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한국 골프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해방 직후 알려진 골프선수라고 해봐야 1941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첫 한국인 프로 연덕춘 정도였다. 78년 5명의 프로를 배출하면서 태동한 한국 여자골프는 올해 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20개 대회에서 12승을 거둘 정도로 발전했다.
해방 후 만들어진 첫 골프장은 1950년 5월 개장한 서울 능동의 군자리(현 어린이대공원) 코스였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다 폐쇄한 이 골프장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이순용 외자관리청장이 재개장했다. 북한의 위협이 높아지는데도 주말이면 일본으로 골프를 즐기러 가는 미군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첫 골프장은 한 달 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됐고, 54년 그 자리에 서울컨트리클럽(CC)이 들어섰다.
1964년 일본식 입회급제를 도입한 한양CC를 필두로 76년엔 골프장이 전국 20여 곳으로 늘었다. 88년에는 골프장 설립 인허가 업무가 청와대에서 각 시도 지방자치단체로 이전되면서 골프장 건설 붐이 일었다. 2000년대 초엔 골프장 회원권 가격이 오르면서 우후죽순으로 코스가 생겨나더니 최근 500곳을 넘겼다. 코스 수로는 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 호주, 독일, 프랑스, 중국에 이어 세계 9위다.
골프장 증가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한국 골퍼들의 성장세다. 프로골프대회는 1958년 6월 열린 한국프로골프선수권과 10월 서울CC에서 열린 한국오픈이 시작이었다. 초창기만 해도 주한미군인 C. E. 무어 등 미국, 일본 선수들이 우승을 휩쓸었지만 캐디로 시작한 한장상, 김학영 등 토종 프로들이 금세 주도권을 잡았다. 임진한, 김종덕은 일본투어에 진출, 해외 투어에서 활로를 찾았다.
‘탱크’라는 별명을 가진 최경주는 영어 한 마디 못 하면서도 미국 무대에 도전해 2002년 뉴올리언스 컴팩클래식에서 첫 우승을 했다. 이후 그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을 포함해 아시아인 최초로 8승을 올렸다. 2009년 메이저대회인 미국 프로골프협회(PGA) 챔피언십에서 양용은이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도 쾌거다. 김경태, 배상문도 일본투어를 거쳐 세계 최고들이 모이는 PGA 투어로 향했다. 그런 업적을 바탕으로 10월 인천 송도에서 아시아 최초로 프레지던츠컵을 개최하게 됐다.
여자선수들은 짧은 한국 골프사의 블루칩이다. 1978년 처음으로 5명의 프로를 배출했다. 한명현, 구옥희, 강춘자 등 1세대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내 ‘여자부’에 속해 남자선수들이 치고 간 뒤를 따르면서 자투리 시간에 시합을 하곤 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가 정식으로 발족하고 여자 골프대회들이 독립한 건 88년 일이다.
한국 여자 골프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 박세리가 LPGA 메이저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극적으로 우승하면서부터다. 연장전까지 간 그 대회를 새벽에 자다 깬 눈으로 지켜본 소녀가 바로 현재 세계랭킹 1위 박인비다. 박세리의 영향으로 골프를 시작한 신지애, 최나연 등 ‘세리키즈’가 오늘날 세계를 휘어잡고 있다. 또한 세리키즈의 성공 신화를 보면서 성장한 그 뒤 세대가 김효주, 전인지, 김세영이다. 이들은 미국투어에 뒤질 것 없는 국내 투어에서 강하게 단련된 만큼 LPGA에 초청돼 출전할 때마다 거침없이 우승컵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일본여자투어에선 구옥희가 85년 이후 23승을 거둔 뒤 고우순, 이영미, 이지희, 전미정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2012년부터는 이보미, 안선주, 신지애가 일본의 빅3 체제를 형성하면서 올 상반기에만 한국 선수가 7승을 거뒀다.
한국 골프는 70년 만에 국내 코스만 500곳을 확보하고 남자선수들은 PGA 13승과 일본남자투어 57승, 여자선수들은 LPGA 135승과 일본여자투어 165승을 쌓아 올렸다. 스포츠 한류의 대표 사례를 골프에서 찾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요즘이다.
