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 오후(현지시간) 제46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 참석차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첫 일정으로 알링턴국립묘지를 방문해 헌화하고 있다.
‘몇 년 몇 월에 전환한다’는 이전의 합의와 달리 ‘이러저러한 조건이 충족되면 전환한다’는 새로운 형태의 합의는 박근혜 정부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방식. 그간 “의회와 예산부처의 요구 때문에 특정 시점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던 미국 측이 한 발 양보한 모양새다. 외형상으로는 한국 측 주장이 관철된 셈. 그러나 포커스를 조금만 바꿔보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전작권 전환 연기에 따라 변경되는 사항이 적잖은 탓이다.
총비용 10조 원대 육박
이번 SCM을 앞두고 양측은 전작권 전환 시점까지 유지되는 한미연합사령부를 현재의 서울 용산기지 위치에 잔류케 하고 경기 동두천의 주한미군 210포병여단 역시 한강 이북에 남기겠다는 미국 측 요구를 수용, 합의했다. 한국 정부 관점에서 보자면 회계장부의 대변(貸邊)에는 전작권 전환 연기가, 차변(借邊)에는 용산과 동두천 기지 반환 연기가 남은 셈. 이들 사안은 고스란히 수조 원에 달하는 돈문제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대목이야말로 국방부가 가장 언급을 꺼리는 포인트다.
10년 전 협상 당시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기지 이전 합의를 용산기지(YRP)와 동두천 등 다른 기지(LPP)로 나뉜 두 개의 문서로 구분해 작성했다. 용산의 경우 한국 측 요구에 따라 이전이 이뤄지므로 그 비용을 한국 측이 부담하고, 다른 기지는 미국 측 판단에 따라 합치는 것이므로 미국 측이 부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양측이 내는 비용으로 평택에 새로 통합 미군기지를 구축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2004년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용산기지 평택 이전 사업의 총 예상 사업비는 5조5905억 원. 그러나 이후 환경 정화비용이 추가되고 이전 일정 자체가 지연되면서 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최근 공식자료는 2011년 초 국방부가 발표한 8조8670억 원. 이때보다 이전 일정이 더욱 미뤄진 현재로선 총비용이 10조 원대에 육박할 것이라는 게 안보당국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설명이다. 10년 새 2배가 된 셈이다.
이후 정부는 용산기지가 평택으로 옮겨가면 현 부지는 뉴욕 센트럴파크를 능가하는 자연친화형 민족공원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여러 차례 공식화한 바 있다. 문제는 이번 SCM에서 연합사 서울 잔류가 확정되면서 용산기지를 비울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시점을 못 박지 않은 합의 특성상 연합사 해체와 용산기지 전체 반환 역시 일정을 기약할 수 없게 됐다.
미국 측 예산 부담은 급속도로 줄어
당연히 관심은 미군 시설이 용산에 얼마나 남게 되나에 쏠린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후 양측 협의를 통해 결정될 예정이지만, 이번 SCM을 앞두고 안보당국 관계자들은 현재 용산기지의 10% 이내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전체 부지에서 연합사 관련 시설과 건물이 차지하는 비율로 따져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합사 시설이 용산기지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사이 변화한 주한미군의 근무 형태 등을 고려하면 이번 결정으로 사실상 이태원로 북쪽의 메인포스트 지역 대부분이 반환에서 제외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어느 경우든 용산기지 공원화 사업 전체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됐다는 것이다(상자기사 참조).
10년 전 설명과 달리 이전비용 10조 원을 충당할 방법도 마땅찮다. 2004년 당시 국방부는 캠프 코이너와 캠프 킴, 수송부 등 용산기지 외곽의 자투리 반환 부지를 민간에 매각하면 이전비용의 상당 부분을 벌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국회와 청와대에 보고했다. 그러나 국방부가 지목했던 자투리 부지의 총면적은 19만㎡ 안팎이고, 용산구 인근 지역의 현재 공시지가는 평균 500만~1000만 원 선. 이들 부지가 성공적으로 매각된다 해도 최대치 기준으로 2조 원을 넘기기 어렵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전비용 증가와 부동산 경기 악화, 공원화 사업 차질 등이 맞물리면서 전체 이전비용의 5분의 1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물론 그 부족분은 고스란히 한국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2013년 2월 22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용산 한미연합사령부를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왼쪽). 삼각지에서 바라본 서울 용산기지 전경.
