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수록 중앙에서 얼쩡거려야 그나마 덜 외로울 텐데….”
8년 전, 철든 이래로 삼십 몇 년을 거주해왔던 수도권을 하루아침에 ‘내다버리고’ 지리산 뱀사골 인근의 산곡마을로 주소지를 옮기려고 했을 때, 시 쓰는 친구가 내게 그런 걱정을 내비쳤다.
남쪽 섬마을 출신인 나로서는 인생 후반기의 하방(下放) 후보지로 자연스럽게 바닷가를 계산하고 있었는데, 서울 쪽에서의 주거 상황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어찌어찌 서둘다 보니 순간 이동하듯 지리산 자락에다 이삿짐을 풀어놓았다. 까짓것, 아무리 적자생존이라지만 산골마을에 맞춤한 유전자가 따로 있다더냐.
나를 주저앉힌 ‘세월호 참사’
나는 고삐를 단단히 부여잡고서 내 나름으로 도회지에 길들여진 생각과 몸뚱이를 이랴 자랴, 달래고 어르고 단련하였다. 그리고 5년이 넘었을 즈음, 이제쯤은 내 나름의 일상에 어느 정도 평안을 찾았다 생각하기도 하였다. 병풍처럼 드리운 산봉들이며, 무시로 쏟아지는 새소리며, 그 청량감이 뇌수까지 자극하는 산간수의 물맛이며… 모든 것이 축복이었다. 이만하면 콧노래 부르며 살 만했다.
그런데, 서울 사는 시인 친구가 염려했던 바로 그것, 외로움이 문제였다. 산간 골방에 난 늘 혼자였다. 어느 땐 이웃집 할머니의 뒤통수 한 번 본 것 외엔 사람 모습을 대하지 못한 채 하루해를 넘겨 보내기도 하였다.
그래서 2014년 벽두에 내가 설정한 목표는 이 진물 나는 외로움을 해소하는 일이었다. 그러자면 생계구조를 바꿔야 했다. 여태까지처럼 원고 수입만으로 가계를 꾸리는 한, 생계를 온통 ‘버리고 떠나온’ 수도권에 의탁하는 셈이 되고, 난 늘 골방의 책 무더기나 컴퓨터 앞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외로움은 더해갈 것이며, 결국 나에게 지리산은 ‘몸 뉘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터이다. 그래서 작으나마 농사를 짓는 등 가계 수입 일부를 지리산에서 조달하기로 작심한 것이다. 그러자면 동네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것이었다.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찼다.
2014년을 맞는 감회가 남달랐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1954년, 갑오년, 말띠해 태생인 내가 60갑자를 한 바퀴 돌아 갑년을 맞은 것이다. 연초에 배달된 연하장이며 달력들은 온통 대지를 박차고 내달리는 준마(駿馬) 그림들로 넘쳐났다. 갈기 곤두세우며 허공에 곧추선 그 형상들은 활기 넘치고 역동적이었다. 난 이렇게 중얼거렸다.
“젠장, 나도 펄펄 뛰는 저런 가슴인 적이 있었지. 하지만 바야흐로 ‘질주’를 덕목으로 삼을 나이도 아니려니와, ‘일로매진’은 또한 내가 지향하는 바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 크고 잘생긴 놈들은 다 젊은 그대들 몫 하라. 나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어여쁜 고구려 과하마(果下馬·과일나무 밑을 지나다닐 만큼 작달막하다는 말) 한 마리 장만해 타고서, 여기 지리산 산간 고을의 이 문전 저 고샅을 하염없이 게으른 걸음으로 돌아다닐 것이다!”
전통시대에 도읍을 벗어나 촌락으로 주거지를 옮기는 경우 그것을 은거(隱居)라 하였다. 은거지사들은 중앙조정의 권력다툼 등 온갖 세상 소식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켜 여생을 자연에 의탁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는 ‘은거지사’나 ‘한량’이 세상 소식에 오히려 더 밝은 경우가 많다. 도회지의 직장인들이 분주한 일상에 종종거리는 사이 마땅한 직업이 없는 백수들이나 상대적으로 느슨한 일상을 영위하는 시골 사람들이 오히려 TV나 인터넷을 접할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내가 수도권에 살다가 지리산 자락으로의 하방을 선택했다 해서 중앙정치의 소식을 비롯한 세상일로부터 차단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래쪽 큰 마을로 내려가서 간헐적으로나마 주민들의 농사일도 돕고, 작은 땅뙈기나마 빌려서 채소를 가꾸고, 마을 터주들은 물론 귀농·귀촌인들을 만나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나는 이 거창하기도 하고 소박하기도 한 일들을 계획하고 추진하면서 모처럼 신이 났다.
