포털사이트가 제공하는 지도를 열어 서울의 모습, 특히 도심부의 주요 골격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다. 오늘날 서울은 아주 복잡한 도로망을 가졌다. 개발시대를 지나오면서 도로와 지형이 많이 바뀌어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당초 서울은 조선의 신도시였다. 새로 계획하고 만든 도시라는 뜻이다. 물론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는 사람이 살았고 고려삼경(동경 경주, 서경 평양, 남경 한양)의 하나일 만큼 일찍부터 중요한 도시 지위를 가졌지만, 서울이 오늘 같은 모습을 갖게 된 건 조선왕조 수도로 지정된 후부터다.
당시 새 수도의 입지 및 설계 방안을 놓고 전문가와 정치가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논의와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완성된 기본 골격을 한 번 그려보는 게 오늘의 과제다. 당시 우리 조상들이 한양도성을 설계했듯 우리도 한 번 하얀 종이 위에 서울의 얼개를 그려보는 것이다.
내사산과 사대문
먼저 동서남북 네 방향에 산을 그리자. 북쪽에 백악, 남쪽에 목멱(남산), 동쪽에 타락(낙산), 서쪽에 인왕까지 내사산(內四山)을 그린 다음 각각의 산과 산을 잇는다. 마름모 형태로 나타나는 그 선이 바로 한양도성의 경계이자 지금 한양도성 성곽이 지나가는 자리다.
다음에는 성문 위치를 표시해보자. 먼저 동쪽 낙산 아래쪽에 흥인지문(동대문) 자리를 정하고 서쪽 인왕산 아래에는 돈의문(서대문) 자리를 잡는다. 두 지점을 잇는 선을 그으면 이 선이 바로 한양도성의 동서대문을 연결하는 ‘메인스트리트’ 종로가 된다. 동대문에서 똑바로 서쪽으로 향해 가던 종로는 인왕산에서 뻗어 내려와 지금의 경희궁 자리에 봉긋 솟은 언덕을 만나 비스듬히 아래로 휘어 서대문에 닿는다.
다음은 숭례문(남대문) 차례다. 숭례문은 이름처럼 도성 정남쪽에 있어야 하지만 목멱산이 가로막아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에 따라 남산과 인왕산 사이 평지, 방위로 말하자면 한양도성의 남서쪽에 자리하게 됐다. 숙정문(북대문)은 백악산 정상에서 낙산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그 자리도 어림잡아 표시해보자.
다음은 궁궐을 그릴 차례다. 중국이나 일본의 옛 도성을 보면, 대부분 네모반듯한 도성의 정중앙 또는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자리에 궁궐을 하나 지었다. 그런데 한양도성에는 특이하게도 경복궁과 창덕궁 두 개의 궁이 배치돼 있다. 백악산 바로 아래 경복궁이 있고 백악산과 낙산 사이, 경복궁과 나란한 자리에 창덕궁이 자리를 잡았다. 두 궁궐의 위치도 그림에 그려 넣어보자. 궁궐 남측에는 광화문과 돈화문이 각각 자리하고, 궁궐의 남문과 메인스트리트 종로 사이에는 남쪽으로 향하는 두 개의 주작대로, 즉 세종대로와 돈화문로가 뻗어가게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남대문과 종로를 잇는 일이다. 한양도성에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대문인 남대문에서 어떻게 종로까지 가고, 또 두 곳의 궁궐에 이를 수 있을까. 먼저 상상력을 발휘해 남대문과 종로를 잇는 남대문로를 그려보자. 지금은 광화문에서 서울시청을 거쳐 남대문까지 이르는 세종대로가 있지만, 이 길은 훗날 생겼다. 한양도성 건립 당시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길은 남대문에서 남대문시장 쪽으로 돈 뒤 현재의 한국은행 자리를 지나 종각에 이르는 길, 바로 남대문로였다.
여기까지 했으면 서울의 얼개를 얼추 다 그린 셈이다. 네 개의 산을 이어 쌓은 한양도성 성곽과 동서남북에 위치한 네 개의 성문, 도성 가운데 자리한 두 곳의 궁궐, 그리고 성문과 성문을 연결하고 궁궐과 메인스트리트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서울의 골격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뼈대인 것이다.
