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한(55·사진)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와 마주 앉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봄부터 여러 번 그와 마주쳤다. 처음엔 전남 진도군 진도체육관에서였다. 그는 지난해 5월 통곡과 회한에 짓눌려 있던 진도체육관 한편에 작은 부스를 만들고 세월호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있었다. 팽목항을 가득 채운 노란 리본과 전국에서 몰려든 격려의 쪽지들, 그리고 함께 오열하며 분노하는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까지,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때는 그을린 얼굴의 중년 사내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기록전문가라는 걸 알지 못했다. 수많은 자원봉사자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겼을 뿐이다. 김 교수는 5~6월 두 달간 모든 수업을 주말로 옮긴 뒤 평일엔 내내 진도를 지키며 기록을 수집했다.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엔 경기 안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단원고 학생들의 가족이 모여 사는 그곳에서, 또 한 번 그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정리했다.
살아 움직이는 기억의 공간
자신의 작업에 관심을 두는 사람에게는 늘 말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이 모든 일을 빠짐없이 모아 저장해야 한다고. 그것이 세월호 사고가 잊히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고.
“그것이 진짜 역사를 만드는 방법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권력은 정보를 장악하고 백서를 펴내죠. 그렇게 만들어진 ‘공식 역사’는 ‘객관성’이라는 힘으로 현장에 존재하던 죄악과 슬픔을 다 덮어버려요. 저는 그와 다른 기록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짓눌렀던 아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남기는 것, 그래서 그것이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어요. 우리의 ‘기억저장소’를 만들자고 제안한 거죠.”
그의 이야기에 많은 이가 공감했다. 전국의 기록전문가들이 힘을 보탰고, ‘아름다운재단’이
1억6000만 원을 지원해 장소 임대료를 마련해줬다. 뜻있는 건축가들과 시민들이 모여 무상으로 공간도 꾸몄다. 그렇게 지난해 가을, 단원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산시 고잔동 한 상가건물에 ‘416 기억저장소’(기억저장소)가 문을 열었다.
차디찬 바다에서 건져 올린 희생자들의 옷가지와 주인 잃은 휴대전화기, 유가족들이 진도체육관에서 덮고 지낸 이불과 단원고 아이들의 어린 시절 사진까지 수많은 자료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곳은 유가족 공동체의 공간이기도 하다. 가족 총회가 열리고, 갖가지 모임도 수시로 진행된다.
“지난해 12월에는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 예지의 생일잔치를 하기도 했어요. 예지 부모님을 초대하고, 중고교 친구들을 모아 함께 예지를 기억하는 시간을 마련한 거죠. 모든 사람이 울었지만, 동시에 행복감도 느꼈습니다. 우리 안에 아직 예지가 살아 있음을 깨달으며 서로 감사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니까요.”
김 교수는 “세월호 사고를 기록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바로 감사와 사랑”이라고 말하다 살짝 목이 메었다. 지난 1년간 수없이 눈물을 흘리게 한 기억이 다시 떠오른 듯했다.
“진도에서 유가족들은 항상 바다를 향해, 그 안에 잠겨 있는 아이들을 향해 ‘사랑한다’고 외쳤어요. 그 절실한 외침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죠. 또 그분들은 늘 자신들을 돕는 이들에게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에 진심을 담아 ‘감사’를 말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어쩌면 그런 순간들을 겪으며 ‘이 모든 걸 기억해야겠다, 이분들 곁을 절대 떠나지 말아야겠다’ 결심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계각층 시민들과 함께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모임을 만들고, 공동대표를 맡아 기억저장소 건립 작업을 이끌었다. 하지만 기억저장소가 궤도에 오른 뒤엔 모든 역할을 내려놓고, 자원봉사자가 돼 한 걸음 뒤에 물러선 상태다. 유가족들과 안산의 시민공동체가 기록과 기억의 중심에 서는 게 옳다는 생각에서다.