그러나 지난봄에 터진 ‘세월호 참사’는 나를 다시 골방에 주저앉히고 말았다. 이 나이 동안 살면서 무수한 사건과 사고 소식을 접해왔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건이 그처럼 충격적으로 다가온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다. 사고 희생자 대부분이 아직 피어보지도 못한 고등학생들이어서만은 아닐 터이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을 통하여 그들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 순간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전달되었기 때문만도 아닐 터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혈기 방장한 삼백여 청춘의 수족을 묶어놓고 마치 여객선의 정물(靜物)처럼 앉아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게 만든 용서받지 못할 자들 때문만도 아닐 터이다. 아니, 그것들 모두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 부조리의 총합
모로 누웠던 여객선은 죽음의 각도로 기울어가는데 아이들이 선실에 갇힌 채 깔깔거리다가, 어머니를 부르다가, 살려달라 아우성을 치다가, 중계방송 놀이를 하다가… 그러다 일순간 ‘페이드아웃’! 이것을 믿으라는 것인가? 멀쩡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조금 전까지 천진하게 떠들던 아이들의 얼굴을 어떻게 순식간에 ‘데드마스크’로 바꿔 연상할 수 있겠는가?
그럼 또 이것은 어떤가? 사고 발생 직후부터 서면보고도 받고 유선보고도 받아서 상황을 성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최고책임자가 7시간 만에 나타나서 했다는 이야기, “다 그렇게 구명조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사고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 하나를 꾸리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티격태격이 있었는가? 내가 아는 글벗 중에는 ‘세월호 참사’의 충격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팽목항에서, 서울 광화문 농성장에서 살다시피 한 사람이 여럿 있으며, 수백 편의 추모시를 쓰는 것으로 모자라 정신과 치료를 받는 친구들도 있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아침연속극을 대개 ‘막장’이라고 비난한다. 난 아침에 원고 작업을 하면서도 지상파 3사의 연속극을 습관처럼 챙겨본다. 그런데 막장 연속극의 공통점은 그 결말이 매우 보수적이어서 ‘권선징악’의 구조를 성실히 지킨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발 내년에는 막장 연속극의 마지막 회 같은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잘못한 사람은 개과천선하고, 더 많이 잘못한 사람은 수갑을 차고, 억울한 일로 고생한 주인공은 신원(伸)이 되어 제자리를 찾고….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사회 부조리의 총합이라 할 세월호 참사도 제대로 정리되고 규명이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새해에 다시 과하마 챙겨 타고 마을길로 나설 것이다.
8년 전, 철든 이래로 삼십 몇 년을 거주해왔던 수도권을 하루아침에 ‘내다버리고’ 지리산 뱀사골 인근의 산곡마을로 주소지를 옮기려고 했을 때, 시 쓰는 친구가 내게 그런 걱정을 내비쳤다.
남쪽 섬마을 출신인 나로서는 인생 후반기의 하방(下放) 후보지로 자연스럽게 바닷가를 계산하고 있었는데, 서울 쪽에서의 주거 상황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어찌어찌 서둘다 보니 순간 이동하듯 지리산 자락에다 이삿짐을 풀어놓았다. 까짓것, 아무리 적자생존이라지만 산골마을에 맞춤한 유전자가 따로 있다더냐.
나를 주저앉힌 ‘세월호 참사’
나는 고삐를 단단히 부여잡고서 내 나름으로 도회지에 길들여진 생각과 몸뚱이를 이랴 자랴, 달래고 어르고 단련하였다. 그리고 5년이 넘었을 즈음, 이제쯤은 내 나름의 일상에 어느 정도 평안을 찾았다 생각하기도 하였다. 병풍처럼 드리운 산봉들이며, 무시로 쏟아지는 새소리며, 그 청량감이 뇌수까지 자극하는 산간수의 물맛이며… 모든 것이 축복이었다. 이만하면 콧노래 부르며 살 만했다.
그런데, 서울 사는 시인 친구가 염려했던 바로 그것, 외로움이 문제였다. 산간 골방에 난 늘 혼자였다. 어느 땐 이웃집 할머니의 뒤통수 한 번 본 것 외엔 사람 모습을 대하지 못한 채 하루해를 넘겨 보내기도 하였다.
그래서 2014년 벽두에 내가 설정한 목표는 이 진물 나는 외로움을 해소하는 일이었다. 그러자면 생계구조를 바꿔야 했다. 여태까지처럼 원고 수입만으로 가계를 꾸리는 한, 생계를 온통 ‘버리고 떠나온’ 수도권에 의탁하는 셈이 되고, 난 늘 골방의 책 무더기나 컴퓨터 앞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외로움은 더해갈 것이며, 결국 나에게 지리산은 ‘몸 뉘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터이다. 그래서 작으나마 농사를 짓는 등 가계 수입 일부를 지리산에서 조달하기로 작심한 것이다. 그러자면 동네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것이었다.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찼다.