주한미군은 그간 평택기지 건설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방위비분담금에서 축적된 자금 상당 부분을 이미 집행했고, 이로 인해 미국 측 예산 부담은 급속도로 줄었다. 지난해 7월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은 의회에 제출한 서면 답변서에서 “(기지 이전 사업과 관련해) 미국 측 부담액은 8억8460만 달러”라고 밝힌 바 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2007년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국대사의 보고서상의 미국 측 부담액도 6억2000만 달러로 이와 큰 차이가 없다. 우리 측 부담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계산서다.
이번 SCM 합의를 통해 미군 2사단 산하 210여단이 한강 이북에 잔류하기로 하면서 상황은 한층 더 꼬였다. 유사시 다련장로켓포(MLRS) 등으로 북한 장사정포 전력 무력화에 나서는 210여단 포병전력은 2000명 안팎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다. 부대 편성 자체는 현재 한강 이북에 주둔 중인 2사단 3개 여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만, 정비 및 훈련시설 등 적잖은 부지가 필요한 부대 특성상 현재 경기 북부에서 2사단이 사용하는 기지의 절반 가까이를 반환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이를 돌려받아 민간에 매각하거나 공원화하기로 했던 지방자치단체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음은 물론이다.
10년 협상 과정 자체는 낙제점
정리하면 이렇다. 10년 전 평택에 새 기지를 지어주는 조건으로 용산과 동두천 미군기지 등을 반환받기로 했지만, 한국은 받기로 한 것은 받지 못한 반면 미국 측은 용산, 동두천 등 기존 시설에 더해 전 세계 최대 규모의 해외 주둔 미군기지를 별다른 비용 부담 없이 갖게 됐다. 더욱이 최근 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 논란을 통해 확인됐듯이 평택 새 기지는 ‘재균형(rebalancing) 정책’으로 불리는 미국 동아시아 안보전략의 교두보 구실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대북(對北) 억제용 기지를 넘어선다는 뜻이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투입되는 예산 규모를 둘러싸고 국방부 등 한국 정부의 설명은 그사이 여러 차례 바뀐 반면, 미국 측 예상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한국 정부의 국회 보고자료에 등장하는 예산 명세는 매번 꼬박꼬박 증가해 2배 가까이 뛰었지만, 미국 의회 보고자료의 미국 측 재정 부담 내용은 큰 변화가 없었다. 우리가 주먹구구식으로 협상을 이어오는 동안, 미국은 10년 전 세운 계획 그대로 뜻을 관철해냈다는 이야기다.
한 전직 국방부 고위관계자는 “용산과 동두천 잔류 결정은 교체되는 주한미군사령관에 따라 판단이 달랐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측에 부담을 전가하기 위해 반환할 뜻이 없는 기지를 돌려주겠노라고 속였다기보다, 변화하는 안보환경과 사령관 각각의 시각차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전작권 문제와 관련한 한국 정부의 일관성 부족이 현재의 결과를 낳았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또 다른 전직 안보당국 핵심 관계자의 말이다.
“요컨대 기지 이전을 둘러싼 갖가지 불합리와 천문학적 비용 부담을 감수하고 전작권 전환 연기를 받아온 셈이다. 전환 연기가 금액으로 환산이 불가능할 만큼 중요하다고 믿는 박근혜 정부로서는 합리적인 거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전환 연기를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져와야 하는 카드’로 생각한다는 게 미국 측에 간파된 순간, 협상은 이미 지는 게임이었다. 전작권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협상 과정이 낙제점이었다는 평가는 피하기 어렵다고 본다.”
|