자, 이제 그림을 들여다보자. 어떤 모양인가. 종로와 남대문로만 본다면 서울의 얼개는 영어 알파벳 J처럼 보일 것이고, 세종대로와 돈화문로까지 포함해보면 Y자 같아 보일 것 같다. 이제 이 그림을 ‘수선전도’ 같은 옛 지도와 비교해보자. 미처 그리지 못한 청계천과 도성 안 물길 흐름 및 방향을 서로 비교해보면 좋겠다.
우리가 그린 지도를 지금의 위성영상이나 포털사이트 지도와도 비교해보자. 서울이 녹지도시라는 게 느껴지는가. 한양도성을 쌓은 네 개의 산과 산등성이 자체가 녹지인데, 거기에 더해 백악산에서 경복궁으로, 또 백악산에서 창덕궁을 지나 종묘로까지 녹지가 흘러 내려오는 게 보인다. 그렇게 손가락처럼 뻗어 내려온 녹지 사이로 시가지와 마을이 형성됐다. 종로 북쪽을 보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북촌이 있고,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가 서촌(웃대 또는 상촌)이며, 창덕궁과 낙산 사이가 동촌이다.
우아한 숲의 도시
이렇게 만들어진 수도 한양 신도시는 조선시대를 거치고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지난 뒤 6·25전쟁과 전후 복구, 급속한 도시화 과정과 개발시대를 거치면서 숱한 변화를 겪었다. 조선시대 당시 약 20만 명 인구가 살던 도시에 지금은 1000만 명이 머물고 있으니 변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이 도시의 뿌리였던 한양도성의 얼개는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산과 산등성이를 따라 오르내리며 쌓은 한양도성이 대부분 그 자리에 있고, 경복궁과 창덕궁과 세종대로와 돈화문로 역시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종로와 남대문로를 비롯한 주요 도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으니 말이다.
서울 모습을 직접 그려보니 어떤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그릴 때처럼 더욱더 사랑스러워 보이는가. 서울의 얼개가 눈에 들어왔다면 이제부터 서울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아주 많이.
그림 그리기의 첫걸음은 위성사진이나 인터넷 포털사이트가 제공하는 지도를 열어 서울의 모습, 특히 도심부의 주요 골격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다. 오늘날 서울은 아주 복잡한 도로망을 가졌다. 개발시대를 지나오면서 도로와 지형이 많이 바뀌어 원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당초 서울은 조선의 신도시였다. 새로 계획하고 만든 도시라는 뜻이다. 물론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는 사람이 살았고 고려삼경(동경 경주, 서경 평양, 남경 한양)의 하나일 만큼 일찍부터 중요한 도시 지위를 가졌지만, 서울이 오늘 같은 모습을 갖게 된 건 조선왕조 수도로 지정된 후부터다.
당시 새 수도의 입지 및 설계 방안을 놓고 전문가와 정치가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논의와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완성된 기본 골격을 한 번 그려보는 게 오늘의 과제다. 당시 우리 조상들이 한양도성을 설계했듯 우리도 한 번 하얀 종이 위에 서울의 얼개를 그려보는 것이다.
내사산과 사대문
먼저 동서남북 네 방향에 산을 그리자. 북쪽에 백악, 남쪽에 목멱(남산), 동쪽에 타락(낙산), 서쪽에 인왕까지 내사산(內四山)을 그린 다음 각각의 산과 산을 잇는다. 마름모 형태로 나타나는 그 선이 바로 한양도성의 경계이자 지금 한양도성 성곽이 지나가는 자리다.
다음에는 성문 위치를 표시해보자. 먼저 동쪽 낙산 아래쪽에 흥인지문(동대문) 자리를 정하고 서쪽 인왕산 아래에는 돈의문(서대문) 자리를 잡는다. 두 지점을 잇는 선을 그으면 이 선이 바로 한양도성의 동서대문을 연결하는 ‘메인스트리트’ 종로가 된다. 동대문에서 똑바로 서쪽으로 향해 가던 종로는 인왕산에서 뻗어 내려와 지금의 경희궁 자리에 봉긋 솟은 언덕을 만나 비스듬히 아래로 휘어 서대문에 닿는다.