해방 후 만들어진 첫 골프장은 1950년 5월 개장한 서울 능동의 군자리(현 어린이대공원) 코스였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다 폐쇄한 이 골프장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이순용 외자관리청장이 재개장했다. 북한의 위협이 높아지는데도 주말이면 일본으로 골프를 즐기러 가는 미군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첫 골프장은 한 달 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됐고, 54년 그 자리에 서울컨트리클럽(CC)이 들어섰다.
1964년 일본식 입회급제를 도입한 한양CC를 필두로 76년엔 골프장이 전국 20여 곳으로 늘었다. 88년에는 골프장 설립 인허가 업무가 청와대에서 각 시도 지방자치단체로 이전되면서 골프장 건설 붐이 일었다. 2000년대 초엔 골프장 회원권 가격이 오르면서 우후죽순으로 코스가 생겨나더니 최근 500곳을 넘겼다. 코스 수로는 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 호주, 독일, 프랑스, 중국에 이어 세계 9위다.
골프장 증가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한국 골퍼들의 성장세다. 프로골프대회는 1958년 6월 열린 한국프로골프선수권과 10월 서울CC에서 열린 한국오픈이 시작이었다. 초창기만 해도 주한미군인 C. E. 무어 등 미국, 일본 선수들이 우승을 휩쓸었지만 캐디로 시작한 한장상, 김학영 등 토종 프로들이 금세 주도권을 잡았다. 임진한, 김종덕은 일본투어에 진출, 해외 투어에서 활로를 찾았다.
‘탱크’라는 별명을 가진 최경주는 영어 한 마디 못 하면서도 미국 무대에 도전해 2002년 뉴올리언스 컴팩클래식에서 첫 우승을 했다. 이후 그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을 포함해 아시아인 최초로 8승을 올렸다. 2009년 메이저대회인 미국 프로골프협회(PGA) 챔피언십에서 양용은이 아시아인 최초로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도 쾌거다. 김경태, 배상문도 일본투어를 거쳐 세계 최고들이 모이는 PGA 투어로 향했다. 그런 업적을 바탕으로 10월 인천 송도에서 아시아 최초로 프레지던츠컵을 개최하게 됐다.
여자선수들은 짧은 한국 골프사의 블루칩이다. 1978년 처음으로 5명의 프로를 배출했다. 한명현, 구옥희, 강춘자 등 1세대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내 ‘여자부’에 속해 남자선수들이 치고 간 뒤를 따르면서 자투리 시간에 시합을 하곤 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가 정식으로 발족하고 여자 골프대회들이 독립한 건 88년 일이다.
한국 여자 골프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외환위기 이듬해인 1998년 박세리가 LPGA 메이저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극적으로 우승하면서부터다. 연장전까지 간 그 대회를 새벽에 자다 깬 눈으로 지켜본 소녀가 바로 현재 세계랭킹 1위 박인비다. 박세리의 영향으로 골프를 시작한 신지애, 최나연 등 ‘세리키즈’가 오늘날 세계를 휘어잡고 있다. 또한 세리키즈의 성공 신화를 보면서 성장한 그 뒤 세대가 김효주, 전인지, 김세영이다. 이들은 미국투어에 뒤질 것 없는 국내 투어에서 강하게 단련된 만큼 LPGA에 초청돼 출전할 때마다 거침없이 우승컵을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일본여자투어에선 구옥희가 85년 이후 23승을 거둔 뒤 고우순, 이영미, 이지희, 전미정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2012년부터는 이보미, 안선주, 신지애가 일본의 빅3 체제를 형성하면서 올 상반기에만 한국 선수가 7승을 거뒀다.
한국 골프는 70년 만에 국내 코스만 500곳을 확보하고 남자선수들은 PGA 13승과 일본남자투어 57승, 여자선수들은 LPGA 135승과 일본여자투어 165승을 쌓아 올렸다. 스포츠 한류의 대표 사례를 골프에서 찾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