“유가족들에게 배워라”
지금은 전문가로서, 그리고 유가족들의 친구로서 기억저장소 회의에 참석한다. 매주 화요일마다 건물 1층에 있는 닭발집에서 함께 술잔도 기울인다.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매주 적게는 10여 명, 많게는 30명까지 모인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김 교수가 하는 일은 주로 조용히 듣는 것이다. 지난해 세월호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벌어졌던 긴 싸움과 유가족들의 상처를, 최근 특별법 시행령 제정과 배·보상 갈등 속에서 유가족들이 겪게 된 또 다른 고통을, 그는 그 자리에서 듣고 알고 느끼게 됐다. 그가 여전히 때때로 목 놓아 우는 건, 유가족들의 처절한 고통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는 데서 느끼는 무력감 때문이다. 김 교수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일부 달라지고 있음을 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건 그들 모두 나와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이고, 어느 날 갑자기 지옥 같은 현실에 맞닥뜨렸으며,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왜 자신이 아이를 잃게 됐는지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내린 결론이 ‘다 내 잘못’이라는 거예요. 천박하고 돈만 아는 기업을 그냥 두고 본 탓에 대형사고가 벌어졌고, 무능한 정부를 그냥 두고 본 탓에 누구 하나 구조하지 못하는 엉망진창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같은 일이 또 벌어질 거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절박하게 변화를 요구하는 거예요.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정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말하는 거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본 정신병리학자 노다 마사아키가 쓴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마사아키는 1985년 일본에서 발생한 JAL기 추락 사고 희생자 유가족들과 인터뷰한 결과를 정리한 이 책에서 ‘가해자나 유족이나 모두 상대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다만 그 방향이 서로 어긋나 있다. 가해자는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잊어줬으면 좋겠다’ ‘배상의 성립으로 일단락 짓고 싶다’고 생각한다. (중략) 가해자의 전략은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굳게 믿는 것, 그리고 사고를 잊는 것이다. 다른 한편 유족은 ‘사고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바뀌어버렸다. 그러니까 가해자의 삶의 방식도 바뀌기를 바란다’고 호소한다.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고인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함께 생각하고 함께 변해가기를 제안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김 교수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4월 수많은 아이가 산 채로 물속에 잠겨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과 참담함이 더 큰지, 아니면 지금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느낄 때의 고통이 더 견디기 힘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저는 기록전문가로서 이 말만 하고 싶어요. 기억은 강하지 않습니다. 기억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를 바꿔나가지 않는다면 곧 잊히고 맙니다.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은 잊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우리도 그들로부터 배웠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는 걸요.”
김 교수의 말이다.
그때는 그을린 얼굴의 중년 사내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기록전문가라는 걸 알지 못했다. 수많은 자원봉사자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겼을 뿐이다. 김 교수는 5~6월 두 달간 모든 수업을 주말로 옮긴 뒤 평일엔 내내 진도를 지키며 기록을 수집했다.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엔 경기 안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단원고 학생들의 가족이 모여 사는 그곳에서, 또 한 번 그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정리했다.
살아 움직이는 기억의 공간
자신의 작업에 관심을 두는 사람에게는 늘 말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이 모든 일을 빠짐없이 모아 저장해야 한다고. 그것이 세월호 사고가 잊히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고.
“그것이 진짜 역사를 만드는 방법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권력은 정보를 장악하고 백서를 펴내죠. 그렇게 만들어진 ‘공식 역사’는 ‘객관성’이라는 힘으로 현장에 존재하던 죄악과 슬픔을 다 덮어버려요. 저는 그와 다른 기록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짓눌렀던 아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남기는 것, 그래서 그것이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어요. 우리의 ‘기억저장소’를 만들자고 제안한 거죠.”
그의 이야기에 많은 이가 공감했다. 전국의 기록전문가들이 힘을 보탰고, ‘아름다운재단’이
1억6000만 원을 지원해 장소 임대료를 마련해줬다. 뜻있는 건축가들과 시민들이 모여 무상으로 공간도 꾸몄다. 그렇게 지난해 가을, 단원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산시 고잔동 한 상가건물에 ‘416 기억저장소’(기억저장소)가 문을 열었다.
차디찬 바다에서 건져 올린 희생자들의 옷가지와 주인 잃은 휴대전화기, 유가족들이 진도체육관에서 덮고 지낸 이불과 단원고 아이들의 어린 시절 사진까지 수많은 자료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곳은 유가족 공동체의 공간이기도 하다. 가족 총회가 열리고, 갖가지 모임도 수시로 진행된다.
