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박현정 (재)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가 예산결산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시의회 의원회관에 들어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 “너는 미니스커트 입고 네 다리로라도 나가서 음반 팔면 좋겠다.”
#3 “네가 보니까 애교가 많아서 늙수그레한 노인네들한테 한 번 보내보려고.”
(재)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 사무국 일부 직원이 박현정(52) 대표이사로부터 들었다고 주장한 언행 가운데 일부다. 서울시향 사무국 직원 17명은 박 대표가 성희롱을 비롯한 인권 유린, 인사 전횡 등을 일삼았다고 주장하며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12월 2일 배포한 A4 용지 20여 쪽의 호소문을 통해 박 대표가 △일상적인 폭언과 모욕적 발언, 성희롱 발언 등으로 직원 인권을 유린했고 △부적절한 행위로 재단의 대내외 이미지를 실추했으며 △공개채용 절차를 거치지 않거나 무분별하게 인사 규정을 개정하는 방식으로 인사 전횡을 했다고 주장했다.
“장기라도 팔아야지 뭐…” 막말
이들은 배포한 자료를 통해 박 대표가 과도한 음주 후 남자 직원과의 스킨십을 시도했고, 여직원에게 “(술집) 마담 하면 잘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도 주장했다. 이들은 또 “박 대표의 폭언 등으로 사무국 직원 27명 가운데 13명이 그만뒀다”며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도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박 대표에게 고성을 자제하고 직원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라고 요청했으나, 박 대표는 정 예술감독에 대한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 대표는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사회학과에서 석·박사를 받았다. 삼성금융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시작해 삼성화재 고객관리파트장, 삼성생명 경영기획그룹장 및 마케팅전략그룹장(전무)까지 오른 성공한 재계 인사 출신이다. 삼성 퇴사 후에는 여성리더십연구원 대표를 지냈다. 지난해 2월, 1년 가까이 공석이던 서울시향 대표 자리에 임명되면서 서울시향의 첫 여성 대표가 됐다. 당시 그가 서울시향 대표가 된 것을 두고 의외라는 반응도 있었다. 전문 경영인이지만 공연·예술 분야 경력은 전무했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취임 간담회에서 “공공기관을 투명하면서도 효율성 있게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는 사회봉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문건에는 작성자들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서울시향에 재직 중인 A씨는 “문건 작성에 참여했느냐”는 물음에 “그렇다. 문건에 담긴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A씨는 “박 대표 부임 이후 직원들이 참아왔고, 외부적으로도 수치스러운 일이라 내부에서 해결하고 싶었으나 더는 참을 수 없었다”며 문건에 언급된 구체적인 발언, 상세한 날짜 등에 대해서도 “너무 자주 폭언에 노출됐기 때문에 기억 못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 대표에게 폭언을 듣고 충격을 받아 퇴사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수시로 욕설을 듣고, 그 스트레스로 병원 신세를 지고, 심지어 정신과 진료까지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박 대표의 기자회견 내용을 본 뒤 추가 대응에 나설 예정입니다.”
취재 과정에서 재직 당시 박 대표로부터 지속적으로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다는 서울시향 퇴사자 B씨와 접촉할 수 있었다. B씨는 “퇴사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지만 너무 힘들어 버틸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사안은 서울시향이라는 특수 단체에서 벌어진 일이 아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인권 유린에 관한 문제”라고 힘줘 말했다.
“박 대표와 미팅할 때 고성을 듣는 건 기본이었고 욕설도 정말 많이 들었어요. 매사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발언을 해서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기본적인 인권에 관한 문제인데, 2014년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정말 현실 같지가 않아요. 업무 중 분풀이를 할 요량으로 직원을 불러놓고 몇 시간씩 머무르게 하기도 하고, 인민재판처럼 공개적인 자리에서 험담을 하기도 했어요. 사실 지금 인터뷰를 하면서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 자체도 무척 힘들지만, 이런 상황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큰맘 먹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건 어느 특수 단체, 특정 예술단체에서 벌어진 일로 국한할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 존중에 대한 문제예요. 불행히도 그런 일이 서울시향에서 벌어진 거고요.”
하지만 이런 내용에 대해 잘 모른다는 반응을 보인 서울시향 직원도 있었다. 12월 2일 ‘주간동아’와의 통화에서 서울시향 소속 C씨는 “관련 문건 작성에 참여하지 않았다”며 “그런 문건이 언론사에 보내졌다는 걸 뉴스를 보고 알았다. 우리 내부에서는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지 못한다. 대표님이 상황을 정리한 후 조만간 입장을 표명하지 않겠느냐”며 말을 아꼈다.
진위 여부를 떠나 논란이 확산됐고 박 대표를 향한 비난이 빗발쳤다. 논란의 중심에 선 박 대표는 12월 2일 서울시향 사무실에 출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휴대전화는 받지 않았다. 주간동아는 박 대표에게 e메일을 보내고 수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진위 떠나 일파만파 논란
(재)서울시립교향악단 사무국 직원 17명이 작성해 보내온 호소문.
서울시향으로선 여러모로 중요한 시기에 이 사건이 터졌다. 박 대표의 임기는 2016년 1월 31일까지. 2015년 법인화 10주년을 앞둔 서울시향은 미국 순회 연주를 계획하고 있어 서울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정명훈 예술감독은 올해 안에 서울시향과의 재계약 여부를 결정한다. 전 구성원이 결속해도 모자랄 시점에 내부에서 불거진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시에서는 이미 지난해 11월 자체 감사를 통해 인사 채용 과정 업무를 소홀히 한 점과 직원 승진 내규를 위반한 사안 등을 지적하며 서울시향에 시정을 요구하고 관련자 3명에게 주의 조치를 통보했다. 올해 5월 ‘서울시립교향악단 특정감사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시향이 정원 외 계약직 팀원을 채용한 뒤 근거 규정 없이 차장으로 임명한 행위는 인사 특혜 오해의 여지가 크고, 지난해 6월 신규 채용한 차장을 인사고과도 받지 않은 채 한 달 만에 팀원에서 팀장으로 승진 발령한 것도 규정 위반이라고 적발했다.
서울시는 12월 4일 ‘서울시향 관련 서울시 입장’ 자료를 내고 10월 14일 정명훈 예술감독을 통해 박 대표에 대한 서울시향 사무국 일부 직원의 탄원을 받은 박원순 시장이 사실관계 조사 등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서울시장은 서울시향 대표 임명권자지만, 해임권은 없다. 서울시는 “조사 과정에서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했고, 정효성 행정1부시장이 박 대표를 만나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다. 박 대표가 10월 29일 사의를 밝히며 시장 면담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진상 조사를 중단했다”고 주장했다. 서울시는 이후 박 대표가 12월 1일 박 시장과의 면담에서 사의를 번복했다고 밝혔고 서울시향 직원들은 다음 날 호소문을 언론에 배포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12월 2일 ‘서울시 인사개혁안’과 관련한 기자설명회에서 이 사안에 대해 “앞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현재로는 (서울시향 직원들의) 주장이기 때문에 더 조사해보겠다”고 답했다. 같은 날 감사원은 서울시향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