다음은 숭례문(남대문) 차례다. 숭례문은 이름처럼 도성 정남쪽에 있어야 하지만 목멱산이 가로막아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에 따라 남산과 인왕산 사이 평지, 방위로 말하자면 한양도성의 남서쪽에 자리하게 됐다. 숙정문(북대문)은 백악산 정상에서 낙산 방향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그 자리도 어림잡아 표시해보자.
다음은 궁궐을 그릴 차례다. 중국이나 일본의 옛 도성을 보면, 대부분 네모반듯한 도성의 정중앙 또는 북쪽으로 약간 치우친 자리에 궁궐을 하나 지었다. 그런데 한양도성에는 특이하게도 경복궁과 창덕궁 두 개의 궁이 배치돼 있다. 백악산 바로 아래 경복궁이 있고 백악산과 낙산 사이, 경복궁과 나란한 자리에 창덕궁이 자리를 잡았다. 두 궁궐의 위치도 그림에 그려 넣어보자. 궁궐 남측에는 광화문과 돈화문이 각각 자리하고, 궁궐의 남문과 메인스트리트 종로 사이에는 남쪽으로 향하는 두 개의 주작대로, 즉 세종대로와 돈화문로가 뻗어가게 될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남대문과 종로를 잇는 일이다. 한양도성에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대문인 남대문에서 어떻게 종로까지 가고, 또 두 곳의 궁궐에 이를 수 있을까. 먼저 상상력을 발휘해 남대문과 종로를 잇는 남대문로를 그려보자. 지금은 광화문에서 서울시청을 거쳐 남대문까지 이르는 세종대로가 있지만, 이 길은 훗날 생겼다. 한양도성 건립 당시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길은 남대문에서 남대문시장 쪽으로 돈 뒤 현재의 한국은행 자리를 지나 종각에 이르는 길, 바로 남대문로였다.
여기까지 했으면 서울의 얼개를 얼추 다 그린 셈이다. 네 개의 산을 이어 쌓은 한양도성 성곽과 동서남북에 위치한 네 개의 성문, 도성 가운데 자리한 두 곳의 궁궐, 그리고 성문과 성문을 연결하고 궁궐과 메인스트리트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서울의 골격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뼈대인 것이다.
자, 이제 그림을 들여다보자. 어떤 모양인가. 종로와 남대문로만 본다면 서울의 얼개는 영어 알파벳 J처럼 보일 것이고, 세종대로와 돈화문로까지 포함해보면 Y자 같아 보일 것 같다. 이제 이 그림을 ‘수선전도’ 같은 옛 지도와 비교해보자. 미처 그리지 못한 청계천과 도성 안 물길 흐름 및 방향을 서로 비교해보면 좋겠다.
우리가 그린 지도를 지금의 위성영상이나 포털사이트 지도와도 비교해보자. 서울이 녹지도시라는 게 느껴지는가. 한양도성을 쌓은 네 개의 산과 산등성이 자체가 녹지인데, 거기에 더해 백악산에서 경복궁으로, 또 백악산에서 창덕궁을 지나 종묘로까지 녹지가 흘러 내려오는 게 보인다. 그렇게 손가락처럼 뻗어 내려온 녹지 사이로 시가지와 마을이 형성됐다. 종로 북쪽을 보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북촌이 있고,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가 서촌(웃대 또는 상촌)이며, 창덕궁과 낙산 사이가 동촌이다.
우아한 숲의 도시
이렇게 만들어진 수도 한양 신도시는 조선시대를 거치고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지난 뒤 6·25전쟁과 전후 복구, 급속한 도시화 과정과 개발시대를 거치면서 숱한 변화를 겪었다. 조선시대 당시 약 20만 명 인구가 살던 도시에 지금은 1000만 명이 머물고 있으니 변화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이 도시의 뿌리였던 한양도성의 얼개는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산과 산등성이를 따라 오르내리며 쌓은 한양도성이 대부분 그 자리에 있고, 경복궁과 창덕궁과 세종대로와 돈화문로 역시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종로와 남대문로를 비롯한 주요 도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으니 말이다.
서울 모습을 직접 그려보니 어떤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그릴 때처럼 더욱더 사랑스러워 보이는가. 서울의 얼개가 눈에 들어왔다면 이제부터 서울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