“지난해 12월에는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 예지의 생일잔치를 하기도 했어요. 예지 부모님을 초대하고, 중고교 친구들을 모아 함께 예지를 기억하는 시간을 마련한 거죠. 모든 사람이 울었지만, 동시에 행복감도 느꼈습니다. 우리 안에 아직 예지가 살아 있음을 깨달으며 서로 감사와 사랑을 나눌 수 있었으니까요.”
김 교수는 “세월호 사고를 기록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바로 감사와 사랑”이라고 말하다 살짝 목이 메었다. 지난 1년간 수없이 눈물을 흘리게 한 기억이 다시 떠오른 듯했다.
“진도에서 유가족들은 항상 바다를 향해, 그 안에 잠겨 있는 아이들을 향해 ‘사랑한다’고 외쳤어요. 그 절실한 외침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죠. 또 그분들은 늘 자신들을 돕는 이들에게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에 진심을 담아 ‘감사’를 말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어쩌면 그런 순간들을 겪으며 ‘이 모든 걸 기억해야겠다, 이분들 곁을 절대 떠나지 말아야겠다’ 결심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계각층 시민들과 함께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네트워크’ 모임을 만들고, 공동대표를 맡아 기억저장소 건립 작업을 이끌었다. 하지만 기억저장소가 궤도에 오른 뒤엔 모든 역할을 내려놓고, 자원봉사자가 돼 한 걸음 뒤에 물러선 상태다. 유가족들과 안산의 시민공동체가 기록과 기억의 중심에 서는 게 옳다는 생각에서다.
“유가족들에게 배워라”
지금은 전문가로서, 그리고 유가족들의 친구로서 기억저장소 회의에 참석한다. 매주 화요일마다 건물 1층에 있는 닭발집에서 함께 술잔도 기울인다.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매주 적게는 10여 명, 많게는 30명까지 모인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김 교수가 하는 일은 주로 조용히 듣는 것이다. 지난해 세월호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벌어졌던 긴 싸움과 유가족들의 상처를, 최근 특별법 시행령 제정과 배·보상 갈등 속에서 유가족들이 겪게 된 또 다른 고통을, 그는 그 자리에서 듣고 알고 느끼게 됐다. 그가 여전히 때때로 목 놓아 우는 건, 유가족들의 처절한 고통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하는 데서 느끼는 무력감 때문이다. 김 교수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일부 달라지고 있음을 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건 그들 모두 나와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이고, 어느 날 갑자기 지옥 같은 현실에 맞닥뜨렸으며, 여전히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왜 자신이 아이를 잃게 됐는지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내린 결론이 ‘다 내 잘못’이라는 거예요. 천박하고 돈만 아는 기업을 그냥 두고 본 탓에 대형사고가 벌어졌고, 무능한 정부를 그냥 두고 본 탓에 누구 하나 구조하지 못하는 엉망진창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같은 일이 또 벌어질 거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절박하게 변화를 요구하는 거예요.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정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말하는 거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본 정신병리학자 노다 마사아키가 쓴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마사아키는 1985년 일본에서 발생한 JAL기 추락 사고 희생자 유가족들과 인터뷰한 결과를 정리한 이 책에서 ‘가해자나 유족이나 모두 상대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다만 그 방향이 서로 어긋나 있다. 가해자는 ‘용서해줬으면 좋겠다’ ‘잊어줬으면 좋겠다’ ‘배상의 성립으로 일단락 짓고 싶다’고 생각한다. (중략) 가해자의 전략은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굳게 믿는 것, 그리고 사고를 잊는 것이다. 다른 한편 유족은 ‘사고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바뀌어버렸다. 그러니까 가해자의 삶의 방식도 바뀌기를 바란다’고 호소한다.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고인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함께 생각하고 함께 변해가기를 제안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김 교수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4월 수많은 아이가 산 채로 물속에 잠겨버렸다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과 참담함이 더 큰지, 아니면 지금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느낄 때의 고통이 더 견디기 힘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저는 기록전문가로서 이 말만 하고 싶어요. 기억은 강하지 않습니다. 기억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를 바꿔나가지 않는다면 곧 잊히고 맙니다.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은 잊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우리도 그들로부터 배웠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는 걸요.”
김 교수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