2014년을 맞는 감회가 남달랐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1954년, 갑오년, 말띠해 태생인 내가 60갑자를 한 바퀴 돌아 갑년을 맞은 것이다. 연초에 배달된 연하장이며 달력들은 온통 대지를 박차고 내달리는 준마(駿馬) 그림들로 넘쳐났다. 갈기 곤두세우며 허공에 곧추선 그 형상들은 활기 넘치고 역동적이었다. 난 이렇게 중얼거렸다.
“젠장, 나도 펄펄 뛰는 저런 가슴인 적이 있었지. 하지만 바야흐로 ‘질주’를 덕목으로 삼을 나이도 아니려니와, ‘일로매진’은 또한 내가 지향하는 바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 크고 잘생긴 놈들은 다 젊은 그대들 몫 하라. 나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어여쁜 고구려 과하마(果下馬·과일나무 밑을 지나다닐 만큼 작달막하다는 말) 한 마리 장만해 타고서, 여기 지리산 산간 고을의 이 문전 저 고샅을 하염없이 게으른 걸음으로 돌아다닐 것이다!”
전통시대에 도읍을 벗어나 촌락으로 주거지를 옮기는 경우 그것을 은거(隱居)라 하였다. 은거지사들은 중앙조정의 권력다툼 등 온갖 세상 소식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켜 여생을 자연에 의탁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는 ‘은거지사’나 ‘한량’이 세상 소식에 오히려 더 밝은 경우가 많다. 도회지의 직장인들이 분주한 일상에 종종거리는 사이 마땅한 직업이 없는 백수들이나 상대적으로 느슨한 일상을 영위하는 시골 사람들이 오히려 TV나 인터넷을 접할 기회가 더 많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내가 수도권에 살다가 지리산 자락으로의 하방을 선택했다 해서 중앙정치의 소식을 비롯한 세상일로부터 차단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래쪽 큰 마을로 내려가서 간헐적으로나마 주민들의 농사일도 돕고, 작은 땅뙈기나마 빌려서 채소를 가꾸고, 마을 터주들은 물론 귀농·귀촌인들을 만나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나는 이 거창하기도 하고 소박하기도 한 일들을 계획하고 추진하면서 모처럼 신이 났다.
그러나 지난봄에 터진 ‘세월호 참사’는 나를 다시 골방에 주저앉히고 말았다. 이 나이 동안 살면서 무수한 사건과 사고 소식을 접해왔지만,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건이 그처럼 충격적으로 다가온 경우는 난생처음이었다. 사고 희생자 대부분이 아직 피어보지도 못한 고등학생들이어서만은 아닐 터이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을 통하여 그들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 순간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전달되었기 때문만도 아닐 터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혈기 방장한 삼백여 청춘의 수족을 묶어놓고 마치 여객선의 정물(靜物)처럼 앉아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게 만든 용서받지 못할 자들 때문만도 아닐 터이다. 아니, 그것들 모두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 부조리의 총합
세월호 침몰 17일째인 5월 2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안개 낀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다.
그럼 또 이것은 어떤가? 사고 발생 직후부터 서면보고도 받고 유선보고도 받아서 상황을 성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최고책임자가 7시간 만에 나타나서 했다는 이야기, “다 그렇게 구명조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사고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 하나를 꾸리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티격태격이 있었는가? 내가 아는 글벗 중에는 ‘세월호 참사’의 충격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팽목항에서, 서울 광화문 농성장에서 살다시피 한 사람이 여럿 있으며, 수백 편의 추모시를 쓰는 것으로 모자라 정신과 치료를 받는 친구들도 있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아침연속극을 대개 ‘막장’이라고 비난한다. 난 아침에 원고 작업을 하면서도 지상파 3사의 연속극을 습관처럼 챙겨본다. 그런데 막장 연속극의 공통점은 그 결말이 매우 보수적이어서 ‘권선징악’의 구조를 성실히 지킨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발 내년에는 막장 연속극의 마지막 회 같은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잘못한 사람은 개과천선하고, 더 많이 잘못한 사람은 수갑을 차고, 억울한 일로 고생한 주인공은 신원(伸)이 되어 제자리를 찾고….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사회 부조리의 총합이라 할 세월호 참사도 제대로 정리되고 규명이 될 것이 아닌가?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새해에 다시 과하마 챙겨 타고 마을길로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